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제자의 길

참된 제자의 길/마16:24-28

참된 제자의 길
마16:24-28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콩 심은데서 팥이 나기를 기대하거나, 팥을 심어놓고 콩을 기대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대한 주님의 말씀도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매우 역설적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깊은 생각없이 이 말씀을 대하게 되면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를 얻게 된다\"는 것처럼 들려 지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의약분업과 관련해서 의료계의 폐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언제 이 폐업이 끝날지 우리들은 알 수 없습니다. \'누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기에 앞서 어쨌든 이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있고 그로 인해 의식 있는 사람들은 신문이나 여러 언론매체에 불편함에 대해서, 그리고 폐업의 부당함에 대해 글을 싣고 있습니다. 그 글에는 한결같이 \"의료계가 그렇게 폐업을 강행하면 그들이 원했던 바를 관철시킬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또 다른 하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폐업이 장기화되면 결국 그들은 실리라는 측면에서 한가지를 얻어 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사라는 명예로움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또 그들의 말대로 의사로서의 명예가 과거에 이미 추락했다고 한다면 더 이상 회복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저는 여기서 이런 문제와 관련해 어느 한쪽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단지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생각해볼 때, 사람들의 주장과 같이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게 된다는 단순한 문제로 이 본문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참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뜻은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상의 신비함이 이 말씀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우리는 여기서 왜 주님이 이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내용에 의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만류를 했습니다. 주님은 그 말씀을 들으시고 즉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하시면서 매우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사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상당한 기간동안 주님과 함께 생활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고자 작정했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베드로의 경우, 평생 직장이었던 갈릴리 바다를 버렸습니다. 그가 그토록 아꼈던 재산 1호, 배와 그물도 버렸습니다. 가족마저 뒤로하고 예수를 쫓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비록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은 했지만 주님의 사역을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곧 바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만류를 했던 것입니다.

부부가 수 십년을 함께 살아도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사는 모습이 너무 멋있게 보여서, 다른 것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것 하나 때문에 남편과 결혼한 아내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그런 남편의 모습이 멋있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위선처럼 느껴집니다. 자기는 가족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남편에게 시집왔는데 남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의 일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가족은 돌보지 않고 남의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나가는 남편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발 이제 그 일을 그만 두고 가족을 좀 돌보라고 요구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놀라운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적어도 주님은 얼마든지 영광의 면류관을 쓰시고 천사들을 호령하면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류를 했습니다.

함께 살아도 부부가 서로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식까지 낳고 살지만 잘 모를 때가 참 많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과 함께 생활했는데 주님의 사역에 대해서 아직도 잘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가 주님께 호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물론 그 꾸짖음은 베드로 개인을 향한 꾸짖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있는 사단에 대한 책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누구보다 그렇게 말했던 베드로와 제자들의 마음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비록 꾸짖기는 하셨지만 이어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에 합당한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친절하게 일러주십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주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베드로와 제자들은 지금까지 주를 좇으면서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베드로의 경우, 그는 갈릴리 바다를 버렸습니다. 갈릴리 바다가 베드로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곳입니까? 갈릴리는 평생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터전이며 직장이었습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갈릴리 바다에 자신의 뼈를 묻을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면서 그 갈릴리 바다를 버렸습니다.

재산목록 1호인 배와 그물도 버렸습니다. 심지어 가족들을 떠나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버릴 것도, 잃을 것도 없습니다. 베드로 뿐 아니라 제자들이 다 그랬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버릴 것, 혹은 포기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예를 들어서 어떤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니까 자신의 직장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여러모로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비록 월급은 적어도 신앙생활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그 직장은 자신이 오랫동안 몸을 담아온 곳입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근속상도 받고, 또 모범사원으로 뽑혀서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사표를 쓰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뿐 아니라 월급도 지난번 직장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곳으로 옮겨버렸습니다. 이런 경우 그 하나만의 결단으로도 오늘 우리들에게는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부자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재산 많은 것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언제나 문제가 됩니다. 그 많은 재산을 관리하는데 드는 시간낭비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일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봉사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예 그 많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줘 버렸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교회를 위해 봉사합니다. 이 정도되면 모든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중에 이 정도로 포기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뭐라고 말입니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해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그리고 나를 좇으라\"

