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란?

제자란?
마8:18-22



Ⅰ. 들어가는 말

사람들은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는 이른 바 {내숭}을 일컬어서 \"백조\"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물위에 떠 있는 백조는 희고 아름다우며 고고합니다. 그러나 수면아래에서는 그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쉴 사이 없이 발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드러내는 모습과 내면 세계가 다른 사람을 일컬어서 백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밖으로 드러난 백조의 고고한 모습만을 보고 수면 아래에서 그 고고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쓰는 발의 노력을 동시에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수면 위와 수면 아래의 백조의 모습은 그 전체가 백조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수면 위의 백조의 모습에만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까 수면 아래에도 백조의 감추어진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면 위의 백조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수면 위의 백조만 보고 잘못된 판단을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눈에 보여지는 결과만 가지고 평가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현재 골프 황제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타이거 우즈를 생각할 때 우리는 지금 그가 누리고 있는 명성과 찬사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오늘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서 각 선수들을 분석하고 각 선수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연구했는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지구력이 약한 면을 보완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써가며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몸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합니다. 그래서 현재 그가 누리고 있는 성공에만 많은 찬사를 보내는 것입니다.

밖으로 보여지는 모습으로 쉽게 사람을 판단하고,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에 너무 많은 무게를 두는 것은 그래서 어리석은 것입니다. 생각할 줄 알고 사려 깊은 사람들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적인 신분보다 그 속 사람을 보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타락한 이 땅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밖으로 드러난 모습에 너무나 많은 비중을 둡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직업과 타는 차 때문에 정말 보아야할 인격과 삶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만 등장합니다. 그러나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누가의 기사(눅9:557-62절)에서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태의 기사와 누가의 기사를 합해서 세 부류의 사람들을 관찰해야겠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은 마치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앙 생활의 수면 아래, 즉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것과 같은 말씀들은 주목을 끌지 못합니다. 다만 수면 위의 백조처럼 고상하게, 신사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그러면서도 신앙 생활이 주는 축복을 받는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함께 본문을 관찰하시면서 혹 우리의 신앙 생활에는 이들과 같은 잘못이 없는가 함께 돌아보는 시간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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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본문 관찰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마가는 \"그 날 저물 때에\"(마4:35절)라고 좀더 구체적으로 시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무리가 에워쌈을 보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문둥병자, 중풍병자,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는 이적을 보고는 떼를 지어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예수는 너무나 놀랍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보여주신 이적과 기사에 화려한 조명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이 보여주시고 있는 이적과 기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아직 주님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는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보기에 예수는 자신들이 그동안 그렇게 희구하던 다윗의 영화를 회복시켜줄 메시아처럼 보였습니다. 종교적인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메시아인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자신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암적인 존재였습니다.
어쨌든 예수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무리 중에 자기도 끼워달라고 간구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서기관이 등장합니다.

