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사로잡혀 사는 사람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눅15:1-2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
눅15:1-2





제 어린 시절 집이 산 위에 있었습니다. 마당에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 보면 동네가 한 눈에 다 내려다 보입니다. 어느날 어머님께서 마당에서 빨래를 널다가 아래를 우연히 내려다 보았는데 저 아래 시장 앞 길가에 제 여동생하고 비슷한 나이의 아이가 길을 가는 데 보니 영락없이 제 동생이더랍니다. 입은 옷하며 모습하며......

언뜻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동생 이름을 부르면서 집안을 찾았답니다. 제 동생 이름이 수영인데 수영아! 수영아! 그런데 마당 옆에서 놀고 있어야 할 아이가 보이질 않는거예요.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고, 널던 빨래를 내 던져두고 아래쪽을 향해 달렸지 않겠습니까? 아래쪽 동네는 사람도 많이 지나다니고, 길도 아주 복잡한 시장 통이거든요. 하마트면 제 여동생을 잃어버릴 뻔 했던 거죠.

한 5분 정도 걸릴까요? 내리 달려서 그곳에 가서 봤더니 제 동생이었습니다. 어린 아이 걸음으로는 그 곳까지 내려오려면 집을 나와 족히 30-40분 정도는 걸었을 그런 거리입니다. 지금도 어머니께서는 그 때 일을 생각만 하시면 식은 땀이 나실 것 같습니다. 아직도 제 동생이 어떻게 거기까지 혼자가서 돌아다녔으며, 마침 그 때 산 위 집에서 내려다 보고 동생을 찾아 나설 수 있었다는게 잘 이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제 어린 조카 녀석이 자기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동생이 이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갔다가 지하철에서 잃어버렸답니다. 지하철에서 따라 내린 줄 알고 앞으로 조금 걸었는데 뒤돌아 보니 없어진 거예요. 전철에서 안 내린거죠. 지하철 역무원에게 달려가서 연락을 하고 4정거장이나 더 가서야 그 기차에 탔던 승무원이 찾아서 다시 반대로 태우고 돌아와 만났답니다.

승무원 손을 잡고 지하철에서 내리는데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서\\\"엄마\\\" 라고 소리쳐 울면서 품에 앉겼다더군요? 얼마나 아찔했겠어요.

정말 그 때 아차 하는 순간에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오. 그날 밤 편히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못자죠. 절대 그날 밤 편히 잠 못잡니다. 언제까지요? 잃어버린 자식이 돌아오기까지죠.

잃어버린 자식이 돌아오기까지는 그 가정에 기쁨이 있겠습니까? 세상 무엇으로 그 고통을 해결하겠냐는 말입니다. 그 간절하고도 애절한 마음을 염두에 두고 오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는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언급된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이었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가장 큰 권세를 가지고 있던 기득권층이었습니다. 죄인들로 손가락질 받던 자들과 의로운 자라 뽑내던 자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은 아주 상반되게 그려져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다고 했습니다. 겸손히 말씀을 들으려고 한 그들의 자세와는 정반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그들은 원망하였고,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원망을 듣고 교훈하신 가르침이 바로 그 유명한 잃은 영혼에 대한 세가지 비유였습니다. 일백마리 양 중 하나를 잃은 목자가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닌 것,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은 여인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재산의 절반을 받아 탕진하고 빈털털이로 돌아오는 둘째 아들 탕자를 품에 앉는 아버지의 심정을 표현한 탕자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이 세 경우 모두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에 대한 기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7절 보십시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0절입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그리고 32절 보십시오.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습니다. 잃은 것을 찾은 것은 기쁨입니다. 큰 기쁨입니다. 더구나 잃었던 생명, 곧 영혼을 찾는 것은 가장 큰 기쁨입니다. 어제 교인 중 한 분이 이 메일로 편지를 보내셨는데 그 편지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잠을 잘 수가 없답니다. 구원받은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잠이 잘 오질 않아요.\\\" 여러분 구원받은 기쁨과 감격이 이쯤 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구원받은 기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더 큰 기쁨을 가지고 \\\"돌아오는 우리\\\"들을 맞아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십니다.

헤밍웨이의 \\\"The Capitol of the World\\\"라는 소설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답니다. 스페인에 사는 어느 아버지가 집을 뛰쳐나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마음을 먹고 신문에 아들을 찾는 광고를 냈답니다. \\\"사랑하는 아들 파코야,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난 너를 다 용서했다. 아빠\\\"

화요일 정오가 되어 아버지는 약속의 장소인 몬타나 호텔에 갈 때 얼마나 떨리는 마음이었겠습니까. \\\"내 아들 파코가 과연 나올까?\\\" 그런데 호텔에 도착한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 그런줄 아세요? 가보니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무려 800명이나 와서 제각기 자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더랍니다. 파코라는 이름이 그 나라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었다네요. 우리나라로 이야기하자면 영호나 철수쯤 될까요?

