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사역에 함께 하기

성령 사역에 함께 하기/눅15:25-32

성령 사역에 함께 하기
눅15:25-32





자극은 언제나 더 큰 자극을 원하기 마련입니다. 어제 첫 방송된 S TV의 \\\\\\\"하늘이시여\\\\\\\" 라는 제목의 드라마의 기본 설정은 친어머니가 시어머니가 되는 것이랍니다.

가족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는 그 작가는 며느리가 시어미니의 따귀를 때리는 躍湧?연출하기도 한 사람이라는데 이렇게 해서라도 시청률을 올려야 하는 것인지 정말 우리네 가정과 사회에 이런 일이 전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저야 아이가 하나이고 저 또한 자랄 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과 남매로 성장했기에 온전히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이들을 키워 보면 첫째와 둘째가 매우 다르다고 하지요.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 프랭크 셀러웨이는 출생 순서가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의 “태생적 반항”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맏이는 대개 부모의 권력이나 권위와 동일시하면서 독단적, 지배적 성향을 보이는 반면 둘째, 셋째 등은 체제와 권위에 맞서는 반항적 성격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입니다. 둘째 등이 그런 성격을 가질 확률은 맏이보다 최고 열배이상 높다고 합니다. 셀러웨이는 성격 형성의 배경을 부모의 사랑 등 가정의 제한된 자원을 두고 벌이는 형제간의 경쟁에 그 주요한 원인이 있는데 둘째, 셋째 등은 맏이보다 약세로 출발하기 때문에 기존 질서에 자연히 반항적 성격을 띠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난 20여년간 6,000명 이상을 대상으로 출생 서열과 성격의 상관관계를 살펴보았는데, 이에 따르면 진화론의 찰스 다윈, 지동설을 주장한 니콜라우스 쿠페르니쿠스, 컴퓨터의 귀재 빌 게이츠 등은 모두 맏이가 아니었으며 둘째나 셋째가 맏이보다 더 성공할 확률이 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큰아들은 책임감이 강하고 가정을 사랑하며 부지런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고 둘째는 다소 충동적이고 모험적이며 자유분방한 데가 있어 보입니다.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던 이 가정에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둘째 아들이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요청하여 그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 곁을 떠나 먼 나라로 가 버립니다. 나름대로 새로운 일을 시작해 보려는 계획이 있었겠지만 결론적으로 가지고 온 재산을 다 써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망한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신앙인 아닌 사람들도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작은 아들일까요?

묵묵히 집에 남아 아버지 곁에 있던 큰아들일까요?

이 비유의 주인공은 작은 아들을 기다리시고 있는 아버지이고 이 비유는 아버지의 거룩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가족에 대해 모두를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 비유에 나타난 아버지는 너무나 어리석어 보입니다. 아버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한심한 작은 아들도 그러하지만 이런 아들을 나무라거나 가르치고 바로 세우려 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도 쉽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약할 때 강할 줄 알며 두려울 때 용감할 줄 아는 아들
솔직한 패배 가운데서 당당하고 굽히지 않으며 그러나 승리 가운데서는 겸손하고 너그러운 아들을 기르게 하소서.

자기의 행동을 자기의 소원으로 바꾸지 않는 아들, 주님을 알며 또 주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초석이 됨을 아는 아들을 기르게 하소서.

기도하옵나니 그를 편안과 위로의 길로 보내지 마시고 난관과 도전이 있는 긴장과 자극 가운데로 보내시옵소서.

여기서 그로 하여금 폭풍의 가운데서 설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하시고 여기서 그로 하여금 실패한 자들을 위한 동정을 배우게 하소서.

마음이 밝고 목표가 고상한 아들 남을 다스리기 전에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아들 웃을 줄 알지만 우는 법도 잊지 않는 아들

미래를 지향하지만 결코 과거를 잊지 않는 아들을 기르게 하소서.

결국 이 모든 것들이 그의 것이 되기를 기도하옵나니 항상 진지하되 결코 노무 진지하게 되지 않도록 충분한 유머를 갖게 하옵소서.

그에게 겸손을 베푸사 그가 항상 참된 위대함의 단순성 참된 지혜의 솔직성 참된 힘의 고유성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때에는 제가 감히 말하겠나이다.\\\\\\\'내가 헛되이 살지는 않았노라\\\\\\\'고.

이런 기도문을 만들었던 맥아더는 직업상 나는 군인이다. 나는 내 직업이 군인이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훨씬 더 자랑스러운 것은 내가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군인은 건설하기 위해 파괴하지만 아버지는 건설하기만 한다.

군인은 파괴와 죽음의 현장에 있지만 아버지는 창조의 삶을 만들어 낸다.

주검의 무리는 강력하지만 삶의 부대는 더욱 강력하다.

내가 떠났을 때 내 아들이 전쟁터에서가 아니라 가정 안에서의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고 아들과 함께 소박한 기도를 매일 올렸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장군으로서의 맥아더도 훌륭하지만 아버지로서도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맥아더 보다 더욱 성경적인 아버지는 본문에 등장하는 어리석어 보이는 아버지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거룩한 낭비 곧 희생이 전제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서 기억될 아름다운 행동의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누구를 꼽을 수 있겠습니까? 마가복음 14장, 요한복음 12장에서 만날 수 있는 여인이 있습니다.

