이 시대의 제자 된자

이 시대의 제자 된 자/눅9:57-62

이 시대의 제자 된 자
눅9:57-62





가장 사랑 받는 현대 기독교 지성인 가운데 한사람인 리차드 포스터는 이 시대의 현대인들에게 겉으로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깊은 내면의 세계에 자리잡고 있는 최대의 우상은 돈(money)과 섹스(sex)와 권력(power)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성적 즐거움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돈과 명예와 이성적 즐거움을 한 몸에 누리던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었다면 여러분은 그 죽음을 쉽게 이해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렇게도 가졌으면 행복하리라 던 것들을 다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지막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이며 그 죽음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세계적 은막의 스타로 한 시대를 살았던 마를린 몬로라는 여 배우입니다. 남들이 가지지 못했던 부를 누렸고 수많은 권력가들을 움직일 만한 빼어난 아름다움을 가졌던 그녀가 자신의 일기장에 남긴 자살유서에서 \\\"나는 견딜 수 없도록 고독했다\\\"라는 짧은 글을 남김으로 인간들이 추구하는 비뚤어진 행복의 우상을 고발했습니다.

고독함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고독은 사람들을 좌절하게 만듭니다. 고독은 사람들의 존재 의미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고독은 사람을 무너지게 만드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혼자서는 못살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끊어지고 나 혼자 남았다는 생각에 미치면 인간은 치료 할 수 없는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 병은 절망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는 절망을 정의하기를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주고 싶어하고 또한 자신도 사랑 받고 싶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기쁨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 그는 정신적, 육체적 고독 속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 또 한 사람 알프레드 노벨의 예를 들어 보면 그는 스웨덴 태생으로 1866년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함으로 인해 순식간에 거대한 재산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 영국, 이태리 등의 유럽각지에 자신이 거처할 주택을 마련해 놓고 여행을 다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백만장자의 부랑인\\\"이라는 별명이 따라 다녔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겐 아내와 자식이 없었던 것이죠. 그를 맞아줄 따뜻한 가정이 없었던 것입니다. 명예와 온갖 물질적 혜택을 받고 누리던 노벨이었지만 그에겐 사랑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었고, 그는 언제나 고독에 싸여 지냈던 것이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이런 경험이 없었습니까? 이 세상에서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 혼자만 고통스러워해야 하고, 나 혼자만 슬픈 가슴을 억눌러야 하고, 나만 왕따의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 본 적이 없습니까? 가족들도, 직장의 동료들도, 교회의 성도들도 모두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생각되어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독을 견디지 못해 절망했던 경험이 없습니까?

인간은 누군가를 만나야하고 그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인간의 욕구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지고 싶은 욕망도, 누리고 싶은 욕망도, 심지어는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까지도 결코 혼자이지 않기에 꿈틀거리는 것들입니다. 하버드대학 총장을 지냈던 어떤 사람이 현대인들에게는 네 가지 욕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욕구가 믿을 수 있는 신조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따를 수 있는 지도자를 갈망하고, 세 번째 욕구는 흔들 수 있는 깃발이라고 했으며, 네 번째 욕구는 들을 수 있는 노래를 갈망한다고 했습니다. 이 욕구들을 해결하지 못해서 문제가 생기고 더군다나 어떻게 해서든지 이 욕구들을 이루기 위해서 때로는 불법도 자행하고, 윤리도 무너뜨리고,

거짓도 일삼을 뿐만 아니라 살인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간성 상실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현상을 빚어내고 맙니다. 이러한 사회 현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얘깁니다. 가치관도 달라야 합니다. 삶의 목표도 달라야 합니다. 욕구충족의 방식도 달라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하고 나서는 순간 이에 많은 손해가 따릅니다. 직장에서 떨려 납니다.

이혼을 당하기도 합니다. 유산을 못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그나마 좀 자유로워 졌습니다마는 우리나라에도 그랬고 다른 나라에도 그랬습니다. 초대교회시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일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했습니까? 그런데 이 순교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면 순교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게 훨씬 더 어렵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 오는 모든 불이익을 다 받아야 합니다. 즉 순교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11:29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한 목적, 한 방향, 한 방법, 한 마음으로 가자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사람은 이걸 하지 못해서 주님을 따르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주변에서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고백을 합니다마는 실패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왜 실패합니까?

그 첫 번째 이유는 깊은 생각이 없는 일시적인 감정과 충동적으로 예수를 믿고자 하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높은 것과 그 능력이 대단한 것을 보고 그리고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것을 보고는 한번 따라 가봐도 괜찮겠구나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세요. 그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57절에\\\"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하고 일시적 감정으로 말합니다. 마8:19절에 의하면 이 사람은 서기관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의 일시적 감정표현에 대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58절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우나 새는 팔레스틴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짐승으로 둘 다 일정한 자기의 집을 마련해 두고 활동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짐승이라도 자기의 집이 다 있는데 주님은 지금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합니다.

즉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눈에 보이는 현상을 좇아 일시적인 기분으로 따르고 기분 나쁘면 안 따르겠다는 식의 그런 시시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이런 말을 들을 만큼 이 서기관은 제자가 되는 일을 안이하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너무 막 생각해요. 우리의 요구와 주님의 기대가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요구는 언제나 충동적이고 일시적인 것들뿐입니다. 내가 한 만큼 무언가 얻을 계산, 수고에 대한 보상심리로 부자 될 계산, 속 사람은 썩어 문드러져도 육신의 병만은 고칠 계산, 많은 사람 가운데 혼자서 영광만 누릴 계산, 이것이 예수를 따른다는 우리의 요구입니다. 순간순간 일시적이고 충동적으로 솟아나는 감정으로 신앙생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패합니다.

