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 안에서 사는 삶 롬14:13-23 로마 교회 안에는 식물 문제에 대한 오해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이방인들이 주를 이루는 교회이지만 유대인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구약 시대부터 음식에 대해서 까다로운 규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 율법에 어떤 음식은 먹어도 되지만 어떤 음식은 먹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엄격하게 규정 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 가운데도 어떤 사람은 그 규정을 고수하는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모세 율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 간에 약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약한 자와 강한 자는 육신적으로 약한 자와 강한 자가 아니라 신앙적으로 약한 자와 강한 자를 말 합니다. 유대인 신자들 가운데서 식물을 가려서 먹는 사람은 약한 자 그룹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자기들이 몸담아 왔던 유대인 전통이나 습관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먹는 식물 가운데 정한 것이 있고, 깨끗한 것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진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시 대를 거쳐오면서 자신의 생각을 바꾸신 것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생각하셨으면 절대로 변경하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을 세우셨으면 절대로 변경해서는 안 되는 분이라고 생각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자기의 계획에 의해 조종당하는 하나의 로보트가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생각이나 계획을 세우고 얼마든지 그 생각과 계획을 바꾸실 수 있는 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역사 속에서 어떤 음식은 먹어도 괜찮고, 어떤 음식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 시대의 율법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판단하셔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하시다면 그 율법을 없앨 수도 있고, 그 율법의 규정을 변경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요, 천지의 주재시요,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마음대 로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일관성이 없이 1분 간격으로 계획을 변경하시고, 생각을 뒤집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믿고,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피조물 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어떤 계획은 바꾸시고, 어떤 계획은 바꾸지 말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습니까? 있다면 우리는 피조물이 아니고, 창조주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주권자이시니 까 얼마든지 자신이 생각하고 계획하신 것을 바꾸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계획, 모든 생각을 일관성 없이 수시로 변경하시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십니다.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생각을 하실 수 있고, 또 생각한 것을 변경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음식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이 생각을 바꾸셨다 면 그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도 생각을 바꾸어야 그것이 신앙적인 태도요, 하나님을 존경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생각을 바꾸셨는데 유대인들은 생각을 바꾸지 않고 자기들의 생각을 고집하 고 있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해야 합니까? 넌센스입니다. 유대인은 엄청난 넌센스를 범하고 있 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은 생각을 벌써 바꾸셨는데 자기들은 기존의 생각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집이죠, 완고함이지요. 유아적인 태도이지요. 하나님의 생각을 무겁고 중하게 생각 하기보다 자기들의 생각을 더 비중있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음식 문제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나?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생각을 바꾸신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도 기꺼이 생각 을 바꾸려고 생각합니까? 생각은 바꾸었는데 행동은 아직 바꾸지 못하고 있습니까? 생각을 바 꾸었으면 행동도 바꾸어야 합니다. 생각만 바꾸고 행동은 바꾸지 않았다면 그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율법은 원래 하나님의 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으로서의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 법의 내용을 개정하셔서 어떤 음식이든지 먹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어떤 것이든지 먹어도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기존에 있던 율법은 더 이상 하나님의 법으로서의 율법은 아닙니다. 무슨 법이든지 그것이 개정되었으면 새 로운 법만 지키면 되지 옛날 법은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법이 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생각을 고집한 채 옛날 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율법은 더 이상 하나님의 법으로서의 율법이 아니라 그것은 그냥 인간의 법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법이 아니라 인간이 옳다고 고집하는 법이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인간의 법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법이 되어버린 법을 지키려고 하는 태도를 우리 는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바꾸신 것은 과감하게 바꾸는 것이 신앙이고, 하나님이 바꾸지 않은 것은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신앙적인 문제에 부딪히든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셔서 율법주의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로마 교회 안에서는 식물 문제에 대해서 연약한 자가 있었고, 강한 자가 있었지만 교회 안에 서 약한 자와 강한 자 사이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는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 쯤 감당치 못하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려면 내가 희생을 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믿음을 약하다고 생각합니까? 강하다고 생각합니까? 