주님이 베다니 문둥이였던 시몬의 집에 계실 때였습니다. 식사를 기다리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다가와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머리에 부어 드렸습니다. 온 집안이 향유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안 식구들 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놀랐습니다. 이에 어느 사람이(가룟 유다) 이 정도의 향유라면 상당히 비싼 것일 텐데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더 좋은 일이 아니었겠느냐고 나무랐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기대된 예상과는 달리 그 여인의 행동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 마다 알려지고 높여지게 될 행동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막 14장) 주님도 그 향유가 비싼 것인지를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여인이 주님의 장례를 대비해서 미리 향유를 부어드린 것으로 이해하고 그 여인을 칭찬한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이 사건의 배경을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신 것을 감사하는 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새 생명 얻게 된 것을 감사하는 마리아는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무엇으로라도 자신의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던 그 여인은 값어치를 따지지 않고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본문의 비유의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의 헌신적 사랑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작은 아들이 요구하는 재산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관심은 오직 아들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돌아올 때 그 거리가 멀었지만 거지 몰골을 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 나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기뻐하며 잔치를 벌였던 것입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24절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고 기뻐하고 있고 27절에는 건강한 모습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유일한 관심은 아들 자신이요 그 생명이요 건강이었습니다.



이러한 희생적 사랑은 시력을 흐리게 합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잔잔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3:17)

그렇습니다. 이러한 헌신적 사랑이 있기에 저와 여러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을 어떠한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가장 귀한 생명,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내어 줌으로 하나님의 헌신적 사랑을 증언하셨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낭비와 희생적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이 더 이상 죄와 죽음, 어둠의 종노릇하지 않고 생명과 구원의 사람,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본문에 나타난 아버지의 사랑을 실천한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먼저는 다윗 왕입니다. 다윗 왕에게는 여러 아내를 통해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이복형제들 간에 여러 모양의 알력과 권력 암투도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서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은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을 합니다. 아들 때문에 천하의 용사 다윗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된 다윗은 주변의 용사를 3그룹으로 나누고 압살롬에 대진하는데 3 부대장들에게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삼하 18:5)

다윗 왕에게는 왕이라는 지위도, 쫓겨 다니는 자신의 입장도, 지도자로서의 체통이나 체면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다윗의 관심은 아들 압살롬이었습니다. 그래서 패역무도한 자, 불학무식한 X, 어미의 이름을 욕되게 하며 XX의 소생이라고 하지 않고 소년 압살롬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압살롬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반역자인 압살롬의 주검을 듣고 울기를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두 번째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보라 이제 세 번 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 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고후 12:14-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허비하는 거룩한 희생의 사랑을 체험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재물이나 세상의 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영혼을 위해, 구원을 위해 자신의 재물과 심지어 생명까지도 희생할 것을 결단하며 그 사랑으로 다가갈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눈물과 사도 바울의 결단을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 헌신적 사랑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간 이후 하루도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거지의 모습으로 다 잃어버린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만나기 전까지 먹어도, 잠자리에 들어도 아버지의 마음에 무슨 기쁨과 평안이 있었겠습니까?

주님은 본문의 비유를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소개하며 저와 여러분이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아픔에 함께 할 것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받고 있지만 너무나 자주 큰 아들의 심정으로 살고 있습니다. 마땅한 일을 의로 내세우며 비교하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본문의 큰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다.

그는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해서 잔치하는 아버지가 불만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잔치에 들어가지도 않고 버티고 섰습니다. 18절에 보면 자기를 부르러 나온 아버지에 동생은 아버지를 떠나갔지만 나는 아버지 곁에 있었고

동생은 자신의 뜻대로 살았지만 나는 아버지의 뜻대로 사느라고 했으며

동생은 세상 재미를 보았지만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 않았느냐며

못된 동생을 위해서는 잔치를 베풀고 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다고 불평했습니다.

큰 아들의 불만 중 가장 큰 불만이 30절에 나타납니다.

큰 아들은 동생에 대하여 말하기를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원문에서는 \\\\\\\"이 아들\\\\\\\"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큰 아들은 동생이 자신과의 관계가 이야기되는 것조차 싫었던 것입니다. 나를 안다고 하지 말고 나와 형제라고 하지마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버지는 32절에서 “이 네 동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큰 아들과 같은 마음을 가진 우리를 향한 주님의 다른 비유가 있습니다.

마 20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천국은 마치 품 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마 20:1)” 주인은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정하고 3시, 6시 9시 11시에 나가서 품 군을 불렀습니다. 일과를 마치고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품삯을 지급하기 시작했습니다. 11시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먼저 온 사람들이 좀더 받을 것을 기대했다가 한 데나리온을 받자 나중에 온 사람은 한 시간을 일했을 뿐이지만 우리는 하루 종일 더위 속에서 땀 흘린 우리와 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느냐고 불평했습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은 일거리 없어 놀고 있는 이들에게 몇 시에 왔던지 그 날의 품삯은 주어 그와 그의 가족이 하루를 살게 하려는 것이지만 먼저 온 사람들은 주인의 재물을 마치 자신의 재물처럼 자신의 입장과 관심에서 주인에게 불평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끝은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는 말씀에 주목하십시다.

주님은 주인이 가지고 있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지의 여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십시다.

과연 본문의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나는 마땅히 구원을 받아야 하지만 그 사람들은 구원과는 거리가 멀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제한 없는 사랑, 헌신적 사랑을 우리에게 증거 해 보여주셨습니다.

본문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는 아버지의 관심은 우리의 용모도 지식도 재물도 학식도 아니라 우리 자신이며 영혼의 구원입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모자란 자녀에게 더 큰 관심이 가듯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직 구원을 얻지 못한 이들에게 아버지의 희생적 사랑과 관심을 함께 가질 것을 원하시며 바울의 입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새생명 초청잔치를 통해 한 사람의 영혼을 주님의 잔치에 초청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자녀로서 마땅해 히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생명 초청잔치에 동참하심으로 성령의 구원 사역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