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11:5-13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알기 원하여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우리는 지난주일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같은 본문을 살핀 바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13절 후반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피려고 합니다. 하지만 먼저 지난주일 살핀 주님의 비유를 다시 기억해 봅시다.
주님은 5-8절에서 밤중에 빵을 빌리러 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고 이어서 9-10절의 직접적인 교훈을 거듭거듭 말씀하심으로, 마지막으로 또 한 번의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를 예를 들어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도전하시며 기도에 관한 말씀을 끝내셨습니다.
어떻게 기도하라고 5절 이하에서 주님은 가르쳐 주셨습니까? 2000년 전 시대를 보여주는 예수님의 비유를 들어보십시오. 그 시절에는 음식물이 냉장고에 채워져 있던 시대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음식은 그날그날 만들어 먹었고 방부제나 냉장고가 없던 시절입니다. 게다가 그 시절에는 손님 접대는 아주 중요한 사안입니다. 손님 대접을 잘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했는지 교회에 장로를 선택하는 자격 기준으로까지 사용되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밤중에 손님을 맞이한 사람은 난처한 입장에 처했습니다. 손님은 찾아왔는데 대접할 음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에 쓰여진 동네는 식은 밥 차려 내놓는 동네가 아니잖습니까? 빵 먹던 동네입니다. 그 빵은 밀가루 반죽을 한다고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니죠. 누룩을 넣어서 발효시킨 다음에 구워야 빵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없으면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밥상을 차려 주지 않으면 천하에 몹쓸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것을 면하려면 지금쯤 틀림없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이웃 사람을 깨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이야기를 처음 듣던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이웃집에 가서 빵을 구해 와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어쩔 수 없이 밤중에 한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여보게, 갑자기 친구가 지금 찾아왔는데 구워 놓은 빵 있으면 세 덩이만 빌려주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깬 이웃 사람은 처음에는 일어나기가 싫었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조그마한 방 하나에 모든 식구가 살던 시대입니다. 한 사람이 일어나면 온 식구가 잠을 설칠 것은 뻔한 처지입니다. 귀찮게 하지 말게, 문을 이미 닫아 걸었고 아이들은 나와 함께 이불 펴고 누웠으니 일어나 도와줄 수가 없네 그려
하지만 빵을 빌리러 간 친구는 계속 집요하게 소리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손님은 도착해 있고 아내는 차려 놓을 음식이 없어 안절부절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거기서 물러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웃집 문을 두드리며 소리칩니다. 더 이상 안 된다고 말하며 누워 있을 수 없도록 집요하게 요청합니다. 주님의 결론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보십시오. 체면이고 예의고 집어 던져 놓고 요청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매달립니다. 말하자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여서가 아니라 그 강청하는 것에 못 이겨서 결국 일어나 빵을 주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주님은 9-10절에서 계속하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라 세 번 거듭 명령을 하십니다. 왜 반복해서 명하십니까?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되시는지 그 이유를 세 번 거듭 밝히십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담대히 기도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여기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은 세 종류의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세 가지 다른 표현을 통해서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계속,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받기까지, 찾기까지, 열릴 때까지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기도의 다양한 측면을 나타내는 표현을 사용해서 간절히 매어 달리도록 교훈 하십니다.
왜 그처럼 끈질기게 기도하도록 세 번 연거푸 강조하십니까? 능력을 얻는 기도, 능력을 행사하는 기도, 다시 말해 성령의 능력을 우리의 삶에 공급하는 기도는 지금 대부분의 우리가 하는 기도의 방법이 달라지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얻기 위해서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그 방법으로 기도해야만 합니다. 부끄러움을 접어 두고 간절한 마음으로 얻기까지 간구 하도록 교훈 하십니다.
