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를 부르시는 예수님


제자를 부르시는 예수님
마4:18-22



사람들의 관심은 수시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온통 나라가 월드컵에 초미의 관심을 보이다가 16강진출이 좌절되자 시들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엔 박세리양이 메이저대회 2관왕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자 모든 관심이 골프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골프용품이 날개돋친 듯 팔리고, 골프교실이 생겨나고, 심지어 박세리 골프 주식회사가 생겨날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확신컨대 이 관심도 언젠가는 바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기대감에 부응할때에만 관심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이란 결국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그 관심은 곧 다른 곳으로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주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두말할 필요없이 주님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나라였스니다. 그리고 그 관심은 한번도 바뀐일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이땅에 계시는 동안 하신 일이 참 많았습니다,

병든자를 고치시고, 귀신들린자에게서 귀신을 물리치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그 바다위를 걷기도 하셨고, 심지어 죽은 나인성과부의 아들과 죽은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이 하나님나라를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안에 있는 99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을 말씀하셨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되돌아 올 때, 아직 상거가 먼데 달려가서 그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그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그를 위해 송아지를 잡아 친히 잔치를 배설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메시지를 시작으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십자가에서 절규하실 때까지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나라였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후, 승천하실때에 하셨던 말씀도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기 위해 어떤 일부터 시작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놀랍게도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계획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방법이나 제도를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방법이나 제도를 찾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을 찾으시고, 그 사람들을 훈련시키시는데 주력하셨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그것도 많은 사람을 찾아서 훈련시키신 것이 아니라 단지 12명이라는 소수의 사람을 키우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돌아다니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과 18절을 잠시 보겠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셨습니다. 참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방법도 필요하고 제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헌신된 사람을 먼저 찾아 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볼때, 우리민족은 참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특히 현대사를 생각하면 지난 100여년동안 우리는 일제의 침략으로 고통스러운 식민지 생활을 했고,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했습니다, 또 군사쿠테타와 신군부의 세력으로 인해 어두운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대사가 왜 이렇게 얼룩이 졌는지에 대해 학자들은 말하기를 \\\"우리 민족이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일제시대때 친일파 세력으로 활동하면서 요직에 앉아 있었던 사람들이 해방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있도록 방치해두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현대사를 거쳐오면서 방법도 여러차례 바꾸고 제도도 여러차례 바꾸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바뀌지 않으니까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부패한 사람이 요직에 앉아 있는한 방법과 제도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어떠할까요? 교회가 부흥하고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사람입니다, 헌신된 성도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행정적으로 완벽한 제도를 갖추고 있다해도 헌신된 사람이 없으면 교회는 부흥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요즘 꼭 빼먹지 않고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교회도 장로님을 세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훗날을 대비해서 미리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온유한 교회의 장로님은 성령이 충만하고, 정말 인격이 성숙된 분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90% 헌신된 10명보다 차라리 100% 헌신된 1명을 장로님으로 세우게 해달라고 저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구경꾼이 많은 교회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뒷짐지고 있는 교인들이 많으면 하나님도 어찌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00% 헌신된 사람이 필요합니다.

언젠가 이런 예화를 여러분에게 들려 드린 것으로 기억합니다, 반복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에 적절한 예화라 생각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미국 서부개척 시대에 사람들이 타고 다니던 역마차에 대한 얘기입니다, 역마차에도 좌석 구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기차나 비행기처럼 특별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또 번호표가 붙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아뭏튼 좌석에 구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구분이 되어 있었는가 하면 1등석표를 산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1등석입니다, 예를 들어 마차바퀴가 빠졌다고 칠 때, 그래도 아무 상관없이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1등석 손님입니다,

2등석은 마차가 고장났을 때 일단 내려서 길 옆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입니다, 이에 비해 3등석은 마차가 고장나면 팔을 걷어 붙이고 마부와 함께 수리해야 하는 차표입니다. 그런데 교회안에도 1등신자 2등신자 3등신자가 있습니다.

