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에 사로 잡혀 사는 사람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전9:1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
전9:1





지난 주 중에는 정말 멋진 한편의 드라마를 본 것 같습니다. 남북의 정상들이 만나 평화와 화해를 다짐하는 대화와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장면을 가슴 저린 전율로 보셨을 것입니다. 이런 화해의 장을 만들어낸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 노벨평화상 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는군요. 노벨평화상 하면 떠오르는 많은 역사의 인물 중에 인도에서 희생과 섬김의 삶을 살다간 마더 테레사님이 생각납니다.

노벨평화상과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탬플턴상을 받은 마더 테레사님이 자신의 품에서 죽은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했답니다. \\\"어느날 나는 하수구에 쳐 박혀 있던 한 남자를 건져냈습니다. 그의 몸에는 시궁창 냄새가 가득했고, 또 몸 여기 저기에는 벌레가 우글거렸습니다. 그 사람을 깨끗이 씻기는데 세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그는 내 품에서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평생을 거리에서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사랑받으며 관심 속에서 천사처럼 죽어가는군요.\\\' 그는 그렇게 죽었습니다.\\\" 인도 켈커타 빈민촌에서 소외되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렇게 멋지게 희생하며 사셨던 테레사님께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답니다.

\\\"테레사님은 어떻게 그리 훌륭한 삶을 사실 수가 있었습니까?\\\" 그 때 그녀는 짧막하게 대답했답니다.

\\\"저는 하나님 손에 들려진 몽땅 연필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몽땅 연필이라니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 몽땅 연필이 아주 인기가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새 연필이 귀하기도 했지만 몽땅 연필이 그렇게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쉬는 시간이 되면 교실 여기 저기서 몽땅 연필 따먹기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책상 위에 각자의 몽땅 연필을 놓아두고 손으로 이렇게 탁 쳐서 책상 밖으로 떨어지면 상대방이 그 몽땅 연필을 차지하게 되는거죠.

몽땅 연필은 이제 조금만 더 쓰면 자기의 생명을 다하는 겁니다. 볼펜 껍질 같은 것에다 몽땅 연필을 끼워서 마지막까지 썼던 기억이 나는데 우리 인생도 몽땅 연필 같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처음에는 쓰지도 않은 새 연필 같이 깨끗하고 멋도 있었으나 점점 쓰고 또 써서 결국 몽땅 연필이 되고 다 쓰면 버려지는 거죠.

어린 시절 제 가방 속에 그렇게 가득 들어있던 몽땅 연필 중에서 단 한 개도 제게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몽땅 연필은 때가되면 더 이상 쓰이지 않습니다. 닳아 없어지고, 깎기고 깎여 결국 없어집니다.

제가 요즘 책을 읽을 때 글자가 어른어른 거리고 글을 읽는데 좀 불편하더라구요. 눈이 더 나빠졌나? 라는 생각에 안경 돗수를 새로 맞춰 끼려고 우리 교인이 운영하고 있는 안경점엘 갔습니다.

검사를 해 보고 하는 말이 \\\"목사님 눈이 가까이 있는 것을 볼 때와 먼 곳을 볼 때 눈의 도수가 차이가 많이 나시니까 책을 보실 때 쓰는 안경을 새로 하셔야 겠습니다. 젊으셨을 때는 멀리 보는거나 가까이 보는거나 별 불편이 없으셨는데 이젠 가까이 있는 것을 보실 때는 이 도수로 보시면 어른거릴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아십니까? 저보다 연세 드신 분들은 용서하고 들으십시오. \\\"아하! 내가 이제 늙었다는 말이구나\\\" 이렇게 우리 몸도 쓸 만큼 쓰면 닳아서 몽땅 연필 같이 될 날이 곧 옵니다.

여기 그림이 한 장 있습니다. 제 얼굴이죠. 이 그림을 누가 그렸는 줄 아세요? 제가 언젠가 조금 피곤할 때 잠시 쉬면서 그림을 한 장 그렸습니다. 스스로에게 \\\"넌 누구냐?\\\" 라는 질문을 던지며 주제 파악을 좀 해 보려고 제 얼굴을 그린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자화상이죠. 한번 보세요. 제법 그럴듯해 보이지 않습니까?

