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되라 막1:14-20
중국 문헌 \'세설신어\' 보면 마융 선생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융은 제자들을 종아리를 초달로 치면서 엄하게 다스렸기 때문에 초달 선생이라고도 불렸던 명 사부입니다.
어느 날 제자 하나가 단식을 하더니 끝내 마융 선생이 계시는 쪽을 향해 큰절을 하는 자세로 죽고 말았습니다. 머리맡에 유서 한 통을 남겼는데 그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이 제자가 스승에게 호되게 종아리를 맞고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잠을 잤답니다.
꿈속에 스승의 종아리를 원 없이 쳐서 피가 튀었답니다. 스승은 그 그림자도 밟지 않는 것이 도리인데 꿈속일망정 스승을 때려 피를 본 것은 스승에 대한 사특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잠에서 깬 뒤에 그 사특한 마음에 가책을 가누지 못하고 죽음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유서에 적었답니다.
바로 이것이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입니다. 이런 관계 안에서 지, 덕, 체의 전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교육 현장은 어떻습니까?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매를 든다고 경찰서에 신고를 합니다. 꾸짖는 교사를 욕하고 구타합니다. 교장 선생님을 묶어 놓고 \'갈비뼈가 부러지기 전에..\' 운운하며 각목으로 협박합니다. 매를 맞으면 휴대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찰서에 바로 신고합니다.
우리 교육 현장에는 권위와 사랑을 잃어버린 교사들, 순종과 존경을 잃어버린 학생들로 넘쳐납니다. 교사는 있는데 스승이 없습니다. 학생은 있는데 제자는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육의 문제의 본질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극소수였습니다. 이들만이 예수님과 스승과 제자의 관계 안에서 가르침을 받고 믿음의 도를 전수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들만이 예수님이 누구 신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들만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오늘 수료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해 갈릴리에 오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바로 제자를 부르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잡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 형제를 처음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사실 우리 나라 대학 입시제도의 문제는 대학이 학생 선발 권을 가지지 못한데 있습니다. 대학은 수능시험 성적, 학생의 고등학교 학교 성적만으로 학생 선발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학과 학과가 서열 화되어 버렸습니다. 몇 점 이상은 어느 대학 어느 과, 몇 점 이하는 어느 대학 어느 과 정해져 버렸습니다. 그 점수에 해당되는 학생들이 대학과 학과를 선택합니다. 결국 대학은 설립 취지나 이념에 따라 자율적으로 학생을 선발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네 대학은 이런 학생을 이렇게 가르쳐 사회에 이렇게 기여하겠다는 대학 나름대로의 특성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번처럼 수능시험이 쉬워지면 변별력이 떨어져서 대학이 인제 고르기가 힘이 듭니다.
외국의 대학들은 형편이 다릅니다. 대학이 주도적으로 자기들이 가르칠 학생들을 선택합니다. 성적은 여러 가지 기준 중의 하나입니다.
미국 교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진 입시 관련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전체 고교 석차 5등 하던 교포 학생이 하버드 대학 의대에 지원했습니다. 지원자 가운데 성적으로는 수석이었습니다. 하버드대 지원자 전체 가운데서도 수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불합격되었습니다.
인종 차별이라 해서 교포 사회가 시끄럽게 술렁였습니다. 확인해 본 결과 이 학생이 불합격 처리된 이유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의대 교수들이 입학 사정할 때 이 학생의 여러 기록을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헌혈을 해 본 경험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을 내리기를 헌혈을 한번도 해 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의사가 돼서 남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겠는가?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미국의 힘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우리 대학도 어서 대학이 학생을 자기들 나름대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학생들이 다만 점수로 대학을 선택하는 일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한 가지 기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실함입니다. 본문에 보면 시몬과 안드레는 배에서 고기 잡기 위해 그물을 던질 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또 야고보와 요한은 배에서 그물을 손질 할 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성실하게 자기의 맡겨진 일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왜 주님께서 성실한 사람을 제자로 부르실까요? 주님의 가르침은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고 삶으로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머리 좋은 사람을 부르시지 않고 성실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위대한 일을 이룰 능력 있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고 평범한 일을 성실하게 할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듯이 주님은 토끼보다는 거북이를 부르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서 거북이가 되어야 합니다. 성실함이 내 몸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17-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두 가지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는 \'곧\'이라는 부사입니다.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순종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군에서 제식훈련 할 때 지휘관이 큰 소리로 명령합니다. 앞으로 갓!, 뒤로 돌아!, 차려!, 경례! 명령이 떨어지면 병사들은 즉각적으로 그 말에 순종합니다. 그 명령을 깊이 생각하고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순종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끔 잘못 알아듣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고문관들은 있습니다만 모두가 착 착 순종합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명령하시니까 고민하지도 않았습니다. 깊이 생각도 않았습니다. 바로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즉각적 순종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제자들이 들은 예수님의 명령은 그렇게 쉽게 순종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가, 뒤로 돌아, 차려, 경례와 같은 명령이 아닙니다. 자기 인생이 달린 문제이고, 자기 진로가 결정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은 너희가 고기 잡는 어부이지만 이후로는 너희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직업이 바뀌고 인생이 바뀌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과감히 결단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들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우리에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지체하는 것입니다. 지체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점점 순종하기가 더 힘이 듭니다.
어떤 분이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설교를 듣다가 마음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선교 헌금으로 100만원을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진 돈이 없습니다. 다음 주에 마련해서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왔습니다. 잠을 자려하는데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100만원이 자꾸 걸립니다. 100만원이면 뭐도 하고, 뭐도 하고, 뭐도 할 수 있는데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내가 100만원 한다고 누가 알아주나, 하나님은 헌금 액수를 보시지 않는 분이 아닌가?