항상 대접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1등신자입니다, 2등신자는 \\\"잘해봐라\\\"하면서 언제나 한쪽으로 물러나 구경만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3등신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순서가 천국에 가면 뒤바뀌게 됩니다, 이땅에서 1등, 2등, 3등 순으로 천국문을 향해 그대로 입장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천국에 다 오면 주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신다고 합니다, \\\"뒤로 돌아 앞으로 왓\\\"

그러면 누가 제일 먼저 들어갑니까? 3등신자입니다, 섬기는자, 헌신된자, 땀흘리고 열심히 사역한자가 제일먼저 천국에 들어갑니다, 교회 일에 그저 팔짱만 끼고 구경만 하다가는 꼴찌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에 필요한 것은 헌신된 사람입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하나님나라에 충성하는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할 때, 인격이 성숙되어서 항상 남을 섬기고, 주님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100% 헌신하는 분이 장로님으로 세워지게 해달라고 지금부터 미리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 민족을 향해 해야할 일도 이런 일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것입니다, 조금은 멀게 느껴질는지는 몰라도 지금 눈앞에 있는 방법과 제도만 고칠 것이 아니라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현대사의 그 어두운 세월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리석은 부모는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줍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부모는 자식에게 지혜를 물려줍니다, 어리석은 지도자는 백성들에게 단지 경제적인 이윤만 남겨줍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지도자는 사람을 키웁니다.

여러분!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람을 키우는 일에 앞장을 설수 있다면 하나님나라는 더 많은 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일을 위해 제일먼저 하신일이 사람을 세우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내용은 베드로나 안드레가 먼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셨을까요?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일까요? 혼자서 그 일을 감당하기가 벅차서 그들을 부르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혼자서 얼마든지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능력이 부족해서 그들을 부르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을 부르셨습니까?

연약한 그들을 동역자로 생각하신 것입니다, 며칠전 신문을 보니까 박세리양이 U.S 오픈 골프대회에서 우승한 직후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박세리양에게 정식으로 골프를 함께 칠 것을 제의했다고 합니다, 박세리양에게 개인적으로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러나 그 정도의 영광은 비교도 할수 없는 영광이 여기에 있습니다,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부르실 때 종이나 심부름꾼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동역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은 더욱 감사하고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그런데 더 감사하고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대부분 약점도 많고 그 당시 신분상으로도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직업이 무엇입니까?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택하실 때, 직업을 보시지 않았습니다, 신분을 보시지도 않았습니다. 학벌의 좋고 나쁨도 보시지 않았습니다, 지금 현재 얼마만큼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느냐?를 보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결코 그런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이 사람들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지금은 고기를 낚는 어부지만 사람을 낚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앞에 자랑할 것도 없지만 설령 그런 것이 있다해도 주님은 그런 것을 보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부르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와 안드레는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고기를 낚는 일이지만 그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또 21절에 보면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열심히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그 장면을 보시고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들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목표입니다, 주님의 최대관심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지, 어떤 종류의 삶을 살든지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일은 사람을 낚는 어부의 일입니다, 그 일이 우리의 최대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요즘 여러분은 어디에 제일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일제시대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친일파로 살아가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독립군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제시대때 우리나라가 독립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하게 보여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독립군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친일파가 되어 일본 사람 흉내를 내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본 사람들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걔중에는 많은 희생과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일본과 대항하여 이 땅,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싸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친일파로서 살았던 사람들은 훗날 두고 두고 부끄러운 이름과 삶을 남기게 되었고, 독립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은 역사에 두고 두고 아름다운 이름과 삶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하는데도 이와 비슷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분명 예수 믿는 사람인데 사람을 낚는 어부의 일은 고사하고 아예 전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처럼 자신을 숨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친일파인셈입니다,

반대로 이땅에서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독립군처럼 헌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장을 생계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선교의 장으로 생각하여서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땅히 우리의 관심과 우리의 삶의 목적은 사람을 낚는 어부의 일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일을 위해 베드로도 부르시고 안드레와 야고보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어떻게 반응을 보였습니까?

20절에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22절에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데 있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버리는 것\\\'입니다. 버리지 않고는 결코 취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자신들의 생업 수단인 그물을 버렸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재산인 배와 아버지까지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지금 우리들의 직업을 버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부모를 버리라는 말은 더 더욱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일에 있어서 우리의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말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우선순위를 결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00세가 되어 얻은 아들 이삭이 얼마나 귀하게 여겨졌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귀한 자식이라도 하나님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는 행위를 통해 우선순위를 결정하도록 요구하신 것니다.

여러분! 우리가 십일조를 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경제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지켜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시간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봉사를 왜 해야 합니까? 내 생활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3절에서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개인적으로 참 좋아할뿐 아니라 자주 묵상합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자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좋은 군사로 부르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를 주저하지 않고 결정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주님의 제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나서 부르시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 있어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의 동역자로 생각하셔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나라에 두실 수 있으십니까? 내가 이땅에서 사는 이유가 궁극적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에 있음을 아십니까?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