10절에서 주님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간절한 기도를 기꺼이 들으시는 것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제자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입니다. 제자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입니다. 그것을 위해 꼭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구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무슨 풍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과 우리 삶에서 그 영광을 보도록까지 삶을 지탱해 나가야 되는 최소한의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밤중에 느닷없는 친구의 요청을 어쩔 수 없이 들어준 이웃과는 달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기쁘게 도우시려고 기다리시는 분이 여러분과 저의 하늘 아버지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은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은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은 열릴 때까지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얻습니다. 그러면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면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주시겠다는 백지수표가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요구를 들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복지를 위한 요청을 응답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13절에 나오는 성령에 관한 언급은 이 영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기꺼이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우리의 욕망 성취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서 그처럼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은 들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1세기의 속화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그리고 우리의 기도의 자세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의 현장에 강하게 도래하기 위해서 우리의 기도의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사단이 기승을 부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려면 사생결단하고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아듣도록 온갖 예를 들면서 거듭거듭 권면하십니다. 또 이르시되라고, 요청하지도 않는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8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9절에 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계속해서 집요하게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로 연속적인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성령의 능력을 주심으로 우리의 기도에 답하실 것이라고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13절 끝 부분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주님의 마지막 도전의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성령에 대해서 몇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성령은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에게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너희 천부께서 그것은 바로 너희 천부께서 라고 말함으로 너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하늘 아버지의 자녀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제일 우선 순위를 두고 기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이라는 말씀입니다. 11장 앞부분까지는 별반 성령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성령을 구하라는 권면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왜 기도의 관한 말씀을 하신 후에야 비로소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신다고 여러분은 생각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제목이 많겠지만 성령보다 더 절실하고 중요한 것이 없음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꼭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기도 제목 한 가지씩 말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중직자 여러분, 그리고 교역자 여러분, 우리 모두 여기에 일치된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 모두가 밤낮없이 생각하고 사모하며 기도하는 제목이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성령 충만보다 더 절실한 기도 제목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여, 성령을 주옵소서라고 이제부터 부르짖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사람들은 주님의 이 도전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을 때 이미 성령이 그 마음속에 들어와 계시는데 무슨 성령을 또 달라고 하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신학적으로 무식한 사람 취급을 종종 합니다. 특히 우리 보수주의 전통에서 자란 사람들 가운데 그런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셔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 예수 믿는 각 사람에게 믿는 순간 임하셔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도전하시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 짐을 따라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아무리 제자 훈련을 받고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기도를 많이 한다 해도 해결되지 않는 영적인 영역이 있다는 것을 느껴 보지는 않았습니까? 흔히들 제자 훈련을 받고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면 인격과 사역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갖춘다고 생각하지만 모양은 그럴 듯한데 그 속에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그 이상의 수준이 있습니다. 한상동 목사님께서 신학생인 저희를 향해서 자주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앙 세계에는 여러분이 지금 알고 있는 그 수준이 아니라 신비한 세계가 있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능으로도 안되고 힘으로도 안되고 오직 성령으로만 되는 그런 영역이 있습니다(스가랴 4:6).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성령을 달라는 기도 말고는 우리의 모든 기도는 2차 적인 것들입니다. 어떤 저자가 표현했듯이 우리의 대부분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잡동사니 취급을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충만만큼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성령을 달라는 것이 여러분의 자나깨나 가장 절실한 소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성령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오늘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구절이 있습니다. 소위 산상 보훈 가운데 나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오늘 우리 본문 13절과 대조해 봅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두 곳을 대조해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 13절에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부분에 마태복음 6장 11절에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선물 중에서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악한 인생들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을 압니다.
어떤 아비가 생선을 먹고 싶어하는 자식에게 독뱀을 주며, 알을 달라는 자녀에게 무서운 전갈을 주겠습니까? 자식의 손에 독을 지닌 것을 놓아줄 부모는 없습니다. 우리 악한 자들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을 안다면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을 아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동안 아버지 하나님께 그 동안 무엇을 구해 왔습니까? 생선과 달걀, 아니면 빵을 구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까? 이제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구해 보십시오. 여러분과 저는 성령을 구하도록 초대받은 하늘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선물은 그 분 자신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 자신의 영을 구하십시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들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하늘 아버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구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복주시는 성령님을 구하도록 하십시오. 성령께서는 이미 모든 성도들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 속에 찾아오시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 17절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약속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지금)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장차)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마지막 부분은 제가 여러분이 알아듣도록 조금 풀어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지금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장차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면서 곧 그분이 오실 것을 말하면서, 그 분이 오직 제자들에게만 허락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저는 지금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지금이라는 말을 넣어서 읽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시제가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또 장차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장차라는 것을 제가 넣은 것은 그 시제가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들 안에 성령께서 계시는데 장차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면 우리의 삶은 변합니다. 