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제자의 길 마5:38-42 여러분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합니까? 아니면 모세의 제자가 되고자 합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거의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질문을 다시 한번 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 예수의 제자가 될 만한 수준에 와 있습니까? 아니면 모세의 제자가 될 만한 수준에 와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은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우리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이전에 모세의 제자라도 될 정도의 자격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볼 때 좀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정도에 대한 결정을 해 보게 하는 말씀이 바로 오늘 읽어드린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모세의 가르침을 먼저 인용하신 후 자신의 교훈을 전하십니다. 누구든지 오른 뺨을 맞거든 왼뺨도 돌려대라. 모세가 전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는 계명을 들을 때 우리 모두는 참 그것도 계명이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엄청난 사랑의 마음을 가지지 않고는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라고 생각하면 여러분들은 놀라시겠습니까? 저는 이 계명도 사랑의 계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계명이 전해진 당시의 상황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급하게 광야로 나왔습니다. 한달 동안의 여행을 거쳐 간신히 시내산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향해 여러 가지 계명을 주신 가운데 이 계명도 주셨었습니다. 이 계명을 주실 때의 상황을 보면 삭막한 광야였습니다. 목이 마르는데 먹을 물이 없어 모세에게 불평하고 하나님께 불평을 했던 사건도 걸쳤었습니다.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떼를 쓰기도 했었습니다. 시내산 앞에 머무렀다고 해서 정착을 한 것도 아닙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유랑생활을 하여야 하는지도 알수 없을 때였습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하나라도 더 가져야 할 때였습니다. 남이 자기의 소 한 마리를 훔쳐가면 두 마리는 찾아와야 마음이 후련한 때입니다. 지금은 다릅니까? 어느 누가 한 대의 매를 맞았는데 한 대 때리는 것으로 속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느 누가 백만원을 빌려주었는데 백만원만 되돌려 받는다고 성에 차는 사람이 있습니까? 한 대 맞으면 두 대 세대 때려야 마음이 후련해 지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백만원을 빌려주었으면 이자를 계산해 받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런 욕심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향해 한 대 맞으면 한 대만 때리라는 계명을 지키는 데는 많은 자제와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본성의 사람들을 향해 더욱이 각박한 환경 속에 놓여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러한 계명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자제력과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여기에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이 계명을 지킬 수 있음을 분명히 근본에 깔고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러한 최소한의 사랑도 실천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봅시다. 아마도 이러한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그나마 이러한 수준의 모습을 미국의 사회가 보여주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들이 유럽에서의 전통을 이어 미국에서도 청교도의 정신을 바탕으로 신앙을 이어왔습니다. 그들이라고 예수의 계명을 모르고 있었겠습니까? 그 계명을 지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 가운데 모세의 계명을 지키는 수준까지는 자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수준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는 미국의 대표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이는 서부의 총잡이들의 싸움입니다. 그들의 싸움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방식을 너무나도 잘 표현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공평한 상황 속에서 서로 총을 들고 나옵니다. 그들 중간에는 어느 누구도 껴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쪽에서 쏘기 전에 내가 쏘는 싸움입니다. 동등한 기회 속에서 싸우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싸움으로 발전시키기까지는 그래도 예수의 계명까지는 가지 못하였으나 모세의 계명까지는 도달한 그들의 신앙의 모습을 반영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그 이상입니다. 누구든지 오른 뺨을 맞거든 왼뺨도 돌려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계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중동의 관습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지금도 그러하듯이 그들은 뺨을 맞을 때 손등으로 맞느냐 손바닥으로 맞느냐 하는 것에 따라 느끼는 수치의 강도가 달랐다고 합니다. 손등으로 맞는 것은 손바닥으로 맞는 것보다 두배 이상의 수치를 의미하고 이에 대한 변상을 할 때도 두배의 벌금을 내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대개 오른손잡이들이라는 것을 생각을 해 볼 때 오른 뺨을 맞는다는 것은 상대편의 손등으로 맞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저의 왼뺨을 맞는다는 것은 손바닥으로 맞게 됩니다. 