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제자 야고보

열 두 제자. 야고보/마20:20-28

열 두 제자. 야고보
마20:20-28





예수님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번잡함을 피하기 위하여 열 두 제자 중에서도 특별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제자를 동반하신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흔히 선두 그룹에 속하는 삼인 방 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예수님을 삼 년 동안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모시고 섬겼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야말로 예수님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려서 처신했던 제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 삼인 방 가운데 한 사람인 베드로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오늘은 그 중의 또 한 사람인 야고보에 대해서 꿈과 야망의 제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1 야고보(James)의 기본적인 인적사항



마 04: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이름은 마 04:21절을 통해 볼 때 야고보이며 뜻은 발뒤축을 잡았다는 의미로서 구약 시대의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 중 야곱을 연상케 하는 이름입니다.
주소는 갈릴리 서북쪽 가버나움 근방의 고기 잡는 집이란 뜻을 지닌 벳새다로서 이곳은 예수님께서 자주 다니시며 이적을 많이 행하신 곳입니다.
그러나 민심이 완악하여 믿지 아니함으로 주님께서 화 있으리라고 책망하신 곳이기도 하며 5병 2어로 5천 명을 먹이신 광야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학력은 역시 랍비 교육을 받은 흔적은 보이지 않고 유대인의 기본적 교육인 회당 교육 정도를 받은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가족 관계에 있어서는 그 부친(父親)의 이름은 세베대(Zebedee. 여호와께서 주심)로서 제사장과 잘 지낼 정도로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유지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근거로는 작은 아들 요한이 대제사장의 집과 친숙하게 지내고 있기 때문인데(요 18:15) 즉 북부의 시골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는 권세자 제사장의 집안과 알고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일반 서민의 수준을 조금 넘어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모친의 이름은 살로메(Salome)로서 한 때는 치맛바람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주님을 위한 일에 믿음의 봉사를 많이 하였습니다(마 27:56. 막 15:40, 16:01).
그리고 그의 동생은 서열 3위의 요한으로서 우리에게는 사랑의 사도로 잘 알려져 있지요.

요한이 왜 동생이냐 하면 야고보의 이름을 기록할 때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라는 표현을 계속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동양 문화권에서는 동생보다 형의 이름을 먼저 기록하지를 않으며 또한 열 두 제자들의 명단에서도 요한보다 야고보를 먼저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경제면에서는 집안 대대로 어부의 일을 한 것 같으며 큰 배도 소유하면서 삯군을 고용하고 있었음을 보아 어느 정도 부유한 집안이 아니었겠는가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막 01: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가니라

2 야고보의 인물 됨됨이와 그의 성격


복음서를 통해 야고보라는 인물에 대해 조명을 해 보면 한결 같이 그의 동생 요한과 같이 행적(行蹟)을 다루고 있음을 계속적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왜 같이 다루고 있습니까? 형제이기 때문에 같이 다루는 것이겠습니까? 아무래도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도 역시 형제이었지만 늘 같이 다루고 있지를 않고 있거든요. 오히려 베드로와 안드레는 거의가 제각기 활동을 한 것에 비해 야고보와 요한이 늘 함께 나타나고 있음은 그들 두 사람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들을 보면 어떤 형제들은 형제이면서도 같이 있는 것을 싫어하여 따로 활동하는 것을 오히려 편리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다른 형제들은 둘의 성격이 잘 맞아서 짝이 되어 잘 어울리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형제들도 있는데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야고보와 요한은 아주 잘 어울리는 성격을 지닌 자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성경의 몇몇 구절들을 접할 수 있는데 막 03:17절에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 이 두 형제에게 꼭 같은 별명을 붙여 주었음을 보게 됩니다.

막 03: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그 별명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아시지요? 우뢰의 아들 곧 천둥과 벼락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별명을 형제에게 같이 붙여 주심을 볼 때 함께 잘 어울리면서 비슷한 기질을 가지고 유사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란 말을 달리 하면 특이한 종류의 열정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를 좀 안 좋게 표현하자면 불같은 성질을 가진 급한 성격의 소유자란 말입니다. 즉 거친 감정을 지닌 약간 시끄러운 사람이란 말인데 그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눅 0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이 말씀을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을 하자면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걸어가는 예루살렘 행은 대단히 비장하고도 고독한 행진이었습니다.
그래서 일행이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거처를 알아보기 위하여 사자를 먼저 사마리아인의 촌에 들여보냈는데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즉각 예수님의 일행을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수백 년 전부터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 때문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이미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때 야고보와 요한이 나서서 주님을 감히 괄시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불벼락을 내려서 버릇없는 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다 태워 죽입시다고 제안을 합니다. 이러한 단적인 예만 보더라도 야고보는 불같은 성격을 지닌 사람임을 알 수 있지요.