사람은 항상 약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해질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강하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 강함을 가지고 남을 도와주는 쪽으로 사용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도와주고 싶어하기 보다 괴롭히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범죄 타락하기 전에는 괴롭히는 것보다 도와주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타락 후에는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오랜 습관이 되기도 했고, 뿌리가 깊다 보니까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기는 쉬워도 약한 자의 약점을 받아주기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강한 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약 한 자의 약점을 받아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연약한 자를 받아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 안에서 진리 문제도 아닌 식물 문제를 가지고 형제를 업신여기는 신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고까지 강경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 밖에서나 안에서나 강한 자들의 횡포가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질려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특별히 \\\"성령님 안에서\\\" 라는 말을 단서 조항으로 달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어떻게 아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가 결정됩니다. 성령님에 대한 이해 의 수준만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의 수준도 결정됩니다.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고 그리스 도를 바로 이해해야만 성령님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사역을 마무리짓기 위해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원역사를 우리 개인에게 적용하기 위해서 날마다 우리를 감동하시는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를 이루고, 평화를 이루고, 기쁨을 이루려면 성령님 안에서만 가능합 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은 성령 하나님만이 이룰 수 있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의와 평강과 희락은 성령님의 감동을 받을 때 가능하다는 말씀이고, 성령님의 생각을 따라갈 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할 때에는 결단코 의와 평강과 기쁨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 님의 감동 없이 스스로 생각할 때에는 먹고 마시는 것을 생각하는 수준을 넘지 못 합니다. 또 서로를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본문에는 스스로 생각하는 부류와 성령 안에서 생각하는 부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성령 안에 있지 않고, 성령 밖으로 나갈 때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밖에는 생각할 줄 모르는 그런 존재입니다. 성령 안에 머물고, 성령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의로운 것을 생각하고, 바른 관계를 생각합니다. 성령님이 어떤 분입니까?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오신 분이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오신 분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 해 오셨고,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잘 섬 기도록 우리를 도우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성령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잘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잘 섬기는 분은 결과적으로 형제 자매들을 잘 섬길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하신 사역이 어떤 사역입니까? 화평케 하는 일이요, 구원하는 일이요, 관계를 회복시키는 일이요, 섬기는 일이요, 용납하는 일 이요, 용서하는 일이요, 사랑하는 일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그 일을 바로 우 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이루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그리스도인은 의를 이루어내고, 평강을 이루어 내고, 희락을 이루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 안에 있다고 하면서 또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다고 말하면서 의를 이루어내지 못 하고, 평강을 이루어내지 못 하고, 희락을 이루어내지 못 한다면 그 사람은 성령 안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문 18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 은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잘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잘 섬길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제대로 알고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의와 평강과 희락을 도모할 수밖에 없게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성령님의 인도나 감동을 받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살게 되어 있습니까? 의를 이루지 못하고, 평강을 이루지 못 하고, 희락을 이루어내지 못 합니다. 성령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주변 관계들은 엉망이고, 그 사람 안에는 평강이 없고, 희락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 스스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자기 스스로 깨끗지 않다고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옳다고 생각합니다. 성령 안에 있지 않는 사람, 성령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매사를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 행동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기준이 되어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전혀 하나님의 주되심이 없는 삶입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주가 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성령 안에 거하지 아니 하면 깨끗한 것도 더럽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옳다고 하지 않았음에 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스스로 옳다 생각하고, 다른 것은 더럽다 생각하니까 자연히 연약한 자를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형제 앞에 거칠 것과 부딪힐 것을 두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만 생각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 생각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판단을 받고 책망을 받아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깨끗하다 더럽다를 판단하는 기준이 누구여야 합니까?