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을 받아야 하는 이유 4가지 행19:1-7 중동 지방의 어떤 나라에서는 왕비를 선택한 후 3년 동안 왕과 같은 침실에 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왕비의 행실을 관찰한다고 합니다. 이 3년이란 왕비가 과연 일국의 어머니로서 합당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또 왕비로서 합당한 그릇이 되도록 만드는 기간입니다. 이 삼 년의 기간이 지난 후에 일국의 어머니로서 충분한 행실을 가지고 있고 왕비로서의 그릇이 된다고 판단될 때에야 비로소 왕의 침실에 들여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 왕비는 왕의 영광을 똑같이 누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주적이고도 놀라운 그의 영광을 나누어주시려고 할 때 우리들에게 그릇을 예비하라고 하십니다. 부모들이 어린 자녀들에게 맛있는 것을 주고자 할 때 그들의 손이 깨끗이 되어 있기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부모들은 밖에서 놀다가 더러워진 자녀의 손을 보고 말합니다. \\\'가서 손을 씻고 오너라.\\\' 만족의 기쁨이 있기 위해서는 씻음의 행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태초에 인간은 놀라운 존재였습니다. 흠 없고 티없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더러운 죄가 인간들에게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상태를 성경 로마서 3장 23절은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노라.\\\'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겨 버렸던 것입니다. 사람이 죄악에 빠지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 못할 때 최후로 미워하는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이 자신에 대한 미움이 심해지면 자살까지 하게 됩니다. 또한 죄악 중에 있어도 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절망이 거듭됩니다. 절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절망의 결과는 바로 죽음입니다. 철학자 키에르 케골은 말했습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실로 죄악 중에 빠진 인간의 심령은 죽은 사람처럼 차갑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최고의 선물 두 가지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시고 또 하나는 보혜사 성령님 이십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들의 구원을 이루어 주셨고 성령을 통해 우리들의 얼룩진 심령을 지금도 씻으십니다. 너무도 차가와 겨울날 얼어붙은 땅처럼 되어버린 우리의 마음을 성령의 부드러움이 살살 녹일 때 우리들은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나는 얼마나 위선자였던가! 나는 얼마나 이기주의자였던가! 나는 얼마나 참혹한 죄인이었던가!\\\' 그러나 이 깨달음은 결코 절망이 아닙니다. 오히려 희망이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올 때 우리들에게 있는 양심은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이 눈물은 죄악된 생활을 변화시키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사막에 물을 주면 꽃이 피지만 옥토일지라도 비가 내리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에 성령의 단비가 부어지지 아니하면 우리의 심령은 금방 시들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몇 번이나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야 할 것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을 받으십시오. 신앙생활의 원동력은 성령 충만에 있습니다. 본문 2절을 한번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뭐라고 질문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학문이 심오하고 성경에 능한 아볼로를 통해 여러가지 주의 도를 가르침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성령을 받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고자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질문했던 것입니다. 왜 우리들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이 시간에는 구체적인 이유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들은 영적 자유함과 내적 평안함을 얻기 위해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또한 이사야서 35장 15절에서 17절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으리니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예수를 모르고 성령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인생에게는 4가지의 불안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이요, 둘째는 인생들에게 날마다 다가오는 죄책감에 대한 불안이요, 셋째는 자기존재의 의미상실에 대한 불안이요, 넷째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자칭 대단하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삶의 현장에서 수시로 다가오는 이러한 불안을 극복하고 그로부터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하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전술한 4가지 불안 중 어느 한가지에서도 자유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은 인생들에게 인과응보적 마음을 갖게 합니다. 즉 인생들이 지금 어떤 행위를 하면 지금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꼭 있을 것 같기만 한 어떤 미지의 세계에서 우리의 행위에 마땅한 보응을 받게 되리라는 생각입니다. 그 때문에 인생들은 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죄를 짓지 말아야 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려고 하기도 하고 참기 힘든 정욕을 참아도 봅니다. 그러나 수시로 마음 및 인생의 죄는 노력한 보람도 없이 어김없이 인생들에게 다가오고 그로인해서 인생들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 죄책감으로 인해 인생들의 불안은 점점 심해지고 이 불안감을 벗어나고자 스스로를 학대합니다. 가슴을 치기도 하고, \\\'야! 정신차려!\\\' 하면서 스스로 뺨도 때려 보고 머리를 아예 깎아버려서 자신을 세상과 격리하기도 하고 실컷 울어도 봅니다. 그러나 죄책감은 없어지지 않고 심령에 괴로움만 더해갑니다. 심령의 자유함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이 괴로움과 번민을 벗어나고자 결국 자기 자신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세상 술에 취해버리는 방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자 합니다. 