두 번째는 신앙적인 것과 세상 사이에서 늘 갈등하며 핑계거리를 찾는 사람이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제자입니다.

바로 방금 전에 예수님은 서기관의 제자지원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번에는 어떤 사람을 직접 불렀습니다. 얼떨결에 불리움을 받은 이 사람이 \\\"가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한 가지의 자기 조건을 제시합니다. 59절이 그 조건입니다.\\\"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부모님의 장례식을 엄숙히 수행하는 것은 자식 된 마땅한 도리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 죽은 자에 대한 장례식은 다른 어떤 사회적 관습보다도 고귀한 의무이고 모든 일에 우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의 아버지가 지금 죽은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아버지가 죽었다면 그가 지금 한가하게 말씀을 듣고 있을 리가 없으며 더욱이 우리나라처럼 3일장이니 5일장이니 하는 장례풍습이 아니라 무더운 그 지방에서는 죽은 사람을 곧 바로 장사지내는 것이 상례인데 그 시간까지 부친을 장사하지 않을 리가 만무합니다. 따라서 결국 이 사람의 진의는 \\\"나는 우리 아버지가 돌아 가실 때까지 집에 있어야 됩니다.\\\"하는 얘깁니다. 무슨 말입니까? 못 따르겠다는 것이죠. 이런 사람은 관습에 매여 사는 사람입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관습이 있거든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죠. \\\"장자는 반드시 부모를 돌아가실 때까지 모셔야한다

. 부모님을 모시는 동안에는 절대로 한 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등의 관습입니다. 이런 관습에 매여서 살다가 보니 아예 모든 상황에 이 관습이라는 게 세상의 육적인 일을 도모하는데 편리한 핑계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럴듯한 관습을 주일 성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핑계로 삼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도 확실한 결단 없이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언제나 갈등입니다. 교회냐? 세상이냐? 주일성수냐? 장사냐? 예배냐? 취미생활이냐? 날마다 주일마다 갈등하고 또 갈등하고 산다면 얼마나 피곤합니까? 예수님은 생각 따로, 몸 따로 부분적으로 따라가야 할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부가 따라가야 하고, 우리의 일평생이 좇아가야 할 분입니다. 도대체 그 갈등과 핑계가 언제 끝날 것입니까? 이 시대의 제자가 되려면 더 이상 갈등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제대로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 유형의 실패자는 자기의지를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앞의 한사람은 당시 자기의 서기관 신분에 상식적으로 많지 않게 충동적으로 주님을 좇겠노라고 자원한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주님이 좇아오라고 명령한 사람입니다. 그런 지금 이 세 번째 사람은 반은 자원이요, 반은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겠노라합니다. 그러나 가서 가족을 작별하는 일을 꼭해야 되겠다고 합니다. 떠나는 마당이니 이제 언제 또 볼지 모를 가족에게 작별인사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이것마저 말릴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타당한 설득력 있는 절충안입니다. 좇아가는 자기도 여유를 두는 것이고, 부르시는 주님에게도 비교적 순종하는 모양새가 갖추어진 셈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앞에 있는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뒤에 있는 가족의 일이 더 신경 쓰여서 주저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참 박절하다 싶을 정돕니다. 62절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어떤 분이 이 세 번째 사람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상당한 공처가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집에 인사하러 갔다가는 못 빠져 나올 위인이었던 것 같다는 겁니다. 의지가 박약해서 아내가 붙들고 늘어지면 그대로 주저앉고 말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시고 \\\"너 인사하러 가지 마라. 네가 결단했으면 그것으로 밀고 나가라. 너 가면 못나온다\\\"하신 의미에서 냉정하게 말씀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기가 의지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늘 남의 말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 남이 뭐라 한마디하면 혹해서 그만 교회도 버리고, 의리도 버리고, 은혜도 저버리는 사람, 이런 사람은 주님께 합당치 않는 사람입니다.

결단은 자기 혼자의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 예수님의 제자 되는 것, 누구하고 상의 할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해결할 문제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에 내 신앙이 흔들려서는 말이 안 되는 얘깁니다. 그 누구도 내 신앙의 열매를 안겨다 줄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의지적으로 나아가 최선을 다하여 기도하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에 살지만 우리의 이상은 항상 저 앞에 있어야 합니다. 그럼 왜 돌아봅니까? 내 공적(功績)을 확인해보고 싶은 겁니다. 제대로 쟁기질을 했나 싶어서 돌아보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돌아보는 그 순간에도 소는 앞으로 가고있습니다. 내 고개를 돌리는 순간 현재는 망치는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잘되었든 못되었든 끊어버려야 합니다. 오늘 이 사람 결단을 했으면 주님과의 만남 속에 있을 미래를 봤어야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한 것을 미래의 씨앗으로 여기고 열매를 착실히 바라봐야 했다는 말입니다.

한 여인이 꿈을 꾸었습니다. 시장에 가서 새로 문을 연 가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게 주인은 다름 아닌 신(神)이었습니다. 이 가게에서 무엇을 파느냐고 묻자 신은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팝니다.\\\" 놀란 여인은 한참 생각 끝에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마음의 평화와 사랑과 지혜와 행복,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세요.\\\" 그러자 신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가게를 잘못 찾으신 것 같군요. 이 가게에서는 열매는 팔지 않습니다. 오직 씨앗만을 팔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아무 수고 없이 이미 만들어진 마음의 평화·사랑·지혜·행복·자유를 통째로 살려고 합니다. 마치 슈퍼마켓에서 인스턴트 식품을 찾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것도 시기 적절히 잘 조절해서 적당히 필요에 따라 따르는 흉내에 익숙해져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것들을 팔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씨앗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씨앗을 싹 틔울 자를 참으로 안타깝게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 모두의 삶이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이 시대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