주님 보시기에 아직 그들이 버리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니 주님이 원하셨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금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가 \'자기를 부인해라,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부분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도 포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보다 너 자신을 부인하라고 했습니다. 너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자신을 부인한다는 말에 대한 가장 적절한 주석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결국 내 안에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을 말하며, 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과거의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과거의 \'나\'는 누구입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던 자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벗어버리고 새사람으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한 자들은 옛 사람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지 않고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왜 이 말씀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하십니까? 그들이 고난을 생각하지 못하고 영광만 생각한 것은 아직도 옛사람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꼬박 꼬박 십일조를 떼어서 헌금하고, 이런 것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아니 참된 제자의 길은 옛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내 안에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사는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또 얼마간은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얼마가지 못해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데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내 안에 여전히 내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포기되지 않습니다.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나를 주께 맡기고 그 분이 나를 다스리시도록, 나의 영원한 주인이 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쑥 불쑥 내 안에 튀어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나를 주장하려는 습관, 내가 나를 다스리려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주를 따르고자 한다면,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이것부터 부인되고, 이것부터 버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참된 제자의 길은 보장된 영광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고난도 능히 달게 받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주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백 위에 내가 경험하고, 받아야 할 고난에 대한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중국에서 한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련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 그들이 불렀던 주제 찬송이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힘차게 불렀습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355장) 정말 그들의 눈과 마음에는 어디든지 가겠다는 열정과 각오가 있었습니다. 저는 첫날 그들 앞에 서서 제일 먼저\"10년, 아니 20년이 지난 후에도 여러분이 이 찬송을 담대하게 부를 수 있기를 소원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어쩌면 우리들은 이 찬송을 자신 있게 부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떳떳하게, 그리고 자신 있게 불렀는데, 왠지 요즘은 이 곡을 부른다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우리가 참 뻔뻔하다\'는 생각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렸다는 말일수도 있고, 처음 예수를 믿을 때만큼 고난과 희생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보고 경험했던 일들은 정말 놀라운 일들이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서 그들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고…, 얼마나 영광스럽고, 기쁜 일입니까? 제자로서 스승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에 뿌듯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들에게 고난과 시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후면 붙잡혀 가게 될 것이고,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 다녔다 하여 유대인들에게 뭇매를 맞거나,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히게 될지도 모릅니다. 놀랍고 신비스러운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견디기 힘든 고난의 순간도 다가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를 위해 기꺼이 고난도 받으실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이 누굽니까? 참된 제자의 길을 가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보통 십자가가 아닙니다. 어떤 십자가입니까? 25절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자기 목숨도 기꺼이 내 놓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한 의미를 예수님 당시와 현재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자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그 이후에 많은 제자들은 실제로 주를 위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아직도 선교지에서 목숨을 잃는 분들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이런 일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또 다른 의미는 우리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생명을 위해서 살면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육체적이며, 세상적인 생명을 위해서 살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십자가가 됩니까?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름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세상사람들의 가치관과 세상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동일한 목표 속에서 사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말은 아니라고 할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세상에서 부유하게 살고 싶고, 편하게 살고 싶고,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부유한 것 자체를 두고서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살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치관이 달라야 합니다. 인생의 목표도 달라야 합니다. 열심히 벌어서 뭘 해야 합니까? 남 줘야 합니다. 열심히 벌어서 내 아파트 평수 넓히는데 급급하거나, 열심히 벌어서 내 가족에게만 유익 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은 세상사람들의 가치관일 뿐입니다. 만약 우리도 그런 삶에 길들여지게 된다면 결국 영원한 생명은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열심히 벌어서 무조건 남 준다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주를 위해서 행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도 보면 \'주를 위해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의 사역을 도왔던 사람 중에 에바브로 디도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울은 그를 가리켜서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는 병들어 죽게 되었지만 바울을 돕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 생각하여 그 사역을 충실히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래서 그를 살리셨다고 합니다. 바울 만큼이나 에바브로 디도는 무엇이 영원한 것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깝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열심히 자기 만족을 위해 살 것입니다. 그들과 같지 않은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운동경기에서 상을 받는 사람은 열심히 훈련하고 철저히 자신을 절제하는 생활을 하는 선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그가 얻게 되는 것은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선수가 훈련을 게을리하고 자신의 배를 즐겁게 하는 일만 계속하면 어떻게 됩니까? 잠깐동안은 즐거울 수 있습니다. 포식하면서 먹는 즐거움에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패배입니다. 시합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과거에 자기 것이었다 해도 그는 결국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까? 땅의 일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주를 위해서입니까? 썩을 것을 위한 투자는 결국 썩을 것 외에 거두어들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26-2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어느날 생각지도 않은 병이 찾아와서 그것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자신만을 위해, 나의 유익만을 위해 열심히 살다보면 영원한 나라에서의 생명은 결국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100년을 위한 투자를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영원을 위해 투자하시겠습니까? 주님은 반드시 내가 행한대로 갚으십니다. 영원을 위해 투자를 했으면 그 이익금으로 영원을 남겨 주실 것입니다. 세상을 위해 투자를 했으면 그 이익금으로 세상을 남겨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멸망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땅을 위해 열심히 심어놓고 천국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살아놓고서 영생을 바라는 것은 모순입니다. 세상을 위해 열심히 달려가고서 하늘의 상을 기대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가 심은대로, 우리가 행한대로 갚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날이 어떤 날입니까? 영원을 위해 산 사람들에게는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복된 날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위해 살고, 자기의 만족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심판날입니다. 세상에서는 즐겁게 지냈는지 몰라도 더 이상 즐거움이 그에게 있지 않습니다. 고난과 고통만이 있을 뿐입니다. 주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내 놓았던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고통이 없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일 것 같습니까? 28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속히 올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대로 받게될 그 날이 속히 올 것입니다.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늦추어서도 안됩니다. 참된 제자의 길,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를 위해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능히 목숨도 버리고자 하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우리의 행위에 따라 주께서 판단하시고 갚으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참된 제자의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