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또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는 기준이 누구여야 합니까? 하나님이어야 합 니다. 성령님과 예수님과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당한 판단이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할 때 가능합니다. 성령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 있고, 자기가 생각의 기준이 되어 있고, 자기가 섬김의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 더럽다고 생각했다가, 또 자기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스 스로 옳다고 생각했다가, 또 자기 스스로 그르다 생각합니다. 변덕이 죽끓듯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준이 이렇게 자주 바뀌어서야 사람이 어떻게 일관성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일관성이 없이 자주 변하니까 어떻게 관계 안에서 의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의를 이루지 못하니 평화와 기쁨은 당연히 남의 일이 되고 맙니다. 자기 안에 평강과 기쁨이 없으니 맨날 연약한 사람 괴롭히는 일이나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22절에서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 하는 자가 복이 있다\\\" 고 말씀 합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어떤 성도가 어떤 식물을 먹든지 간에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못한다고 생각하고 믿음으로 먹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자꾸만 그렇게 하는 것은 더러운 행동이고, 옳지 못한 행동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말에 흔들려 가지고 자기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 바를 끝까지 붙들지 못 하고, 순 간적으로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이런 일은 우리도 자주 범할 수 있는 잘못입니다. 성령 안에 거하지 아니 하면 옆에서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준이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기준이 다른 사람이어서도 안 됩니다. 기준은 오로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정하다 하신 것은 끝까지 정한 것이고, 삼위 하나님이 옳다 하신 것 은 끝까지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일관성이 있으니까 얼마든지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22절에서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옳다 하신 바를 변함 없는 기준으로 삼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않게 됩니다. 그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책망을 받아도 하나님에게 받아야지 사람에게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옳다 생각하면 자기보다 연약한 사람을 정죄하게 되고, 나중에는 다른 사람의 옳다함에 밀려 자기 자신까지 정죄하는 자리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옳다 생각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옳다 하심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그르다 하심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옳다함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할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결재를 받은 후에 말하고 행 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고, 자기 자신도 실족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생각을 믿고, 하나님의 판단을 믿는 믿음으로 행하는 삶이야말로 복 있는 삶이요, 그러한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삶은 바로 범죄하는 삶입니다. 어떤 문제든지 우리가 왜 의심하게 됩니까? 하나님을 옳다 그르다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란 것은 참으로 요상합니다. 그토록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생각이 어느 날 갑자기 변합니다. 옛날에는 된장국은 죽어도 먹기 싫어서 안 먹었는데 나이 40 고개를 넘으면서 된장국이 좋아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옛날 어릴 적에 가지 나물이나 멍텅구리 물 메기 국은 죽어도 못 먹을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이 그렇게 입에 당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람의 생각이 바뀌는 것이 어디 그것 뿐이겠나? 칼 같이 엄격하고 칼 같이 닥달을 하던 사람 이 어느 날 갑자기 \\\"뭐 그렇게 피곤하게 살 필요가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면서 푸근한 사람 으로 바뀌는 경우도 허다히 있습니다. 이런 것이 사람인데 어떻게 사람이 기준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있는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도 피곤하고, 다른 사람도 피곤합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이 기준이 되어 있는 사람은 언제나 기쁜 얼굴을 하고, 평화로운 얼굴을 하 면서 좋은 관계를 이루어냅니다. 의를 이루어내는 사람은 성령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 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며, 성령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의를 이루어 내고, 평화를 이루어 내고, 기쁨을 이루어 내는 일이 어디 먹고 마시는 문제에만 한정되는 일이겠습니까? 먹고 마시는 일은 자기 육신을 위하고, 육신을 섬기는 일이니까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일이 어디 먹고 마시는 문제뿐이겠습니까? 로마 교회 안에서는 먹 고 마시는 문제가 자기를 위하는 대표적인 문제로 부각되었을 뿐이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문제가 말썽의 소지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나 우리 교회 안에서는 어떤 문제가 로마 교회처럼 자기를 위하는 것으로 대두되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옳다 생각하면서 스스로 정죄하거나 남들을 정죄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비밀은 자기 자신의 기준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 대해서 하 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곰곰이 묵상해 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옳다고 생각하시는 바를 믿음으로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그 믿음에서 추호도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거하는 삶입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만들어 내고야 맙니다. 여러분! 