서기관의 잘못된 시각을 교정하심

원래 서기관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각 개인들의 계약서를 베껴 쓰거나 문서를 작성하며 계산과 기록 등의 업무를 관장토록 하기 위해 고용한 직업적 필사들이었습니다(렘32:12;26:26이하). 서기관의 우두머리는 왕의 자문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대상27:32). 어떤 서기관은 종교적인 임무를 수행(왕하12:10)하기도 했습니다. 포로로 끌려갈 때까지 서기관이란 직업은 제사장직과는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포로기 이후 그들은 종교적인 율법을 베껴 쓰며 보존하고 해석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스7:6). 그러다가 점차 그것을 연구하고 가르치게 되었습니다(대하34:13). 제사장이요 학자인 에스라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스7:6-10). 신약시대에는 이 사람들을 율법사라 불렀습니다(마22:35, 눅7:30).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그 세칙을 만들어 백성의 일상 생활에 적용하도록 했습니다. 백성을 지배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도 많은 의석을 차지했습니다(마16:21). 쉽게 말해서 이들은 종교적인 기득권 층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제사장 등과 더불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제자들도 핍박했습니다(눅22:2, 행4:5:6:12). 뒷날 사도 바울의 사역에서도 이 사람들은 암적인 존재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이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득권 층에 속해 있는 서기관 한 사람이 자신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사실 이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에 무슨 자격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강도와 창기, 도둑을 막론하고 인생의 막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동등합니다. 또한 인생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소유한 부자요, 학자, 교수 의사들에게도 동일하게 열려져 있습니다. 주님 앞에는 그들이 가진 신분이 전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사람의 죄인이 주님을 만나서 새로운 시민권자로 거듭나는 사건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이 주님에게 나왔다고 해서 그를 못 받아준다거나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서기관은 참으로 대단한 결심을 했습니다. 당시 예수님 주변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 앞에서 서기관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을 때 그는 참으로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이 말은 자신을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측근으로 삼아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성경지식과 사회적인 배경들을 염두에 둔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예수께서 전통적인 서기관 그룹에 속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의 반대를 받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어디로 가시든지 주님을 좇겠다고 하는 각오는 얼마나 다부진 것입니까? 그의 눈에 비친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나 놀라운 분이셨습니다. 자신이 평생을 바칠만한 분으로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본 것들이 수면 위의 모습들이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베푸시는 이적과 기사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삶을 사시고 계신가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아직 구주와 주님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아는 것은 다만 랍비들처럼 자신을 잘 지도해 줄 수 있는 선생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좋은 랍비들을 찾아가서 문하생이 되었던 것처럼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의 문하생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 생활의 함정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자주 이런 착각을 하면서 살게됩니다. 알려진 것이 옳은 것이며 검증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혹은 큰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 눈에 보이는 이적과 기사들이 진리라는 생각들입니다. 특히 외적인 것에 많은 비중을 두는 한국적인 정서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뭐라고 답변하십니까? 수면 아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서기관을 거부했다거나 그가 제자가 되기에 합당하지 않았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 어디에도 주님이 서기관이라는 신분을 거절했다거나, 그 사람이 제자가 되지 못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서기관은 수면 위의 모습, 즉 많은 사람이 주님 주변에 머무르고 있으며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주님만을 보았던 것입니다.

수면 아래, 즉 주님이 걸으셔야 했던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서기관에게 수면 아래를 보게 하십니다. 왜 주님은 그냥 그를 받아 주시고 천천히 깨닫게 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주님은 그렇게 흥분하고 들떠서 주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십니까? 그것을 알아야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잘못된 헌신을 다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차 주님이 말씀하셨던 중요한 원리입니다. 누가복음14:25-35절에 아주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26-27절에서는 제자가 치러야할 값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7-32절까지는 그 값을 계산해 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면 위의 모습에 현혹되어서 지불해야 할 값을 계산해 보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정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33절에서 제자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지만 소금이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소금의 짠맛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제자란 지불해야 할 값에 대해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서기관이 이것을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래 계속되는 여행가운데 계셨습니다. 일정한 거처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거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지할 만한 안정된 가정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철저하게 이방인이요, 순례자로 사시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어디를 가든지 주님을 좇겠다는 것은 지금 서기관이 가지고 있는 안정된 생활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듯 합니다. \"네가 한 말이 가지는 의미가 이런 것이다. 너는 이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느냐?\"
주님은 지금 주님 주변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함께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나를 따른다는 것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에 현혹되어서 나를 따르겠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제자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가 모두 열두 제자들처럼 전적인 헌신을 해야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아니 본문 21절에서도 전적인 헌신이 되지 않은 사람을 제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 서기관이 다른 열 두 제자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주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한 수면 위의 화려함에 도취되어 수면 아래의 삶,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에 대해서 모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따르는 것은 이적과 기사로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훨씬 불편하고 어려운 것들이 수면아래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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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은 어떠합니까? 혹시 여기 본문의 서기관처럼 정작 보아야할 수면 아래에는 관심이 없고 수면 위의 모습에만 시선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우리가 섬기고 나누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 어떻게든지 잘되고 복 받는 기독교를 원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 서기관의 수준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면 위에는 늘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수면 위에는 행복과 평안과 감사와 찬양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수면 아래에는 그런 감사와 찬양, 행복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주님과 동행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노력이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정말 고뇌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려는 노력이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수면 위와 수면 아래를 통시적으로 볼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수면 아래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것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서기관을 향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순례자요, 나그네의 삶이라고 시각 교정을 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함께 기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