평소에 불만스럽게 여기던 것들이 감사와 찬양으로 바뀝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하면 평소에 나는 못해하고 체념하던 삶이 바뀝니다. 불가능이 없는 삶으로 변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성령의 은혜는 좋은 것 중의 좋은 것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 중에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주님이 친히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나를 믿는 자는 뭘하겠다고요? 나를 믿는 자는 남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주님이 하신 것보다 더 큰 역사도 하리라고 주님이 약속 하셨습니다. 우리는 속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어요? 그냥 주님했던 것만큼만 해도 감사하겠습니다. 그러고 싶죠?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있으면서 했던 것을 다만 본본기에 지나지 않는다,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너희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일을 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 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주님이 아버지께로 가셔서 영광을 받으시면 성령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새로운 차원의 교제가 시작됩니다. 그때 성도들은 새로운 차원의 사역을 행하게 됩니다. 심지어 주님이 하신 것보다 더 큰 사역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성령은 아버지께서 아무에게나 주시는 선물이 아니고 구하는 자녀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버지께서 자녀에게 주시는 선물로서 성령에 대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믿고 중생 받을 때 우리 마음에 오시는 성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오신 그 성령께서 다시금 능력으로 우리의 삶에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십니다.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야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면 결코 떠나가지 않습니다. 나는 주님을 잊었다가 기억했다가 하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들락날락하지 않습니다.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을 때에 한번 모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언제나 충만한 능력을 주시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만약에 주의 성령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즉시 우리가 성령 충만한 삶을 계속 산다면, 그것은 세상에 사는 천국 생활일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 보나, 많은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두고 보나,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별히 성령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구하지 않으면 성령 충만한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면 우리의 갈급한 심령이 만족하게 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충만케 하시면 우리의 마음이 정결하고자 하는 소원이 샘솟게 됩니다. 더 이상 세상의 유혹이 우리를 엄습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물결이 아무리 흉흉해도 우리는 주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충만할 때 우리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었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잘못된 장로교 신학의 틀에 안주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구하라는 말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이미 우리 안에 계신데 감사하면 되지 무슨 성령을 또 구하느냐?는 생각에 사로잡혀 성령을 구하라고 하면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듣지 않으면 하나님이 일을 못하실까요? 그러나 20세기 초반에 들어오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 역사에 새로운 현상을 일으키셨습니다. 별로 건전한 신학이나 체계적인 교리도 없는 사람들이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를 붙들고 주여, 성령을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구하자 하나님께서 놀랍게 응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한 번 있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20세기가 다가도록 그 현상은 계속되었습니다. 전세계 교회로 확산되어 갔던 것입니다. 우리 기성 교회가 잘못된 교리의 틀에 갇혀서 성령을 구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엉뚱한데서 불을 지피신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 기독교인 가운데 3분의 1은 성령을 구하여 성령의 역사를 실제로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3분의 2는 성령을 알고는 있지만 아직 구하지 않아서 성령이 어떤 분인지 실제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장로 교인이 성령을 구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교리와 역사를 망각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성령이라고 하면 오순절 파의 독점물인양 생각하는 무식이 판을 치는 현실을 우리는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세기 영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장로교 신학자로 인정받는 워필드는 이렇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발전된 성령 교리는 배타적으로 신교 안에서만 발전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발전된 성령 교리는 개혁 주의 교리이며 더 정확히 표현하면 청교도 교리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 성령을 주십시오라고 구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달리 말해서 성령을 구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지 않습니까? 성령 체험은 그리스도인이 능력 있는 사역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능력 있는 증거와 탁월한 봉사를 하는 사람 치고 성령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이 특별한 능력을 공급받는 것은 얼마든지 우리 생애에 반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축복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을 향한 소원을 아뢰어야 합니다. 그 분을 찾으십시오. 그 분을 사모하십시오. 그 분 없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분을 항상 갈망하십시오. 마치 후회하는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소원을 심정을 쏟아 놓아야 합니다. 이 축복은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 번씩 반복해서 주님이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 신교가 가지고 있는, 아니 개혁 교회가 가지고 있는 3대 신앙 고백서라고 하면, 교리문답이라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서나 대소요리 문답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가 있습니다. 벨직 신앙고백서가 있습니다. 이 세가지가, 말하자면 우리 입장에 있는 가장 탁월한 고백서입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 116문답은 이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가 필요합니까? 그것이 116문의 질문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가 필요합니까? 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은혜와 성령을 마음으로 끊임없이 탄식하며 구하는 자들과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너무 깁니까?
하나님은 은혜와 성령을 구하는 자들에게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성령을 사모해서 받고 감사하는 자들에게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은 끊임없이 탄식하면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마음으로 탄식하며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 116문답은 오늘 누가복음 11:1-13 과 맥이 닿는 것입니다. 기도는 왜하느냐? 한마디로 말하면 그 분의 은혜와 성령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 분의 은혜와 성령을 받아서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그외 많은 우리의 기도 제목은 잡동사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의 모습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는지 바로 인식한다면 이제 우리는 새롭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 바로 인식한다면 이제는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선하신 하늘 아버지께서, 기꺼이 도우시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정말 궁극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구한다면 우리는 강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옛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천사를 붙들고 씨름했던 것처럼 그렇게 부르짖는 자에게 하나님은 아직도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때 우리는 자신을 이길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사단을 이기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소유한 성도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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