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된 것 마1:18-21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탄생하신 예수님의 은총이 교우님들 위에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보통 성탄절은 어린이들의 절기처럼 여겨집니다. 성탄절에 가장 흥분하는 것은 어린이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한 나이 많은 노인의 성탄절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2천여 년 전, 예루살렘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노인의 이름은 <시므온>이었습니다. 그는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분이었습니다. 그가 존경받는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간접 증거들이 있습니다. 어떤 전승에 의하면 그가 <가말리엘>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가말리엘은 당시 유대 사회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사도 바울도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우리는 시므온이 정말 가말리엘의 아버지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전승이 있음을 볼 때, 그가 존경받는 사람이었음은 확실합니다. 만약 그가 사람들의 멸시를 받았다면 그런 전승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도 그가 좋은 사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은 그를 가리켜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주변의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어두웠습니다. 그는 심각한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보기에는 그 정도로 성공하고 존경받는 사람이라면 부족한 게 없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므온은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없거나, 사람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고민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근심은 깊고 깊은 영적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늘 <무언가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불편했습니다. 마음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그는 평화의 도시라고 부리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지만, 평화는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이란 이름은 <평화의 기초>, 혹은 <평화의 소유>란 뜻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름만 평화의 도성이었습니다. 오히려 온갖 죄악과 음모가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경건을 가장한 가증한 종교 행위들, 겸손 속에 감춰지어진 교만들, 하나님 없는 성전, 사랑 없는 율법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간악하고 탐욕스러운 통치자인 헤롯왕이 있었습니다. 헤롯의 포악함과 탐욕은 로마 제국 안에 소문이 자자했는데, 사람들은 <헤롯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돼지로 태어나난 게 더 낫다>는 말이 생겼겠습니까? 곳곳에서 탄압 받는 이들의 비명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시므온은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습니다. 현실에 대한 실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는 마음은 더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그가 바라볼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었습니다. 그는 속히 메시아가 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의 유일한 위로는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성전에 나아가서 <어서 속히 메시아를 보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은 그의 이런 모습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이런 고뇌하는 시므온은 그 때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도 시므온이 많습니다.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 인생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사람들,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래지 못하는 많은 불쌍한 사람들, 삶에 지치고 실패한 사람들, 믿었던 이들에게 버림받은 사람들, 인격자가 아닌 기계 부속품처럼, 돈 버는 기계처럼 언제든지 미련 없이 버려도 좋을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아 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을 느끼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므온은 가난한 사람들 중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배우지 못한 이들 중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만 시므온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시므온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에 살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가슴을 안고 고민했듯이, 오늘날 인간적인 조건들을 두루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슬퍼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리하여 시므온들의 탄식 소리는 달동네에서만 들려오는 게 아니라. 화려한 대 저택에서도 들려옵니다. 만원 병실 한 구석의 간병인도 없는 침대 위에서만 신음 소리가 들리게 아니라, 잘 꾸며진 종합병원 특실에서도 애끓는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빈 지갑을 손에 쥔 남자의 눈에서만 눈물이 흐르는 게 아니라, 주머니 속에 두툼한 지갑이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술 한 잔을 앞에 놓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중에 시므온은 없습니까? 이 곳 부산 영도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모습에 대하여 충분히 감사하십니까? 오늘 부르심을 받아도 인생의 목적을 충분히 이루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저는 우리 모두 위로 받기를 원합니다. 채워지길 원합니다. 잘 살고 있다는 감격, 그래 이렇게 살다가 가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우리 안에 충만하길 바랍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모습을 따라 방황하는 게 아니라, 주관이 뚜렷한 우리의 삶을 살게 되길 원합니다. <왜 사느냐>고 묻거든, 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있는 알찬 삶을 원합니다.