3 세상적인 꿈과 야망의 사람 야고보



마 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께 두 아들을 직접 앞세워 최고의 좋은 두 자리를 청탁하는 것은 마 20:17~19절에서 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곧 정치적으로 유대의 독립을 쟁취하여 새로운 메시야 왕국을 이룩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한 말입니다.

마 20: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 그 다음 22절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2절에 좀 더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의미는 너희는 장차 내 앞길에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구나.
너희는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육안으로 보이는 어떤 굉장한 나라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음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 나라를 통치할 때에는 너희는 장차 1인자와 2인자로서 권세를 꿈꾸면서 예약하고 있으나 너희가 바라는 것과 내가 주려고 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 살로메와 야고보와 요한이 무어라고 대답을 합니까?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할 수 있나이다 라고 강한 어조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나중 일이야 어찌되든지 일단 예수님의 신임부터 얻고 보겠다는 생각을 앞세우는데 그러면 주님께서 마시려는 잔은 어떠한 잔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곧 대속을 위한 죽음의 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이러한 십자가의 죽음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채 그저 메시야 왕국의 선포 과정에서 어떤 일시적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고 그러한 고난 정도는 능히 동참 할 수 있다는 각오를 지금 나타내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까지 동원한 소위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있는데 왜 이러한 치맛바람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이는 아마 특정한 일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3인의 제자만 동반한때가 많았기 때문에 일어난 오해가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꿈과 야망이 강렬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친분이 깊은 그의 어머니를 은근히 앞세워 보았던 것이지요.

살로메 역시 자기 아들들의 출세를 위해서는 직접 뛰어 들었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자녀들의 출세나 외형적 입지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성스러운 어머니의 모습을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무시해 버린 채 내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라면 윗사람을 찾아가서 교제하는 일에 온 열정을 드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들 중에 여러분은 혹 들어 있지 아니합니까?

생활은 구차하여 적자 생활을 하면서도 그렇게 하여서 환심을 사기를 바란다면 재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담 없이 만날 일이 있으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찾아가서 상담하면 오히려 윗사람으로부터 혹은 선생님으로부터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미래를 향한 계획과 꿈 그리고 야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여야 하며 중단 없는 전진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자신의 영달이나 세상적 욕망에 멈추고 만다면 야고보와 요한이 구하였던 것하고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절에 의하면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그의 어머니를 앞세워 예수님께 청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열 제자가 상당히 분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불신자들은 더 높은 권력 더 높은 힘을 가지고 남들을 지배하기를 꿈꾸지만 너희들은 그들의 삶과는 달라야만 할 것을 26~2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 살로메와 더불어 예수님께 특별 자리를 청탁한 사건을 통하여 느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의식 구조 속에는 영원히 사라 질 수 없는 세상 권력과 욕심을 채우려는 끈질긴 인간적인 야망이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모든 욕망들을 주님께서는 제거하기를 원하시고 그리고 그 마음을 비울 때에 비로소 주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4 야고보의 생애와 그의 죽음



야고보는 어떤 특별한 재질을 가진 것이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계신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그 자리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면서 부활의 위대한 교훈을 베푸실 때(막 05:35~37),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형용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모할 때(마 17:01,02),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마 26:36~46) 그 자리에 한결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눈에는 잘 나타나지 않았지만 주님의 관점에서 야고보의 지도자적 기질을 보셔서 훈련을 시키셨으며 또 실제로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영광스러운 지도자로서 부상하게 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그는 주님을 향해서 야망을 가졌기 때문에 주님을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져서 마침내 지도자가 되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짓밟는 야망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올바른 진리에 대한 야망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더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선한 야망을 가져 보십시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며 주님의 교회를 가장 신실하게 받들며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가장 귀한 일을 하고 싶어하는 선한 의미의 야망을 갖는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초대교회 시절의 어느 문서에 보면 야고보는 순교 전 지중해 영역 주변과 스페인까지 가서 전도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야고보에게 조가비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해안 지방을 찾아다니면서 어부들에게 많은 전도를 한 것으로 역사의 문서 가운데서 자주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로 많은 지역을 뛰어 다니며 부지런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그의 모든 힘을 다했으며 열 두 제자들 중에 제일 먼저 순교를 당했습니다.
때는 주후 44년경이었는데 사도행전 12장 01,02절에 의하면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0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라고 기록합니다.

헤롯 왕은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기독교의 전파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한 야고보를 희생의 제물로 삼은 것이지요.
즉 교회 중 몇 사람을 해쳐야만 기독교가 더 이상 세력을 펼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잔인한 사형을 집행 하였으나 이 또한 야고보는 하나님 앞에 귀한 순교의 죽음을 맞았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야고보가 당한 순교의 은혜는 그가 가졌던 본래의 세상적 욕망들을 버리고 하늘나라의 소망만을 바라볼 때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고보가 육신적 야망을 하늘나라의 야망으로 바꾼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 가치관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야고보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았듯이 우리도 끝까지 주님만 바라볼 때 새로운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는 신앙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