오른 뺨을 손등으로 맞았다 함은 더 큰 수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수치를 당하였을 때 자발적으로 작은 수치를 자발적으로 더 당해주는 것도 어떻겠느냐 하는 해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상대편이 너에 대해 상당히 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손등으로 너의 오른뺨을 때렸을 때 그 상대편의 마음을 헤아려 그 사람의 마음이 풀리도록 왼뺨도 돌려대라는 예수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엄청난 자제와 너그러움과 남을 살펴주는 마음과 관용과 거기에 더하여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했던 예수께서는 그 이상의 삶을 살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지도자들을 비롯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른뺨을 맞으신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맞기시는 더욱 더 큰 수치를 자발적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라면 이러한 길을 피할수 있었건만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를 않았습니다. 인류를 위한 사랑이 있었기에 오른뺨을 맞고 또 오른 뺨을 내어놓는 모습을 친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향해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로마서 5:7-8에서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과연 그러한 삶을 살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지금도 그러하는지 모르겠지만 저희가 어릴 때 이렇게 싸웠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는 상대편을 노려보다가 턱을 내밉니다. 그리고는 \\\"자 때려봐\\\"하고 말을 걸고 놀립니다. 그러면 상대편이 화가나서 때린면 이제는 나도 때릴 명분을 얻었다 생각하고는 상대편을 때리기 시작합니다. 먼저 한 대 맞고서 더욱 많이 때려 자기의 분을 채우려하는 모습이 여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어린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만 나타납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역사 가운데도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예를 임진왜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본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율곡은 부국양병책을 주장했습니다. 즉 전쟁에 대비를 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왕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그래도 그러한 주장이 수그러들지 않자 왕은 대사를 파견했습니다. 다녀온 대사들의 보고가 서로 달랐습니다. 먼저 보고한 사람은 일본이 분명히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보고한 김성일 대신은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엇갈린 보고는 결국 조선으로 하여금 전쟁의 말발굽 아래로 깔려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피해는 엄청났습니다. 오늘날 한국 축구열기를 보면 이와 같은 양상이 나타납니다. 98년 월드컵 경기때 첫 두경기를 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었습니다. 마지막 경기 벨기에 전에서 죽을 힘을 다해 싸워 비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돌아가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이대로는 안되겠다 쉽어 축구장을 찾고,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왜 맞기 전에 미리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슬퍼집니다. 왜 우리는 한 대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민족인가? 왜 나는 그러하지 아니한가? 이렇게 살아가는 민족이라면 절대로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되면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만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른 뺨을 맞거든 왼 뺨도 돌려대라는 말씀을 우리가 받고 있다고 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답과 길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축복을 생각할 때 저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축복을 정말 우리 모두가 깨닫고 받아들이질 아는 예수의 제자들이 되는가 하는데에 있습니다. 이렇게 살고자 했던 예수의 제자들은 이 세상을 이끌고 가는 모습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했던 많은 나라들의 모습입니다. 과거의 기독교나라들이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예수의 계명을 따라 이 나라가 살아갈 때 우리에게는 희망찬 미래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어떠한 것을 말합니까?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에게 더 좋은 직장과 더 나은 수입을 위해 더 많은 존경을 받기 위해 오늘도 발버둥치고 있진 않습니까? 바로 내가 주체가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아직도 모세의 계명도 지키지 못하는 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모범을 따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것이 바로 예수의 계명을 지키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떠냐 스스로 생각을 해 봅니다. 저도 아직 모세의 계명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함께 이 문제를 위해 배우고 실천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이 강동제일교회에 부르시지 않았는가 생각을 해 봅니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예수의 계명을 지켜나갈 때 이 곳에서 신앙생활하는 우리 모든 친구들에게 엄청난 축복이 임하고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