시므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본래 시므온이란 이름은 <들으심>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시므온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가 성전에 갔을 때 마침 탄생하신 예수님을 안고 마리아와 요셉이 성전에 왔습니다. 아기를 보는 순간 시므온의 가슴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누가복음 2장 28절 이하를 보십시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예수님을 보는 순간, 그의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종을 놓아 주시는도다!> 그는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 순간은 시므온의 인생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신 순간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시므온은 마치 여인이 아기를 잉태하듯이, 예수님을 품고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가슴속에 모시게 되자, 모든 근심 걱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잉태한 사람, 즉 예수님을 인생의 주님으로 모시게 된 사람에게는 세상을 이기는 힘과 기쁨이 생깁니다.
<교도소국제연맹(Prison Fellowship International)>이란 기관의 총무로 있는 <론 닉켈>은 약 50여 개국의 교도소를 시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열악한 교도소는 아프리카 잠비아에 있었습니다. 너무 좁아 누울 자리가 없어 교대로 자야 하고, 화장실 시설도 없었습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그 곳을 방문했을 때 죄수들은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하면서 무려 80명의 수감자들이 4부 합창으로 여러 곡의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론 닉켈은 <이런 환경 속에서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운 찬송을 부를 수 있을까> 놀라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그런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까?> 수감자들은 닉켈 씨에게 자신들의 감방을 보여 주었는데, 그 벽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의 모습은 아프리카인처럼 검은 예수님이었는데, 얼굴은 깊은 시름으로 주름잡히고, 손은 극심한 노동으로 갈라 터져 있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수감자는 종신형을 받고 그 방에 수감되어 있다가 얼마 전에 죽었다고 했습니다. 수감자 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으니 고생을 해도 당연합니다. 조금 전에 찬양한 합창단 80명은 모두 교도소 목사님 덕분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우리를 이 곳으로 몰아넣은 욕심과 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저는 이런 놀라운 은총이 우리에게도 임하길 기원합니다. 2천년 전 예루살렘의 시므온에게 임한 은총이 한국 땅의 시므온으로 살아가는 우리 에게도 임하길 기원합니다. 아프리카 잠비아의 열악한 교도소 감방에 임하신 예수님의 은총이 욕망과 교만, 절망과 좌절이 가득한 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감방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영접하는 사람들의 영혼에 기쁨과 평화의 왕으로 임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시므온이 어떻게 예수님을 품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오늘 읽은 말씀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이 한 사람에게 잉태되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즉 예수님께서 한 사람에게 잉태되는 과정은 이렇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의 한 여인 마리아에게 잉태되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18절 끝을 보면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20절에서도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머무시는 축복된 삶, 즉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살 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은 오직 성령님 안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시므온을 보십시오. 시므온에게 예수님께서 임하시는 과정도 철저히 성령님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을 보면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의 죄악에 대하여 가슴 아파 하면서, 날마다 성전에 나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도 성령님의 감동 때문이었습니다. 26절을 보면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라고 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 속삭이셨습니다. <염려 마라! 내게 네게 메시아를 보게 해 주겠다! 네 소원을 이루어주겠다! 네 영혼에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을 주마!> 성령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탄생하신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셨을 때에 맞추어 성전에 가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의 감동이었습니다. 27절을 보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잉태하고, 모시고 살길 원한다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 안에서 생각하고, 성령님 안에서 마음을 열고, 성령님의 감동 안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성령님 안에서 눈이 열려야 합니다. 사람들을 보십시오. 성령님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은 구세주로 깨닫지 못합니다.
무엇이든지 보는 데 따라서 달라지는 법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독일군들은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무시했습니다. 짐승처럼 취급했고, 가스실에서 죽였습니다. 한 유대인 수용소에 난폭한 독일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남다른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몹쓸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군의관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일부에서 권했습니다. <여기 수용된 유대인들 중에 저명한 의사가 있다더라. 그에게 치료를 받으라!> 그러나 그는 거부했습니다. <더러운 유대인 놈에게 몸을 맡기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소리질렀습니다. 동료들이 유대인 의사를 데려왔습니다. 그 의사의 몰골은 초라했고, 제대로 먹지 못하여 파리하게 말라 있었습니다. 병든 병사는 악을 씁니다. <저런 놈에게 무슨 치료를 받는가?> 결국 이 고집 센 병사는 죽고 맙니다. 그의 눈에 보인 의사는 죽어야 할 유대인 중 한 명일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다른 독일군이 동일한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병사는 앞의 병사와 달랐습니다. 그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유대인 의사에게 자기 생명을 맡겼습니다. 의사는 그를 치료하면서 말합니다. <내 손에는 민족도, 국경도 없습니다. 단지 병든 불쌍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내게 맡기십시오. 나를 죄수로 보면 죄수요, 의사로 보면 의사입니다.> 결국 의사를 의사로 바라본 그 병사는 건강을 회복합니다.
