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해를 성령충만한 삶으로

이 한 해를, 성령충만한 삶으로!/눅3:15-17,22-22

이 한 해를, 성령충만한 삶으로!
눅3:15-17,22-22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주현절(1월 6일)후 첫 째 주일의 설교 본문은 누가복음 3장 15-17절, 21-22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개역 개정판’으로 읽겠습니다.



(15)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지난 6일 주현절이 지난 후 첫 번째의 주일입니다. 주현절(主顯)이란 ‘주께서 나타나셨다’는, 즉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성탄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주현절은 성탄절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그래서 주현절을 ‘빛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빛 되신 주께서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예배와 강단」은 태양력으로 새 해가 시작되는 1월부터 교회력으로 사순절이 시작되는 성회 수요일(금년은 2월 25일)전까지를 ‘새 해와 빛의 계절 주현절’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기간동안의 설교주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성육신 하신 예수그리스도가 주제가 되며, 특별히 태양력으로는 새해를 맞이하는 때이므로 우리들로 하여금 새 해의 새로운 생활과 빛의 생활을 하도록 설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현절 후 첫째주일의 설교본문이, 이미 우리가 읽은대로, 누가복음 3장 15-17절과 21-22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주제가 무엇입니까? 그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탄절 후 두 번의 주일들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처럼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인 오늘의 설교본문의 주제 역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본문에서 누가가 보도하는 예수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십니까? 누가는 그의 복음서 1-2장에서 이미 세례요한과 예수의 탄생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세례요한과 예수를 대비시켜 소개한 바 있으며, 특히 요한에 비해서 예수를 더욱 돋보이는 인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제 3장에서도 다시금 세례요한과 예수를 대비시켜 예수를 더욱 중요한 인물로 소개시키고 있습니다.

두 인물의 대비는 이러합니다. 요한도 예수처럼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나(3:7-14), 그는 다만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이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3:4)인데 비해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3:22)입니다. 또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는 자‘이지만, 예수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3:16)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분의 신들매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3:16)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3:7)고 하며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3:9)는 장래의 심판을 예고하는 ‘경고자’이지만, 예수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3:17) ‘심판자’입니다.

이렇게 누가가 세례요한과 예수를 대비시켜, 결국은 예수가 세례요한보다 ‘더 강하신 분’, ‘더 능력이 있으신 분’(3:16)으로 소개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요한이 당시 많은 유대 백성들로부터 ‘선지자’로 인정과 존경을 받고 있었으며, 더구나 요한이 유대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던 ‘그리스도’(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백성들의 마음 가운데 깊이 자리잡고 있었으므로(3:15,9:19),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전하려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으로 그렇습니다. 예수는 세례요한 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 더 강하시고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자이며, 종말의 때에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드리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심판자이시며, 예수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사랑하시고 기뻐하는 아들입니다.



오늘 새 해와 빛의 계절인 주현절의 첫 째 주일(새 해의 두 번째 주일)을 지키는 우리들에게,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새 해 첫 째 주일의 설교 제목) 이 땅에 구세주(그리스도, 메시야)로 오신 날, 그 성탄절의 기쁨과 감격이 아직도 남아 있는 새 해 벽두에,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하는 말씀이 설교본문으로 주어진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지난 주일(새 해 첫 째 주일)의 설교에서 말씀드린 바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분명히 인식하고 확실한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새 해를 시작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시 묻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에서 증언하고 있는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예수그리스도는 그 누구보다도 능력이 있는 분이시며,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자이십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는 심판자이시며 동시에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같은 예수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주인)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모시고 이 한 해를 살아가는 것은 우리들에게 큰 힘이 되며 능력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누구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기 떄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해, 새로운 해를 살아가면서 특별히 ‘이 한해를, 성령 충만한 삶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세례요한보다, 그 어떤 사람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의 주님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지배 하에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더 이상 내 마음대로, 내 고집대로, 내 뜻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주인이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성령의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성령의 생각을 따라 살아야하며,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생각을 따라 성령충만한 삶을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삶입니까?

여기에서 보렌(R.Bohren)교수의 ‘성령론적 사고’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보렌교수는 우리가 성령의 생각을 따라 성령론적 사고를 할 때, 이 시대를 올바르게 분별 할 수 있으며, 우리의 이웃이 당하는 고난에 동참할 수 있으며, 우리가 성령론적 사고를 할 수 있을 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다른 사람을 찬양하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일치하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형성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선교사들과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목회 하는 우리 사역 자들은 그 무엇보다, 그 어느 때보다 성령의 생각을 따라 성령론적 사고를 하며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지금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테러과 전쟁,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고 잇는 여러 가지의 ‘징조’를 보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별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같은 분별력을 ‘예언자적 감각’이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시대의 예언자로 부름받고 사역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시대와 역사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이 시대의 징조를 보면서 그 의미를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언자로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일입니다.



그 다음, 우리가 성령 충만한 삶을 산다는 것은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따라 생각하는 성령론적 사고는 우리의 이웃, 고통받고 있는 이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그들의 고통에 연대케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은 정치적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 전쟁으로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가고 고통 당하고 있는 이 지구 구석구석의 처참한 모습들, 가진 자들의 횡포에 속수무책인 가난한 사람들, 가난으로 병들고 영양실조에 걸려 죽어 가는 비참한 현실을 눈여겨보며, 그들의 고통에 아픈 마음으로 동참하며, 그들에게 희망과 생명과 삶의 용기를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생각을 따라 성령론적 사고를 하며 사는 자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모두 이 한 해를, 이렇게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해가 밝았습니다. 희망찬 한 해가 또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캄캄케 하고 어둡게 하는 일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존재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정치현실을 봐도 그렇고, 경제상황도 그렇고, 사회전반에 걸쳐서 얼마나 많은 비리와 부도덕한 일들, 강압과 폭력이 난무하여 뭇 사람들을 고통 가운데로 몰고 갈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같은 상황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성령의 생각을 따라,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는 그 고통의 자리에, 바로 그 곳에 우리가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한 해를, 성령충만한 삶으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존재양식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성령의 생각을 따라 성령충만한 삶으로 사는 것은,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시는 것을 힘써 지키는 삶입니다. 그것은 성령론적 사고는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찬양하는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찬양하는 사고는 홀로 있기를 원치않고 공동의 연대를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제각기 부르지 않고 함께 합심하여 부릅니다. 찬양하는 사고로서의 성령론적 사고는 상대방을 판단할 때 차별을 두지 않으며, 성령론적 사고는 자기자신을 절대 위치에 두지 않습니다. 또한 찬양하는 사고는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대화를 추구합니다. 성령론적인 사고로서 찬양하는 사고는 공동체의 일치단결을 추구하며, 자기를 낮추어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주하는 교향악에서 서로서로 협력하여 화음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론적 사고는 그 본질에 있어서 교향악적이며 합창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이같은 성령론적 사고로서 찬양하는 사고의 결핍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남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갈등과 분열을 야기 시키고 공동체를 해체시키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한 해를, 성령 충만한 삶으로’ 즉 성령론적 사고를 하면서, 이웃을 찬양하면서 일치와 단결을 이루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생각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같은 삶이야말로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이 한해를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성령 충만한 삶으로 살뿐만 아니라, 심판 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종말론적으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한 해를, 성령 충만한 삶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선교사역에 최선을 다할 수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