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됨과 제자됨 눅15:11-32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질 수 있는 모습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길 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으로 자녀됨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연관해서 생각해볼 때 지닐 수 있는 모습으로 제자됨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자녀됨과 제자됨의 모습은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지닐 수 있는 두 가지 모습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두 모습이 잘 조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의 모습으로만 쏠리게 되면 바람직한 모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새해 들어서 우리 교회의 표어를 \\\"성숙과 조화를 이루는 교회\\\"라 정하고, 이를 위한 실제적 노력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가운데 있습니다. 성숙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일을 위해 시간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성숙함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성숙함이란 이렇게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자녀됨과 제자됨의 모습이 잘 조화되게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자녀됨과 제자됨을 잘 조화될 때 나타나는 결과는 무엇인지를 오늘 말씀을 배경으로 발견해 보도록 하십시다. 자녀됨과 제자됨이 어우러질 때 기대되는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 발견해 보도록 하십시다.
1. 자녀됨의 모습
자녀됨의 모습이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로서 지닐 수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겠다(요 14:18)\\\"고 말씀하신 것도 아마 이러한 자녀 된 모습이 잘 간직되기를 바래서 하신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자녀 된 모습으로 우리들이 지닐 수 있는 모습은 바로 기쁨을 간직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친근한 모습이 바로 기뻐하는 데에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떤 강요된 기쁨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저 간직될 수 있는 그러한 존재론적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표현하기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갈 4:6).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행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2. 제자됨의 모습
제자됨의 모습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모신 가운데 지닐 수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이들로 하여금 장차 교회의 지도자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도 시키셨습니다. 3년이란 세월을 같이 지내시면서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계승하여 나갈 수 있도록 애쓰신 모습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러한 모습을 오늘날 우리들도 우리 자신과 교회에서 적용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있습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성경공부와 기도에 힘쓰며, 복음을 전하고자 애쓰는 모든 모습들이 이러한 제자됨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제자됨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잘 본 받음으로 이루어 나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예수의 흔적을 지니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됨의 모습은 충성된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자녀됨과 제자됨의 상관관계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은 이 두 가지의 모습을 우리 자신의 인격 속에서 함께 갖추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됨의 모습은 있는데 제자됨의 모습이 부족합니다. 이는 주로 신앙인으로서의 의무보다는 권리를 많이 주장할 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자기 자신의 신앙적인 일에는 열심이지만, 교회나 이웃을 염두에 두는 데에는 인색한 모습에서 이러한 경우를 볼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제자됨의 모습은 많이 있는데 자녀됨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약한 경우를 봅니다. 교회 일에 열심과 충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어떤 감격이나 기쁨이 없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보다는 신앙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의무감에 더 사로잡힌 경우입니다.
이러한 자녀됨과 제자됨의 관계를 굳이 설명한다면, 앙꼬빵과 같다고 보겠습니다. 앙꼬빵에는 겉의 밀가루로 된 빵거죽이 있고, 속에는 팥으로 만든 앙꼬가 들어 있습니다. 앙꼬가 없으면 빵이 맛이 없습니다. 하지만 밀가루로 된 빵거죽이 없으면 그것은 빵이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의 모습에는 이러한 자녀됨과 제자됨이 함께 있어야 하겠습니다.
4. 본문에 나타난 자녀됨과 제자됨
오늘 본문은 흔히 \\\"탕자의 비유(The Parable of Prodigal)\\\"라고 우리에게 알려진 말씀입니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집을 나간 탕자\\\" 혹은 \\\"돌아온 탕자\\\"라고 부르고, 집에 남아 있는 큰아들을 \\\"집에 있는 탕자\\\"라고 부르는 데에서 \\\"탕자의 비유\\\"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아버지를 가볍게 여기고 상속을 미리 받아 가지고 나갔다가 염치 불구하고 다시 돌아온 둘째의 모습에서 자녀됨이 비뚤어져 나간 모습이 발견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집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아버지를 섬겼지만, 동생이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고 또 동생이 돌아왔을 때 이를 반기는 아버지가 오히려 이상하다고 투정하는 큰아들의 모습에서 제자됨이 비뚤어져 나간 모습이 발견됩니다. 우리는 이 두 형제의 모습에서 극단적으로 치우친 자녀됨과 제자됨의 현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극복하면서 자녀됨과 제자됨을 조화롭게 이루어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이 두 아들이 아니라, 이들을 맞이하고 이들을 격려하는 아버지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 속에 우리 신앙인의 바람직한 모델이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아들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녀야 할 모습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가 바라는 모습이 바로 우리들이 지녀야 할 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앙드레 지드(Andre Gide)라는 소설가가 쓴 단편 소설 가운데 \\\"돌아온 탕자\\\"라는 글이 있습니다.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 탕자가 돌아온 다음의 이야기를 소설로 그린 것입니다. 앙드레 지드는 이 집에 아들이 셋이 있었다고 假定을 하고 이야기를 만듭니다. 이 셋째 아들은 둘째, 곧 탕자가 집을 나갈 당시에는 어린아이였었는데 탕자가 집에 들어와 보니 그 어렸던 동생은 이제는 제법 커서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호기심이 많은 어린 동생은 \\\"바깥 생활이 어땠느냐?, 바깥 세상이 재미있지 않았느냐?, 집에는 왜 다시 돌아왔느냐?\\\" 하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많이 합니다. 탕자는 \\\"처음에는 좋았지만 점점 살면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집을 나가보니 생각한대로 되지 않더라\\\"고 하면서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들을 자세히 얘기해 주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다 들은 셋째는 \\\"그래도 바깥 세상이 이 집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깜짝 놀라 \\\"그게 무슨 말이냐? 바깥 세상이 얼마나 살벌한 줄 알고 그런 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셋째가 하는 말이 \\\"큰형을 보라\\\"고 하면서 \\\"나는 저 큰 형의 저런 모습과 분위기 속에서는 질식해서 못 살겠다\\\"고, \\\"큰형이 있는 이 집보다는 오히려 바깥 세상이 더 나을 것 같다\\\"고 하면서 결국은 집을 나가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큰아들의 모습을 오늘 본문 28-30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보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
앙드레 지드가 이 셋째 아들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우리 인간은 이러한 삶의 분위기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자신이나 교회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이런 분위기의 신앙인이나 교회라면 전도가 되겠습니까? 세속화를 방지하고 또 이 세상 속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속화의 길을 열어 주는 계기가 된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러한 모습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행한 아버지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거기서 우리 자신이 지녀야 할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이 눅 15장에 나오는 아버지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신앙의 성숙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라고 봅니다.