교회 생활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무엇인 줄 아세요? 21절입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 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 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정말 아름다운 일입니다. 형제에게 걸림돌이 되겠다 싶으면 하 지 않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어떤 형제가 거리끼게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형제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와 보이겠습니 까? 교회 안에서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 하는 지체일지라도 그 지체를 거리끼게 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면 그런 교회야말로 아름다운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철저히 이기적인 마음이 제거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런 아름다운 일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자기의 유익을 너무나 민감하게 좇는 세상이 되다 보니 교회 안에서 마저 형제의 유익보다 자기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가 될려면 무엇보다도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화평의 일을 힘쓰지 않고, 서로 덕을 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20절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집니다. 우리가 누구관대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뜨리며, 우리가 누구관대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역사를 파괴시킨단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성령 안에 거 하지 아니 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 거하지 아니 하면 사람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게 되어 있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면 자기 의에 빠지게 되어 있고, 자기 자신의 유익을 챙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저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화평은 깨어지고, 기쁨도 깨어지고, 결국은 의를 이루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최선의 힘을 다 써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 안에서 아름다운 일을 만들지 못 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세상에서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저는 바울에게서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바울은 온갖 것을 다 할 수 있 는 자유의 경지를 이미 터득하신 분입니다. 바울이 고기를 먹을 권리가 없겠습니까? 포도주를 마실 권리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형제를 거리끼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평생에 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는 모습입니다. 성령 안에 거하는 삶을 살면 얼마든지 스스 로 누릴 수 있는 자유도 형제를 위해서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의 신앙 생활이나 교회 생활 속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바로 다른 형제에게 거리끼게 한 일이 있었다면 오늘 이 시간 회개하시고, 오늘 이후로 그런 아름답지 못한 삶은 거부하기로 결정하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좋은 나라입니까? 일단 하나님은 사람처럼 변통을 부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한번도 서로 판단하거나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서로를 정죄하신 적 이 없습니다. 삼위 하나님 사이에는 언제나 의가 있었고, 평강이 있었고, 희락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분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고,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보다 더 행복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사람 사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몹쓸 짓을 당하든지 이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이상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깊이 닮아갈려고 힘쓰다 보면 우리도 삼위 하나님처럼 서로를 향해 의를 이룰 수 있고, 평강을 이룰 수 있고, 희락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아 름다움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습니까? 성령 안에 거하는 삶을 살기로 결정을 하십시다. 나의 옳다 하는 바로 살지 않기로 결정하십시다. 중심 없이, 일관성 없이 흔들리는 삶을 더 이상 살지 않기로 결정을 하십시다. 오직 하나님을 여러분의 기준으로 삼고, 그리스도를 섬기고, 성령 안에 거하는 삶을 사심으로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의와 평강과 희락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되기를 바랍니 다. 결단과 촉구/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많이 저지르는 악이 있다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잘못하는 것이 있다면 연약한 지체를 실족하게 하는 것일 것입니다. 믿음을 좇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좇고 성령님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참 악합니다. 식물 문제와 같은 사소한 문제로도 형제를 망하게 할 수 있을 만큼 인간 은 악합니다. 나 자신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형제를 실족케 하지 않습니다. 항상 자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 때 형제를 실족케 합니다. 스스로 옳다 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정죄하는 삶을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언젠가는 그것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서 식물 문제나 다른 문제로 형제를 근심하게 한 것이 있는지 돌아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기까지 하신 존귀한 형제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형제를 세워주기로 결정하십시다.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고 사람에도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것을 목표로 정하고 그리스도를 잘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정하십시다. 식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망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일평생 범하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성 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는 삶을 살기로 작정을 하고 주님께서 그 마음과 결심을 붙잡아 달라고 기도 드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