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두 제자 시리즈-마태 눅5:27-32
세계적인 대 문호 톨스토이가 어느날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는 돈을 주고 싶어 주머니에 손을 넣었으나 그날따라 돈이 한 푼도 없자 거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내가 마침 한푼도 가진 것이 없소. 정말 미안하오\\\" 그러자 거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고마움을 표현하기를 돈이 문제입니까?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훨씬 더 값진 것을 받았어요. 방금 저를 형제라고 불러 주셨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물질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를 인정해 주면서 건네는 따뜻한 사랑스러운 말 한마디입니다.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인정함을 받을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고 합니다. 즉 행복은 물질적인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행복은 그 욕망과 소유욕과 몰두하는 정도가 강할수록 상대적으로 더 결핍되고 감소될 뿐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행복의 시작은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그물에서 자유하고 자기 욕망을 깨끗이 포기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평안을 찾지 못하여 심령이 공허한 가운데서 피곤한 삶을 살고 있으며 마음 깊은 곳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내적 필요들에 의해 깊은 웅덩이가 패였고 그 허기짐과 목마름은 끊임없이 방황하는 존재로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보면 겉으로는 물질의 풍요를 누리면서 즐겁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영적 목마름을 채우지 못해 마음 속 깊은 곳에 괴로움의 웅덩이를 파 놓고 그곳에 갇혀 한 숨만 지으면서 현실을 대단히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이름을 레위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27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막 0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반면 마태복음 09장 09절에서는 이 사람의 이름을 마태라고 또 소개하고 있습니다. 0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그러니까 이 사람의 본명은 레위이나 예수님을 만남으로 열 두 제자의 반열에 참여하면서 마태(하나님의 선물)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사람을 마태라는 명칭으로 통칭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강론하고자 합니다.
1. 마태(Matthew)의 기본적인 인적사항. 주소는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사역을 행하신 가버나움 지방으로 추정되며 이곳에는 예수님의 집도 있는 곳입니다. 한편 이곳은 가장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완악한 지역 중의 하나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마 11:23~24). 학력은 직업이 세리이고 그의 이름이 레위인 것을 볼 때 상당한 교육 즉 랍비 교육에 준하는 정도를 받은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리라는 직업 자체가 상당한 식견과 언어와 계산력을 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 관계는 다른 제자들도 그러하겠지만 자세히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성경 그 자체가 구속사에 관한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일 뿐 위인의 전기처럼 인적 사항을 나열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친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 이름은 당시에 흔하게 불려지던 알패오입니다. 막 0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2. 레위(Levi)의 이름에 얽힌 사연과 당시 세리의 형편.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명은 레위이고(막 02:14)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되었는데 그 새 이름이 \\\"하나님의 선물\\\" 이라는 뜻을 지닌 마태(마 09:09)입니다. 그러면 본명인 레위를 불러보면 우리에게 어떠한 생각이 떠오릅니까? 적어도 레위 하면 우리에게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가나안에서의 땅의 분배는 못 받았지만 훗날 성전 봉사의 일을 하면서 제사장을 배출하는 레위 지파를 생각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레위 지파의 후손으로서 어쩌면 아론의 혈통을 물려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모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과거 레위 족의 영광을 회복하고 싶은 바램과 함께 이 아들이 다음에 커서 이스라엘 나라의 훌륭한 제사장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와 소원을 가지고 레위라는 이름을 지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레위의 직업이 거룩한 성직을 맡아 수행하기보다는 동족의 피를 빨므로 인해 사회적 지탄을 받는 세리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름하고는 전혀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리에 대해서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의 정치적 문화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시 대 로마 제국에 예속된 식민지 나라로서 자체적 권한을 지닌 왕권이 없이 로마에서 파송 된 총독이 군령 권을 가지고 치안 유지와 함께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대신 로마의 황제는 유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대 헤롯왕의 죽음 이후에 지역적 군주를 임명했는데 그들이 성경에 나오는 분봉 왕들입니다. 이들은 자율권이 없는 지역의 왕으로서 헤롯 안티파스, 빌립, 루사니아가 그 이름들이죠. 