술, 담배, 약품, 돈과 같은 육신적 술뿐만 아니라 지식추구, 명예추구, 헛된 종교추구 등의 정신적 술에 자기의 모습을 감추어버립니다. 즉 완전히 영적으로 사망한 마른땅과 같은 심령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사람으로부터 영적 자유함과 평안함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위에서부터 성령이 부어질 때 광야와 같은 심령도 아름다운 밭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수많은 열매 맺는 무수한 나무가 있는 울창한 삼림과 같은 심령이 된다고 이사야서 32장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아름다운 밭이 될 때 그 심령은 의롭다고 칭함을 받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영적 자유함과 내적 평안함을 소유하게 됩니다. 지금 삶이 어수선한 분이 계십니까? 무언지 모르겠지만 앞길이 캄캄한 분이 계십니까?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분이 계십니까? 성령을 받으십시오. 성령님을 마음속에 모실 때 모든 문제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할 이유는 큰 비전과 이상을 가지고 소망 중에 전진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 요엘 2장 28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 즉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남녀노소 가림 없이 활기찬 생이 설계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꿈을 잃고 절망에 빠진 모습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이 있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성경 시편 81편에는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어떤 우울증에 걸린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노만 빈센트 필 목사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골치가 아파 죽겠습니다. 제발 제게 문제가 없는 곳을 가르쳐 주십시요.\\\' 그러자 필 목사님이 청년에게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저 브롱스에 있는 공동묘지에 가보게. 거기는 문제가 없을 것이네.\\\' 우리는 소극적 사고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문제가 와서 인생들을 흔들지라도 이상 중에 전진하는 자는 최종승리가 보장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성령충만으로 꿈꾸는 자가 되십시오. 연약한 우리일지라도 꿈꾸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이 마지막 세대에 엄청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놀라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지만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꿈의 사람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절망적인 무수한 난관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중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어두운 과거에 매달리는 일이 없습니다. 오직 앞의 푯대를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주는 마음의 담대함으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쫓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잃는 순간을 당해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은 처음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킬리만자로는 높이 1만 9천 710피트가 되는 눈 덮힌 산으로서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고 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계속되다가 이러한 대목이 나옵니다. \\\'그 서쪽 정상 가까운 곳에 말라빠지고 얼어붙은 한 마리의 표범이 죽어 누워있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표범은 무엇을 찾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헤밍웨이는 이 글에서 비록 표범이 무엇을 찾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했지만 암시적으로 죽은 표범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왜 눈 덮힌 차디찬 정상 가까운 곳에서 표범이 얼어죽어 있었겠습니까? 이 표범은 더 높이 더 높이 올라가서 보다 싱싱한 먹이를 추구하다 얼어죽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푸른 이상을 위해서 죽음을 맞바꾸는 모습을 우리는 여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께서는 산기슭에 있는 버려진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하이에나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비록 죽었지만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한 마리의 표범이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들은 우리의 비전이 때로 우리에게 큰 대가를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큰 이상을 가지고 소망 중에 전진해야 합니다. 성경 잠언 29장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묵시가 없는 백성은 방자히 행한다.\\\' 꿈과 이상을 잃어버린 인생은 방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셔서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소망의 불을 일으키십시오. 셋째,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할 이유는 전도와 선교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20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맡기는 대목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하고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맡기시며 곧바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놀라운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맡기실 때 제자들을 연약한 모습 그대로 보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담대함과 강건함의 근원이 되는 성령을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1장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예수께서 원하신 순서는 성령을 받고 전도와 선교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성공비결은 성령을 앞서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제자들의 구심적 삶이 원심적 삶으로 변했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 자기 중심적인 삶의 틀에서 벗어나 이웃에게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초대교회의 선택된 7집사중의 한사람인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성에서 굉장한 부흥회를 인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부흥회가 얼마나 놀라웠던지 더러운 귀신이 쫓겨나가고 앉은뱅이와 중풍병자가 치료되고 성 전체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상태로 며칠만 더 부흥회를 인도하면 사마리아 성 전체를 복음화 시킬 수 있는 큰 승리의 역사를 이룰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주의 사자가 나타나 사마리아를 떠나 남으로 향해 \\\'가사\\\'까지 가라고 빌립에게 말했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8장 26절에는 이런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렇게 반문할지 모릅니다. \\\'이것은 마귀의 유혹이 아니냐? 