정성이 중요하지 꼭 100만원 해야하나? 잠자리에서 50만원으로 깎았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이 됐습니다. 또 잠을 자려는데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50만원이 자꾸 걸립니다. 또 같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깎고, 깎고 결국 다음 주에 10만원만 헌금했습니다. 어떤 분은 지금 적게 선교헌금을 하면 그것을 보고 째째하게 그렇게 작게 하느냐고 말합니다. 나 같으면 왕창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상 돈을 벌고 나면 할 수가 없습니다. 매달의 순종이 귀한 매 주의 순종이 귀합니다.
말씀 순종에 시간은 적입니다. 즉각적 순종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즉각적으로 순종했던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는 \'버려 두고\'라는 동사입니다. 이 말은 제자들이 주님의 뒤를 따를 때 포기했던 것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따를 때 버렸던 것이 본문에 세 가지입니다.
18절을 보면 그물을 버렸습니다. 생계 수단을 버린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아비를 버렸습니다. 가족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또 20절을 보면 배를 버렸습니다. 재산을 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가장 소중하게 간직했던 것들입니다. 자기의 생명처럼 소유했던 것들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 이런 것들을 포기했고 버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어디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사느냐를 의미합니다. 물론 그물도 소중하고, 가족도 소중하고, 재산도 소중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면 이런 것들의 가치를 모두 부정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더 우선적인 가치를 주님의 말씀에 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실 때 정말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빼앗아 가시지는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보다도 하나님의 명령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바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버려야 합니다. 자기의 꿈보다도, 자기의 인간 관계보다도, 자기의 소유보다도 주님의 명령에 더 큰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만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 따르는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순종했는데 이를 18절에는 \'좇으니라\', 20절에는 \'따라가니라\'라고 표현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해서 제자들이 주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외형적으로는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간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면 갈릴리로 가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예루살렘으로 가고...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일본 동경에 가면 신주꾸 거리에 유명한 우동집이 있습니다. 이 집은 다섯 평 남짓한 작고 허름한 음식점입니다. 음식도 우동 한 가지만 팝니다. 그런데 이 집이 이렇게 유명한 이유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점입니다. 실내 장식도 100년 전 그대로, 그리고 맛도 100년 전 그대로...
맛을 100년 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증조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를 이어 4대째 이 조그마한 가게를 이어오는 그 대물림에 있었습니다. 지금 사장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입니다. 박사학위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가문의 전통을 잇기 위해 이 우동 가게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주님의 정신을 잇는 것입니다. 주님의 삶을 잇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작은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께 은혜는 받으려 합니다. 주님께 축복을 받으려 합니다. 주님 때문에 구원은 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처럼 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정신을 오늘에 이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제자는 100년 전의 우동 맛을 그대로 되살려 전해주는 것처럼 오늘 이 시대에 사람들에게 예수의 맛을 전해주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삶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17절에 \'되게 하리라!\'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라 나섰다고 바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훈련과 연단을 거쳐가면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하루아침에 어른이 되지 않는 것처럼 제자는 하루아침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제자는 마치 메주가 뜨듯이 오래 숙성되어 만들어집니다.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두 가지를 경계해야 합니다. 은혜 받았다고 즉시 예수처럼 살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교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포기를 경계해야 합니다.
주님께 내 모든 삶을 위탁해 놓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전적 헌신이라는 것은 주님만 생각하고 주님만 위해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축구선수에게 기자가 물어보았습니다. 하루에 연습하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그랬더니 그 축구선수가 대답하기를, 공을 차고 있는 시간은 연습하는 시간이고, 공을 안 차면 축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축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시간은 축구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하루종일, 24시간 축구에 대해서 생각하고 축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공을 차고 그 사람은 완전히 축구에 헌신한 사람입니다. 축구에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입니다. 축구를 위해서 자기 시간을 다 거기다가 투자를 하고, 자기 모든 즐거워하는 것들을 끊어버리고 축구만 위해서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이것이 전적 헌신입니다.
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내버리고 전적으로 예수님께 헌신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날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다고 할때에, 지금 여기 예수님 제자들이 한 것 같이 직업과 소유와 인간관계, 이런 것들을 다 내버리고 끊어버리고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자 이런 얘기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적 헌신한다고 했을 때에, 내가 있는 직업, 내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 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 가지고 주님 앞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삶을 살아갈 때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지식과 기술을 늘리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돈을 많이 벌면, 그 것을 가지고 나를 위해서만 씁니다. 큰 차도 사고 큰집도 사고 그러면서 나를 위해서만 그것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은 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에 역시 열심히 공부하고 기술과 지식을 늘리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돈 많이 벌어서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절제하고 절약하고 그리고는 주님을 위해서 그 모든 것들을 헌신합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 월급 얼마 받을까 생각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잘 가르쳐서 이 아이들로 하여금 주를 위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까, 한다면 그 선생님은 교사로서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사선생님이 환자들을 치료할 때에, 얼마 짜리 인가하고 돈을 계산하고 있으면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고요, 이 환자를 잘 고쳐서 이 환자로 하여금 주를 위한 삶을 살도록 해야겠다고 한다면 의사로서 주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무원이든지, 근로자든지, 회사든지, 기업이든지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삶을 살아가는 현장 속에서, 자기 직장 속에서 자기 지식과 자기기술과 자기경험을 다 통째로 동원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전적인 헌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여러분 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에 서 주인 되신 우리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온전히 헌신된 가운데서 주님을 따라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은 제자를 찾으십니다. 제자를 필요로 하십니다. 수료하는 모든 분들과 저와 여기에 있는 모든 분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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