눅 03:01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그리고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로부터 인두세(마 22:15~22)와 토지세, 통행세 등과 같은 각종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감찰관(censor)들을 각 나라에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돈을 받고서 위탁 형식으로 조세 징수권을 유대 고위 인사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러자 조세 징수권을 획득한 이들은 이스라엘 내의 가이사랴, 가버나움, 여리고에 세 개의 세관 본 청을 세우고 각 세리장을 두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으로서 세리장에 임명된 자들은 수하에 역시 유대인 중 다수의 세리들을 고용하여 할당 된 세금들을 징수해 나갔는데 세리의 자격은 적어도 상당한 계산력과 장부 기재를 자유롭게 할 있는 능력과 그 외에도 당시 제일 많이 사용하는 아람어, 헬라어, 히브리어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라틴어까지도 구사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세관이 국경 지역에 있다 보니 외국에서 들어오는 모든 물품들에 관세를 부과하기 위해서는 외국인들과 언어소통을 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한 사람이 적어도 3~4개의 언어를 말하려면 상당한 교육 수준과 지식이 뒷받침되어야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아무나 원한다고 해서 세리에 채용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이 뽑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마태라고 하는 이 사람도 레위 지파의 배경 아래 부모의 바램을 따라 많은 교육을 받고 성장했는데 그가 받은 교육으로 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 세리가 된 것입니다.
3. 당시 세리에 대한 사회적 시선.
세리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 속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기피 당하는 직업에 속하였으며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더욱 미움을 당했는데 왜 그러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유대 고위층들은 로마로부터 세금 징수권을 획득한 후 이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다시금 조세 징수원을 고용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세리들이며 이들 세리도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①곧 세관에 근무하면서 통관세와 같은 간접세를 받는 세리와 ②집집마다 다니면서 인두세와 같은 직접세를 징수하는 세리입니다. 결국은 정치적인 면에서 보면 세리는 이스라엘 전역의 징세 권을 로마로부터 입찰받은 관리로부터 월급을 받았으므로 자연히 친 로마적 경향을 지닐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 민중으로부터는 매국노적 취급을 당하면서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리적인 면에서 보면 레위가 근무했던 세관이 있는 가버나움은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간선 도로변에 위치한 국경도시로서 로마 군대가 상주해 있을 정도로(눅 07:01~10)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북쪽으로는 수리아 지방으로, 남쪽으로는 유대와 애굽 지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한 탓에 통관세를 징수하는 세관이 당연히 설치될 수밖에 없었으며 상인들은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상인들은 레위를 비롯한 다른 세관원에 위해 세관에 세금을 납부해야 했으며 그 지역인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도 고기 값의 일정 부분을 세금으로 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문서를 보면 적어도 10~12%까지 물건에 기본적인 직접세를 과세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대단히 과중한 세금인 셈이지요. 거기에다 간접적인 다른 여러 명목으로도 세금이 또 부과되는데 그래서 각종 세금을 합치면 상당한 양의 세금이 납부되는 것이었습니다(우리나라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로 인해 성경에는 레위를 비롯한 세리들은 유대인 동족으로부터 아주 대단한 미움과 무시를 받은 흔적들이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 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막 0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눅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아니 세금을 부과하는데 있어서 세리가 왜 미움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국민은 당연히 세금을 내어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의무 아닙니까? 여기에 대한 간접적인 답변을 세례 요한의 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에 세리들이 나오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눅 03: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당시의 민중들에게 세리들이 많은 미움을 샀던 이유는 필요한 것 즉 정한 세보다 더 많이 징수를 하여 그 차액들은 윗사람에게 상납을 하기도 하고 또 자신들의 개인 재산으로 착복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생활을 하다보니 당연히 애국적 단체인 열심당원들로부터 테러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로마를 위해 일하는 세리들은 당연히 민족의 착취자요 반역자로 낙인을 찍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동족으로부터 미움과 멸시를 당하였고 심지어는 그들을 그야말로 죄인과 창기의 수준에 분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마 21:31). 즉 이들은 유대를 지배하는 로마 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와 또 이들이 동족에게 그것도 가난한 자나 부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똑같이 과다한 세금을 부과하여 그 차액을 자신들이 착복하였기 때문에 죄인과 창기의 수준에 들게 된 것입니다.