어찌하여 대 승리 길을 눈앞에 두고 쓸쓸한 광야 길로 왜 내려가는가?\\\' 그러나 빌립은 순종했습니다. 가는 길에 그는 에디오피아의 권세 있는 내시를 만나서 그의 준비된 심령에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어 그를 구원시켰습니다. 성령께서는 대 아프리카 대륙의 구원을 이루시려고 한사람 구스인을 먼저 구원하고자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세계 설교의 왕자 스펄젼이 영국 런던에 세운 Pastor\\\'s College (목회자 대학)에 아키발드 브라운(Archibald Brown)이란 청년이 입학했습니다. 그는 학교 졸업 후 런던에서 대단히 성공적인 목회자가 되고 그래서 수천명의 사람들이 구름같이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모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청년 목사의 신비한 능력에 감탄하고 \\\'그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가?\\\'하고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그 비결이 그 목사님 돌아가신 후 낡은 성경책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15장 28절 곁에 그분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아! 성령과의 선배동업의 중요함이여! 이 동업적 참예가 없이는 어떤 신앙생활이나 복음사업도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리차드 딕스는 말했습니다. \\\'네 마음에 불이 붙기 전에 다른 사람의 마음에 불을 붙일 수 있다고 하지 말라.\\\' 성령이 없는 선교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마음에 성령의 불을 붙이기를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넷째, 마지막으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할 이유는 죄를 이기고 상처 난 심령을 치료하여 깨끗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며 많은 때가 묻습니다. 몸에도 때가 끼고 마음에도 때가 낍니다. 몸에 낀 때는 더럽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낀 때는 더욱 더럽고 추합니다. 그런데 몸에 낀 때는 비눗물로라도 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낀 때는 씻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영원히 씻겨지지 않는 때는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 마음의 때는 씻겨질 수 있습니다. 죄악으로 얼룩지고 상처 난 심령에 성령께서 한번 지나가시면 얼룩과 상처는 흔적 없이 지 워질 것입니다. 해변가에 가 보십시오. 해변가 모래 위에는 수많은 상처자국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파놓은 갖가지 구멍들, 조개를 취하려고 파헤쳐 놓은 자국, 텐트자국, 사람발자국 등 너무나도 어지러운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가 되어 대양이 밀려 올 때 모든 모래들은 대양의 부드러움에 휘말립니다. 그리고 결국 해변 모랫가의 모든 상처들은 다 지워지고 다시 온전히 깨끗해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님은 대양과 같이 물밀듯이 닥쳐와 우리의 상처와 괴로움과 죄의 성품을 씻고 우리들을 온전히 새롭게 만들어 줍니다. 스펄젼은 1855년 1월 7일 설교에서 말했습니다. \\\'아! 그리스도를 명상함은 모든 상처를 위한 진통제가 됩니다. 성부를 묵상할 때 모든 슬픔은 소멸됩니다. 성령의 감동 속에 모든 쓰라림은 멎게 됩니다. 여러분의 슬픔을 잊으려 합니까? 여러분의 근심을 헐어버리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깊은 바다 속에 빠뜨리십시오.\\\' 성결은 외적인 노력이나 육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내부에 계신 성령님의 작용으로 저절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깨끗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성령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바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는 영적인 의욕이 없거나 전진을 위한 귀한 대가를 지불할 의향이 없는 비전 없는 \\\'늙은 아이들\\\'로 점점 가득 차기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참 자유가 없으니 사람들이 이웃의 상처를 돌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꽁꽁 언 땅과 같습니다. 우리의 가슴도 얼어붙었고 우리의 환경도 얼어붙었습니다. 진리는 얼음 위에 놓여있어 차갑기만 합니다. 무엇으로 이 두꺼운 얼음을 깰 수 있습니까? 히타를 가지고 돌아다닌다고 녹습니까? 봄바람이 불 때 언 땅이 녹고 새싹이 나는 것 같이 오직 하나님의 바람밖에는 이 얼음을 깰 수 없습니다. 전기 줄 자체는 무력해도 전기가 통하면 빛이 나고 거대한 기계를 돌립니다. 전기 줄처럼 연약한 인생일지라도 성령의 권능을 힘입으면 우주적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비가 적게 내리는 팔레스타인에서는 농사를 위해 두 번의 비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땅을 부드럽게 하고 씨뿌리기 좋은 환경으로 만드는 가을에 내리는 이른 비와, 훈훈한 봄바람과 함께 언 땅을 녹이는 봄에 내리는 늦은 비입니다. 늦은 비가 내린 후에 농부들은 곧 다가올 추수를 대비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를 이른 비에 비유하고 근세에 일어난 성령운동을 늦은 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사실을 무엇을 뜻합니까? 주님께서 오실 마지막 추수의 순간이 눈앞에 닥쳤음을 의미합니다. 이 마지막 때에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성령을 받고 능력과 승리의 삶을 꾸려나가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심령의 자유함과 평화를 누리기 원하신다면 성령을 받으십시오. 큰 비전과 이상을 가지고 전진하기 원하신다면 성령을 받으십시오. 전도와 선교의 능력을 받기 원하신다면 성령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영혼과 육체의 성결을 지속시키기 원하신다면 성령을 받으십시오. 항상 성령충만한 삶으로 능히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