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에서 제자로


무리에서 제자로
마9:35-38



세계 복음화를 위한 좋은 자료집이 있습니다. 바로 이 책인데요, 죠이선교회에서 나온 『세계기도정보』입니다. 2001년도에 나왔었는데, 이번에 2004년도 판이 새로 나왔습니다. 세계 237개국의 정치, 경제, 지리, 종족, 언어, 종교, 교회현황, 선교현황등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선교를 위한 기도ㅊ만?알 수 있고요, 선교의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매우 좋은 책입니다.
이 책 『세계기도정보』에 의하면, 한국 개신교 기독교인의 수가 16,954,000명이라고 통계되었습니다. 카톨릭 교인수가 400만 정도 된다고 합니다. 신구교를 합치면 2,100만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밝히는 것은 이중 집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829만명은 이 숫자에서 빼야 된다고 합니다. 이중 등록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이사를 했으면 빼야 되는데, 그냥 놔두고 계산을 하니까 숫자가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름하여‘거품’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백화점 세일에서‘거품 가격’‘거품을 완전히 빼냈습니다’는 말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수십명에서 수천명까지 몰렸습니다. 요즈음 쓰는 얘들 말로 인기짱입니다. 예수님은 스타 연예인 버금가는 인기가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은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요즈음 외모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사람을 둘로 나눈다면서요, 뚱뚱한 사람과 날씬한 사람) 예수님 곁에 몰려든 사람들의 종류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무리고, 다른 하나는 제자입니다. 다시말하면 누가 누군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요, 그 가운데 사랑받는 12제자를 비롯한 소수의 사람들로 나눌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다고 따라 다녔지만, 진정한 제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실수가 아닌 허수, 알곡이 아닌 쭉정이가 많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인이 1,200만이라면, 그 중에 진짜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명목상의 크리스챤, 거품 교인이 아니냐 말이지요. 어느 교회에 등록한 교인은 되었지만, 성도같은 성도, 예수 닮은, 예수님을 간절히 닮기 원하는 제자같은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 자리에 거품 교인이 있다면 섭섭하시겠습니까? ‘누가 뭐라도 나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처음으로 갈릴리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름하여 마태복음 5장의『산상설교』앞과 뒤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마4:25)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마8:1) 여기에 ‘허다한 무리’군중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다수 속에 묻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정체, 자기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는 익명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무리를 민망히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비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목자 없는 양\' 즉 \'지도자가 없는 양\'이라고 했습니다. 무리는 누가 자기를 간섭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어디에 소속되는 것을 싫어하고, 조용히 지내기를 좋아합니다. 무리는 누가 자기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양은 위험 앞에서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능력이 없습니다. 목자가 없는 양은 죽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리는 목적의 의식이 의미하고, 삶의 중심이 없습니다. 부평초(浮萍草)처럼 물결따라, 바람따라 방향없이 목적없이 떠돌아 다닙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교인들이 대형교회로 몰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큰 교회가 좋은 이유가 이렇답니다. 부담이 안 간다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에 가면 이거해라 저거 해라 너무 힘든다는 것입니다. 한번만이라도 주일날 빠졌다간 집중공격을 당하지요, 개척교회가면 죽어라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일해야 합니다. 그거 좋아서 가고 싶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큰 교회는 적당히 넘어가주어서 편하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교회는 땅 사자, 건축하자는 얘기가 없어 좋고, 십일조나 감사헌금도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 잘 모릅니다. 사람이 많다 보니까 자기에 대해 감추고 싶은 것이 잘 드러나지 않으니까 부담이 안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대형교회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큰 교회가면 봉사할 일도 많고, 수고하고 섬길 일도 많아서, 더 많이 봉사하고, 더 많이 충성하려고 큰 교회로 간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허다한 무리’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오,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그렇습니다. \'무리\'란 예수님을 따라 다니지만, 육신적 관심만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식입니다. 무리는 자기의 이익과 관련된 일, 놀라운 기적을 구경하는 흥미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재판에서“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고 소리친 사람들이 무리입니다.