세리들 역시도 이러한 민족적인 감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발심으로 인한 감정의 골을 날카롭게 세우면서 로마의 막강한 공권력 배경 아래 자신의 의도대로 세금을 징수하여 계속 자신의 부를 축적하여 나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자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는데 당시 세리에게는 허가 낸 도둑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특히 세리가 지나가면 뒤에서 야, 저기 세리가 지나간다 하면서 욕질을 하고, 돌을 던지며, 침을 뱉는 일과, 딸 가진 사람은 아예 사위로 삼지 않는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이 세리라는 직업이 유대인들에게 큰 불쾌감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직업이었음은 말할 나이도 없습니다.
4.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의 마태의 모습.
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누가는 마태의 두 가지의 면, 즉 버려야 할 것이라면 그것을 과감하게 버리는 면과 버린 이후에는 주님을 담대하게 따라가는 면을 동시에 소개하고 있습니다(23~25). 그러니까 27절을 보면 예수님은 다만 나를 좇으라고만 하셨는데 이에 마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았다고 했으니 이는 대단한 각오의 결단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서 망설이거나 시간이 필요하다거나 가족과 상의를 해 보겠다는 말을 결코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럴 시간도 물론 없었겠지만 그 보다는 주님께서 \\\"나를 좇으라\\\" 는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태의 이러한 중대한 결단의 힘이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성경은 비록 침묵하고 있지만 당시의 문화적인 환경 여건을 보아 마태의 마음 속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신앙과 현실간의 부조화로 인한 영육간의 갈등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부모님은 이 아들이 장성하여 제사장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일찍부터 좋은 교육을 시켰는데 비해 마태는 그 쌓은 학문들로 겨우 세리의 직업을 택하였으니 자신의 신앙 양심이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겠습니까? 세리가 되기 전에는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세리들을 향하여 욕하며 손가락질까지 했었는데 이제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을 향하여 그렇게 욕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거기에다 가까운 친구들 마저 서서히 다 떠나고 말았으니 이 또한 얼마나 외로운 처지입니까?
하루의 일과를 다 마치고 난 후엔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가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윗사람의 마음을 잘 맞출 수 있을까 를 궁리하면서 상납의 봉투를 만들었을 것이고 또한 자신의 재산 증식을 위해 장부 조작도 많이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 속에서 지내다 보니 비록 세상적 물질은 다소 소유했지만 그 마음에 행복은 고사하고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면서 이 더러운 놈, 민족의 착취자, 매국노 하면서 외치는 원성들은 그의 마음을 떠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참 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무래도 아니겠지요. 정말 레위 족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통의 삶 속에서 마태는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사람을 차별치 낳고 평등하게 대우하시며 심지어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세리와 죄인 그리고 창기들까지도 친구처럼 가까이 하신다는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그분을 한 번 만나기를 꼭 소원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분이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세관 앞을 지나시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 예수님 곁에는 먼저 부름 받은 제자들 가운데 안면이 있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좇으라\\\" 주님의 그 음성에 마태는 즉시로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게 되어집니다.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첫 명령의 부름에서 이 분이 바로 메시야이심을 알고 자신의 그 모든 갈등과 운명의 해결자로 이해할 때에 따를 수 있는 힘을 얻게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세 종류의 친구가 있다고 합니다. ①첫째는 재물이라는 친구인데 이 친구는 내가 살아 있을 때에는 친하게 지내며 도와 주기도 하는데 생명 떠나면 함께 냉정하게 떠나 버리고 맙니다. ②둘째는 친척이라는 친구입니다. 이 세상에서 서로 교통하며 영원히 잘 지낼 것 같은데 내 생명 떠나면 장지까지만 동행해 주나 그 이후는 역시 떠나 버리고 맙니다. ③셋째는 믿음이라는 친구로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함께하면서 바른 길 가게하고 내 생명 떠난 이후에도 영원히 함께하면서 주님 앞에까지 동행하여 축복으로 안내 해 줍니다.