진짜 제가 그렸나구요? 네, 정말 제가 그렸습니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이 보면 형편없어 보일테지만 그림을 전공한 사람이 아닌데 이 정도 그렸으면 제법 그린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그림을 뭘로 그렸느냐 하면 바로 이 연필로 그렸습니다. 제가 연필이 없이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이 연필이 내가 그렸다 그럽니까? 아닙니다. 이 연필이 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신목사가 그렸습니다. 연필은 그저 제 손에 들려 도구로 쓰였을 뿐이죠. 몽땅 연필이 자기 몸이 닳아지면서 이 그림이 완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연필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이 연필을 손에 잡고 그림을 그린 것은 접니다.

테레사님이 한 말이 바로 이런 말입니다. 일생을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적으로 살았어요. 그러나 그 삶에 대한 칭찬은 자신이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손에 잡고 사랑의 실천이라는 삶의 그림을 그리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거죠. 자신은 다만 하나님의 손에 들린 몽땅 연필이었을 뿐이라는 겁니다. 얼마나 멋진 표현입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했다고 착각합니다. 제가 우리 교회 목사로 부임한지 이제 3달만 있으면 3년이 됩니다. 처음 교회에 부임할 때 보다 교회가 많이 성장했습니다.

주변의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 그리고 우리 교인들 중에도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신목사님 열심히 목회 잘하셔서 대광교회가 많이 부흥하고 성장했습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저는 솔직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찔해집니다. 혹시라도 제게 그런 마음이 들까 두려운 마음도 듭니다. 제가 뭘 했습니까?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겸손한 척하느라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몽땅 연필일 뿐입니다. 교회를 부흥시키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이 부족한 저를 도와서 얼마나 열심히 지난 몇 년간 봉사하며 희생하며 교회를 섬겼습니까? 그렇다고 여러분이 이 교회를 성장 시켰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들린 몽땅 연필일 뿐 교회를 부흥케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책에 귀한 깨달음을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만 대충 이런 이야기입니다. 어느 마을 김대감님 집에 밤 사이에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그런데 김대감이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마당에 눈이 하나도 없이 깨끗이 치워져 있습니다. \\\"하하.. 누가 마당의 눈을 깨끗하게 잘도 쓸었구나. 누가 쓸었느냐?\\\" 그랬더니 마당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던 싸리 빗자루가 대답을 합니다. \\\"제가 쓸었습니다.\\\" \\\"정말 네가 쓸었느냐?\\\" \\\"그럼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차디 찬 눈을 제가 온 몸으로 덜덜 떨면서 쓸었습니다.\\\"

김대감이 다시 물어 봅니다. \\\"그래? 정말 네가 쓸었느냐?\\\" \\\"네 제가 쓸었다니까요. 저를 보세요. 다 젖었지 않습니까? 제 몸이 이렇게 휘어지고 꽁꽁 얼어가며 쓸었습니다.\\\"

중요한 건 삼세번 이랬다고. 세 번째 다시 물어봅니다. \\\"그래 정말 네가 쓸었단 말이지.\\\" 그러자 빗자루가 고개를 푹 숙이며 하는 말이 \\\"사실은 대감님 댁 머슴인 신서방이 쓸었습니다.\\\"

맞아요. 그렇게 말해야 맞는 겁니다. 빗자루는 단지 도구로 머슴인 신서방의 손에 들려서 쓰였을 뿐이지. 마당의 눈을 쓴 것은 신서방이었습니다. 도깨비 빗자루도 아닌 것이 자기가 눈을 쓸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손에 들려 도구로 쓰였을 뿐입니다.

교회의 성장은 우리가 한 것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손에 들린 연장 일 뿐입니다.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이라도 너 이제 다 썼다 하시면 다 쓴 몽땅 연필 처럼, 다 닿아 없어진 싸리 빗자루처럼 역사의 자리에서 사라지는 거죠.

신목사나 여기 앉으신 장로님들이나 권사님들이나 집사님들이나 교사나 성가대원들이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러기에 성 프란시스는 이렇게 기도했지 않습니까?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도구로 쓰임 받을 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교회에서 교회를 멋지게 지어 놓고 시험에 들었어요. 어느 분이 헌금을 많이 해서 교회를 지었나 봅니다. \\\"이 교회는 내가 지었다.\\\" 맞습니까? 누가 했다구요? 내가 헌금해서 했다구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내의 건강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이 그리고 많이 생각한 것이 뭔 줄 아십니까? \\\"정말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내게 건강 주시고, 지혜 주시고, 좋은 부모님 주시고, 아내를 주시고, 자녀 주시고, 사랑하는 가족을 주시고, 섬길 수 있는 교회를 주시고, 필요한 물질 주시고, 재능을 주시고....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니 모두 하나님께 받은 것 뿐이더라구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큼만 하는 겁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하나님께서 안 주시면 그만입니다.