출애굽의 대장정에 있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모세에게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민11:4-5) 정체 불명의 섞여 사는 무리가 불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도, 허다한 무리에 속해 있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무리’는 소수가 아닌 다수입니다. 우리가 다수의 편에 있을 때 혹 분별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표를 많이 얻으면 선거에서 당선되거나, 다수의 표를 얻은 의견에 따라 중요한 일들이 결정되어집니다. 그러나, 다수의 표를 얻었다해서 그 다수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보다 덜 위험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잘못된 의견이 다수에 의해 지지를 받는 대신, 올바른 의견이 소수의 의견으로서 배척받게 될 경우, 다수의 횡포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정탐꾼 12면 중에 악평을 하여 불평을 야기시켰던 10명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이길 수 있다, 정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 여호수아 갈렙은 소수요, 이들이 모세의 제자입니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는 사회현상 속에서 발견한 ‘20대 80의 원리’를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특정한 20%의 고객이 전체 매상의 80%를 구매하며, 교통사고의 80%가 20%의 운전자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것이고요, 20퍼센트의 책 분량이 80퍼센트의 내용을 전달한다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20퍼센트의 성도들이 80퍼센트의 헌금을 낸다는 원리입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무덤덤한 다수보다는 창조적 소수에 의해 사회가 진보한다는 것입니다.
무리는 소리, 주장은 크지만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제자, 소수는 다수에게 영향을 줍니다. 하나님께는 믿음으로 깨어 있는 소수는 이미 소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소수가 곧 다수라는 사실입니다.
골리앗과 블레셋은 무리요, 다수였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는 믿음의 사람 다윗은 소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리로 살아가는 한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1,200만 자랑할게 아닙니다. 숫자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렇쿵 저렇쿵 세상에 어려워도 소망이 있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제자의 길을 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을 하여 가나안을 향하는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혼자서 많은 일을 감당하기에 힘이 겨웠습니다. 곁에서 안타깝게 바라보던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조언을 합니다. “이에 모세가 자기 장인의 말을 듣고 그 모든 말대로 하여 이스라엘 무리 중에서 재덕이 겸전한 자를 빼서 그들로 백성의 두목 곧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으매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되 어려운 일은 모세에게 베풀고 쉬운 일은 자단하더라” (출18:24-26)
사람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제자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소수의 원리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무리 중에 12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훈련하시고, 파송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제자가 되어야 하고, 어떤 사람이 제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보통 우리는 자녀들에게 열심히 공부할 것을 강조하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공부해서 남주냐 더 너를 위해 하는 거야’다 자기 잘되기 위한 공부라는 얘깁니다. 실컷 고생하고 남 좋은 일이 되버리면 하는 말이,‘죽쒀서 개줬다’고 합니다. 지난번 포항 한동대에 갔다가 김영길 총장님의 얘기를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동대에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는 것입니다.‘우리는 공부해서 남 주자!’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에, 이 세상 가운데 섬기는 사람, 영향을 끼치는 존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하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왜 은혜 받아야 합니까? 예수 믿고 복받는다는 말은 무엇인가요? 옆도 안 돌아보고 나만 잘 믿고, 나만 잘되면 된다는 심보를 가지면 무리입니다. 제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는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자는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고 이웃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관심에 초점을 맞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추수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것입니다’일거리는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하십니다. 무리는 일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일을 감당하는 일꾼입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우리는 제자입니까, 아니면 무리입니까? 예수님은 기적을 보고 따르는 수백명, 수천명의 무리에게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 가신 길을 끝까지 가겠노라고 결심하는 제자들, 소수에게 집중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그렇습니다. 몇 명이 모이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소속된 교회에 내가 집중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의 시급한 문제가 나의 기도제목이 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순종하는 자가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신 것입니다. ‘목자없는 양처럼, 고생하면서 방황하는 무리’혹시 오늘 우리 주님이 나를 그렇게 바라보시는 것은 아닌지요?

지난 목요일 중앙공무원교육원 예배를 인도했는데 처음으로 원장님이 같이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과천에도 오래 살았었고, 지금은 안양 관양동에 사시고 당신이 나가는 교회 교인수가 3천명이 된다고 하십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니까 그 원장님 제게 하는 말씀이 ‘목사님, 저는 제자가 아니고 무리인가 봅니다’우리교회 몇 명이 모이냐, 교인이 많냐 적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 죽도록 충성하는 예수님 닮은 제자가 되었느냐가 문제입니다.

박노해 시인의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책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이 세상의 희망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제자\'에게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안 됩니다. 제자로 헌신된 사람들이 이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무리는 무기력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예수님에게 최고의 가치를 둔 제자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예수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제자들이 나와야 합니다. 교회의 부흥은 무리의 수가 아니라, 제자의 숫자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위해, 복음을 위해, 선교를 위해 자기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성도가 얼마나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누구인가요? 포기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헌신된 사람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33)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될 때에 는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4:18~19)

여기있는 목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제자가 나와야 합니다. ‘아무개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이번에 교회에 이런 일이 있는데 집을 팔아서 바치셔야 되겠습니다. 땅을 내놓으셔야 되겠습니다’목사이 소원입니다. 아무것도 꺼리지 않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험들까봐, 삐질까봐 말 못하고, 가르치지 못하면 주님 닮은 제자가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은파 가족 여러분! 우리 교회가 우르르 사람만 모이는 교회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에 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그 개혁의 첫 번째 단계는 섞여있는 무리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다수의 자리에서 소수의 자리로 가야합니다. 주일 예배만 드리는 자리에서 저녁예배, 속회예배도 가야합니다. 선교회 모임에도 가시고 새벽기도의 자리로 나가야 됩니다. 운동장에는 경기를 하는 선수가 있고, 구경하면서 응원하는 관중이 있습니다. 응원도 필요하지만, 재미있지만,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의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무리 중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섞여있고 묻혀 있어서는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무리는 일꾼이 아닙니다. 추수하는 일에 뽑혀서 일꾼으로 쓰임받는 자가 제자입니다. 무리 가운데서 나와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