마태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재물과 직장과 친척이라는 친구를 과감히 버리고 주님만을 따르면서 살겠다는 믿음의 의지를 지금 밝히고 있습니다.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큰 잔치: 여기 잔치는 기쁨을 나타내는 행위로서 마태가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배설한 것은 ①예수님을 접대하는 의미와 ②세상적인 삶에 대한 송별이며 ③자신들의 옛 동료들에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함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성도의 삶은 기쁨의 잔치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먼저는 내 죄가 용서함 받은 기쁨과 눈물의 잔치이며 다음은 나를 용서하시고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봉사와 충성을 다짐하는 결단의 잔치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초청했을 때 주님께서 그 잔치에 응하신 것은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의 통념상 있을 수도 없는 오해받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주님께서 마태의 잔치에 참석해 주셨다면 이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직접 본으로서 보여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역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고 비방하면서 항의해 왔습니다.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여기 바리새인들이 특별히 먹고 마시는 행위에 대해 비난을 하는 것은 식탁에서의 교제가 그들의 사회에서는 서로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해주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항의와 비난에 대하여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5. 마태의 변화된 삶과 그 이후의 모습.
예수님의 부름에 응한 마태는 지금까지의 부끄러운 삶을 청산함과 동시에 자신의 동료들에게도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세리로서의 레위가 아니고 이제는 사도 마태가 됨으로서 그의 심령에 평안을 찾게 되었고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오게 된 것이지요.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이렇게 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성도 여러분은 마태의 인생을 고찰하는 가운데 그가 주님의 나라를 위한 최대의 기여(寄與)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위대한 하나의 업적을 말한다면 자신의 이름을 본 딴 마태복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열 두 제자 중 성경을 저작한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베드로 요한 마태 이 세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그 가치성을 논할 때에 유대의 역사에 관하여 다른 어느 복음서보다 상세히 정통적으로 기술하고 있음을 보아 이는 정말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마태복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에 대해서나 복음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난항이 따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나 제사장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던 레위가 한 때는 친 로마주의적 성향을 띤 세리의 생활을 하였지만 이제는 그가 받은 교육을 잘 살릴 수 있는 예수님의 사도로서 훌륭한 성경을 남긴 것이야말로 변화된 자로서 큰 일을 한 것이며 이름 값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태의 최후의 장면이 성경에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만 전해오는 문서에 의하면 주로 유대 땅에서 전도하다가 말년에 에디오피아에 가서 많은 선교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에디오피아에서 애굽을 향해 돌아오는 중에 복음을 박해하는 무리들을 만나 창에 찔려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는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마태는 자신이 그러한 길을 걷게 되리라고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만 예수님을 만난 후의 일어난 변화의 삶은 마태 자신에게는 대단히 가치 있고 보람 된 삶이었습니다.
그가 배운 학문으로 철저히 유대 역사를 분석하여 거기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신 역사를 가장 정교하고 날카로운 필치로 그리고 영광스럽게 기록하고 있음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마태가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을 이제 정리해 보아야 하는 시간입니다. ①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담대히 따라가야 한다는 교훈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확신이 없다면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직장과 물질과 세상에 속한 어느 것 하나라도 버리는 결단을 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②우리가 희생적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잃어버리는 것보다 얻는 것에 대한 소중함과 가치성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내가 잃어버리는 것과 변하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친구도 변하고 시간 사용도 변하고 기호도 변하고 또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③주님 때문에 얻은 것이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날부터 우리도 마태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결국은 잃어버리고 말 것을 아까워하며 자꾸 쳐다보면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 시선을 환경에 두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막 0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히 12:0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 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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