그러면서 과연 난 하나님께 어떤 도구로 쓰여야 하나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대광교회를 섬기는 제가 어떤 목사가 되어야겠습니까? 두가지 경우를 이야기 해 볼께요.

첫째는 무슨 일을 할 때든지 \\\"야! 이거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잘 해 보려 하는 목사.

둘째는 무슨 일을 할 때든지 \\\"하나님 제가 이걸 어찌 합니까? 하나님 어찌할까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여쭤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목사.

이 둘 중 어떤 목사가 되야겠습니까?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나잘난 목사\\\"와 \\\"나못난 목사\\\" 이 둘 중에 누가 우리 교회에 필요한 목사이겠느냐는 말입니다. 사실 이건 물어보나 마나죠. 생각해 보나 마나입니다. 제 잘난 맛에 사는 목사가 아니라 나는 못났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임 받을 수 있는 도구로 쓰이게 해 달라는 목사가 하나님의 교회에 필요한 것 아닙니까? 이제 아시겠어요? 우리 교회가 잘 되려면 제가 잘난 목사가 아니라 못난 목사가 되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저를 위해 기도할 때 잘난 목사 되지 말고 못난 목사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제가 좀 모자란데가 있어야 여러분들이 더 많이 기도해 주실 것 아닙니까? 내가 부족해야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목사가 될 것 아닙니까?

뇌출혈로 누워 있던 아내가 검사를 위해 뇌혈관 사진을 찍는데 다리에 있는 동맥에 뭘 넣어서 혈관을 타고 심장을 거쳐 뇌에 까지 가서는 속속들이 이상이 있는가 사진을 찍고 검사를 하더군요. 심혈관 조영술이라고 하던가요? 정확하게 그 검사법 이름이 생각나진 않습니다만 참 대단하죠? 얼마나 의료 장비와 기술들이 좋은지요. 정말 놀랐습니다. 대단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지금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게 아니예요.

중환자실에 몇 일 있는 동안에 신경외과 중환자실에서 만도 두 명이나 영안실로 가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의사 선생님들이라 해도, 아무리 좋은 최첨단 의료장비와 기술이라고 해도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생명의 문제더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 아내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수술하지 않고도 치료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어떤 후유증도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새벽마다 환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신 여러분들의 믿음과 헌신의 기도가 고통과 질병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치유의 역사를 이루어 주실 줄을 믿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로 이렇게 기도하게 하실까? 라는 생각을 하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이제 후반기면 우리 교회에서는 직분자를 뽑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을 하나님의 일군으로 선출해야 합니까? 잘난 분이요? 아니면 못난 분이요. 잘나고 못나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잘나도 하나님께서 손에 들고 사용하지 않으시면 그 잘난 것 아무 소용없습니다.

어떤 장로님이 교회에 필요하겠습니까? 자기 생각과 자기 방법으로 뭘 하려는 잘난 장로님과 \\\"하나님 어찌해야 합니까?\\\" 라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모든 걸 다 내어 맡기는 못난 장로 중 누가 주님의 교회에 필요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에 잘난 장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못난 장로가 필요합니다. 잘난 권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못난 권사가 필요합니다. 자기 잘 났다고 큰소리 치고 요란 떠는 집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께 머리 숙여 하나님 어찌하면 좋습니까? 라고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모든 걸 내어 맞기는 못나디 못난 집사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잘난 성도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잘났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문제입니다. 못난 성도 되십시오.

바울 보세요. 스스로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팔푼이라는 거죠. \\\"죄인 중에 괴수\\\"라 했습니다. 이건 무슨 말입니까? 가장 극악한 죄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입니까? 몸도 약하디 약하고 큰 고통의 질병이 가지고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못나디 못난 자신의 모습 때문에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 보십시오.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진정 성령에 사로 잡혀 사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약한 점이 곧 감사의 조건이 됩니다. 그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크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13:4에서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어떻게 강하게 만드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 처럼 보였던 약하디 약한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도 그 능력의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도 성령님이 아니고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보십시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 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의인이 필요한 것 아닙니다. 지혜자가 필요한 것 아닙니다. 의인이든 죄인이든 지혜자든 미련한 자든 문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바로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 나를 주님의 도구로 써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