여러분, 죄수로 보면 죄수요, 의사로 보면 의사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으로 보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인류의 선생님 정도로 보면 선생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이요,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자로 보면 그 분은 우리에게 구원자 주님이 되십니다. 이게 바로 <눈의 기적>입니다.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세상에 오셨을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들과 사두개인 등은 예수님을 초라한 나사렛의 시골뜨기 정도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배우지 못한 무식한 선생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후에는 죽여야 할 신성 모독자로 여겼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1913년에 태어난 <알베르 카뮈>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작 중에 <이방인>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 <뫼르소>는 경제적 무능력 때문에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양로원으로 달려갑니다. 하지만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기는커녕 졸립다느니, 덥다는 생각만을 합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마리라는 여자와 연애를 하고, 윗집에 사는 레이몽이라는 남자의 연애 문제에 관여합니다. 뫼르소의 삶에는 줄거리도 내용도 없습니다. 그는 <신을 생각하지 않는 수간, 비로소 해방감을 맛본다>고 외칩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에게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 소설을 쓴 카뮈의 영혼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인생의 허무함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는 이런 작품들로 1957년 겨우 44살의 나이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그 후 3년이 안 되어 교통사고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노벨상금으로 구입한 자동차는 그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의 소설 <이방인>이란 제목처럼 카뮈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이방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 나와서 손을 내밀었고, 그 분께 나와 울부짖었으며, 만져 주심을 원했고, 그 분의 손길을 기대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손을 내밀어 만지시고, 위로하시고,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구주로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 구주가 되셨고, 치료자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치료자가 되셨습니다.
눈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눈을 변화시켜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십니다. 이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성령님의 도우심을 얻으십시오. 믿어지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렇게 될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시고, 그 순간 진정한 성탄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가이드 포스트>지에 <패트 번즈> 목사님의 간증이 실렸습니다. 번즈 목사님의 교회는 침체되어 교인이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부활 주일인데도 적은 사람만이 모였습니다. 교인들이 돌아간 후 목사님은 현관 계단 위에 서서 감당하기 힘든 좌절감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 때 꽃을 파는 할머니가 계단으로 접근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늙은 데다가 허름한 옷을 걸쳐 정말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천사와 같았습니다. 목사님은 물었습니다.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걱정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군요.> <걱정이요? 목사님이 내 나이가 되어 보세요. 평생의 걱정을 모으면 트럭 백 대에 실어도 부족하답니다> <그런데도 즐거운 얼굴로 꽃을 팔러 다니시는데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저는 괴로울 때 예수님처럼 사흘을 기다립니다> <사흘이라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얼마나 고통이 심했습니까? 그렇지만 사흘 뒤에 부활의 아침이 오지 않았습니까? 무덤 속의 사흘은 기다리는 시간일 뿐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면 괴로울 것이 없죠.>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즉시 할머니의 꽃을 모두 사 든 채로 예배당에 들어가 사흘의 의미를 가르쳐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저도 사흘의 의미를 배우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안에 있으면 사흘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아니 삼십 년이라고 견디는 힘이 생깁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여러분 모두의 마음에 잉태되시길 기원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령님 안에서 됩니다. 기도하십시오. 한 주간 지난 월요일부터 송구영신 특별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온 가족의 새벽데이트가 되길 원합니다. 기도회의 주제는 <주님과 함께>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여러분의 삶이 복되게 펼쳐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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