5. 아버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자녀됨과 제자됨의 조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오늘 본문의 아버지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어떤 공통적인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24절과 32절 말씀입니다. 이 두 말씀은 모두 아버지가 하는 말씀인데 그 듣는 대상이 다를 뿐이지 사실 내용은 같은 것입니다.
24절,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32절,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 아버지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자녀됨과 제자됨이 어우러질 때 나오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먼저 24절 말씀 먼저 보십시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이 말씀은 아버지가 종들에게, 하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아버지의 말을 듣는 하인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아버지의 말씀은 어떤 권위 있는 자의 선언이나 선포의 기능과 같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무엇을 선포하는 말씀입니까?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이 아들은 바로 잃었다가 다시 얻은 내 아들이라는 아들됨을 선포하는 그러한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들됨의 선포에 따르는 기쁨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32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 말씀은 아버지가 누구에게 주신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아버지가 집에 남아 있던 큰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아버지의 말씀에 따른 큰아들의 응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이는 아버지의 권위 있는 말씀이라는 점에서 선포의 말씀이라는 것, 또 하나는 큰아들의 응답이 없다는 점에서 과제로 남아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과제입니까? 그것은 형제됨을 인정하라는 과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24절의 말씀에서 아버지는 이 집을 나갔다 돌아온 둘째의 \\\"아들됨\\\"을 선포하였다면, 32절에서는 이 둘째가 큰아들의 \\\"형제됨\\\"을 선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큰아들의 응답이 아직 없다는 점에서 아직까지는 과제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 모범 된 큰아들로 하여금 동생을 용납하지 못하게 하였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이 큰아들의 말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30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여기서 특별히 이 큰아들이 자기 동생을 무엇이라고 불렀는가를 유의해 보십시다. 그것은 \\\"이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동생을 \\\"이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인 가요? 그것은 아버지를 겨냥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동생을 받아 주는 아버지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묵묵히 집에서 맡겨진 일은 잘 했지만, 아버지의 의도는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큰아들의 모습을 봅니다.
창 3장에서 먹지 말라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뒤 아담이 지칭하는 자기의 아내 하와를 하나님 앞에서 뭐라고 표현합니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하였습니다. 이 아담이 하와를 처음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로다\\\"(창 2:23) 라고 하였습니다. 이렁게 \\\"내 뼈 중의 뼈가 당신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로 바뀐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암시해 줍니까? 하나님과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에는 형제 관계가 지속이 되고 온전해 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평화스럽지 못할 때에는 \\\"형제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큰아들이 아버지의 \\\"형제됨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이 둘째의 \\\"아들됨\\\"을 인정하는 아버지의 선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표시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모습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됨의 표식은 자녀들끼리의 형제됨에서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뜻이며, 이것이 제자된 자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됨이란 하나님의 자녀됨을 형제됨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훈련이요, 자세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자녀됨은 내가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형제들과의 형제됨에서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됨의 모습과 제자됨의 모습이 어우러지는 것은 바로 이 형제됨이 이루어질 때에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모습과 역할을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가 제자직을 통하여 이루기를 바라시는 것이고, 그 모델로 오늘 본문의 아버지가 제시되는 것입니다.
6. 자녀됨과 제자됨의 조화된 모습
이렇게 자녀됨과 제자됨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형제됨을 이루는가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일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라고 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서 형제됨을 인정할 수 있는 하나님의 가족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모습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우리 교회의 현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형제됨을 교회 안에서 누릴 때에 우리는 자녀됨과 제자됨의 조화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현실이 되도록 하십시다. 이것이 성숙과 조화를 이루어나가고자 하는 우리 교회의 과제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