아버지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는 집나간 아들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소설입니다. 점점 파괴 되어가고 있는 가정을 향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는 이들의 애절한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품에 앉아주는 아버지의 마음과 함께 생각해 볼 꺼리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장남은 순종 잘하고, 일 잘하고, 충실한 아들이었습니다. 반면에 둘째는 놀기 좋아하고, 불순종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이 후의 이야기는 여러분이 다 잘 압니다.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마치 맨발로 뛰어가 맞아주듯, 부둥켜 앉고 아무런 책망 없이, 사랑으로 품어주는 아버지. 돌아와 준 것만으로 고마워 잔치를 벌리는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데서 불거져 나왔습니다. 그 동안 순종 잘한 큰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불평과 원망을 표현합니다. 항의 하는 거죠. 그 내용인 즉, 아버지의 재산을 축낸 저 못된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려주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겁니다. 그에게는 돌아온 동생보다는 아버지의 재산이 더 큰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동생이 재산을 나눠 가지고 가버려 속이 쓰려왔는데, 이제 자기에게 주어진 남은 재산마저 동생이 다시 돌아와 축나게 되었으니 분이 난겁니다. 30절 보십시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의 마음 속에 일어난 분과 화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재물 앞에선 동생이고 뭐고 없습니다. 돈 앞에선 피를 나눈 형제도 필요 없습니다. 교회 관리 집사님 집에서 기르는 검둥이가 우리 교인들을 얼마나 잘 알아보는지 몰라요. 그런데 교인 아닌 사람들이 오면 얼마나 으르렁 거리며 짖는지 참 신통해요. 이렇게 개도 사람을 알아보고 가리는데 오늘 말씀에 나오는 형은 재물 때문에 동생도 싫고, 아버지에게도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기분 나빠 죽겠다는 겁니다. 용서하고 들으십시오. 정말 개만도 못한 형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던 형이지만, 겉으로는 책망받을 것이 없는 것 처럼 보였던 형이지만, 그의 속은 온갖 탐욕과 욕심에 사로잡혀 있고, 자기 의를 내세우며 교만과 아집에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나오는 두 종류의 사람이 바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의 모습인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돌아온 동생을 미워하며 아버지께 불평과 원망을 한 큰 아들은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며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고 있죠 .

이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 얼마나 기가 막힐까요? 착한 아들인 줄 알았는데, 순전히 속 계산을 따로 하고 있던 음흉한 아들, 탐욕에 사로잡혀 아버지께 대드는 아들! 형제 우애도 저버리는 아들.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재산이 아닙니다. 다만 아들이, 그 아들이 착한 아들이건 못된 아들이건, 효자건 불효자건 그건 상관 없어요. 그저 아들이 돌아온 것만으로 아버지는 기뻤던 겁니다. 말할 수 없이 기뻤던 거예요.
신문에 가출한 사람을 찾는 난을 보면 사진과 함께 실리는 글들이 거의 다 이렇습니다. \\\"모든 것을 다 용서하마. 무조건 돌아와라.\\\" \\\"여보, 다 이해하니 돌아오세요. 아이들이 기다립니다.\\\" 무슨 소리인가요?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돌아와! 돌아와!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다 용서하시고,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우리 힘 가지고 안된다는 겁니다. 할 수 없어요. 이게 바로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내가 돌아가고 싶다고 돌아가지는게 아닙니다.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아버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엡 2: 18을 보십시오.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로 이 말씀처럼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십니다.

때로는 신앙생활 잘한다고 교회 안에서 머뭅니다. 봉사도 열심히 하고, 예배도 잘 참석하고, 여러 가지 직분으로 충성도 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보다 다른 이가 더 인정받고, 칭찬 받고, 대접받으면 속이 뒤집힙니다. 나 보다 신앙 생활도 제대로 못하는 이가 복을 더 받고, 잘 되며, 사람들이 더 알아주면 믿음이고, 은혜고 다 팽개치고 시험들어 정신을 못차립니다.

세상에 이럴 수 있는가 씩씩거리는 맏아들 모습과 같아집니다. 예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며 비방하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바로 이 맏아들의 모습입니다. 왜요? 성령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한 영혼의 가치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간절한 기다림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직 자신들의 지위와 탐욕, 그리고 이미 움켜쥐고 있던 권력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여러분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합니다. 못나디 못난 나의 이 모습 이대로! 온갖 죄악에 가득차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가까이 오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세리들과 죄인들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 가까이 나아와야 합니다. 두 팔 벌리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멀리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돌아오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리라\\\"라는 말씀처럼 성령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복된 삶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