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자
행16:6-10


우리는 때로는 가정의 일이나 자신의 일, 사업문제 때문에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안 되는 것일까?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산 기도도 해보고 작정 기도 해보고 합니다.
어디로 가는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인가를 알기에도 애매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무엇이면 처신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선교사 바울 일행이 복음을 들고 어떻게 유럽 지역에 처음 들어가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성령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또 부르시는지 생각해 보면서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설교는 그저 감동 받는 것으로 깨달음으로 멈추면 안됩니다.
그 말씀이 살아서 내 삶에 적용되어 내 삶이 바뀌어 져야 합니다. 새로워 저야 합니다. 그런 은혜가 오늘 말씀 듣는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6-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과 실라 일행이 떠난 제 2차 전도여행은 1차 전도여행 때에 전도한 교회들을 다시 심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마게도냐로 가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막았다면 괜찮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신났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전도하지 못하도록 돌을 던졌다면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밀고 나갔을 텐데, 문제는 성령께서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간 심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우리는 여기서 닫힌 문을 봅니다.
성령께서 바울이 아시아로 가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을 하면 많은 열매를 맺고서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또 계속해서 전도해서 많은 열매를 얻고자 했지만 성령님이 그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땅에서 전도할 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능력이 나타나며, 한창 전도가 잘되고 있는데 하나님이 광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전도해도 부족한데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라고 하시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야 전도가 잘 될 텐데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라시니 빌립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래도 빌립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사마리아 땅을 뒤로하고 성령께 순종하여 광야로 갔습니다.
거기서 에디오피의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과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은 다릅니다.
어떤 때는 우리를 손해를 보면서도 돈을 투자하고, 엉뚱한 일에 정렬과 시간을 쏟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소위 합리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을 절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의아해 합니다.
“왜 저렇게 살까? 무엇 때문에 선교사로 갈까?”
심지어 교인들 중에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일도 많은데, 그냥 장로로 혹은 돈 벌어서 그 돈으로 도와 주면 되지, 직접 선교사로 갈 필요가 뭐 있나?”
“교회가 왜 그런 일을 하느냐? 국내에도 전도할 곳이 많은데, 왜 꼭 해외로 가느냐?”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친히 당신의 일을 사람의 생각과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역사에서나 민족의 역사에서나 교회의 역사에서나 다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 지금 성령께서 아시아 전도의 길을 막고 계십니다.
바울 일행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건너가서 무시아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무시아에서 드로아로 갈 것이냐 비두니아로 갈 것이냐를 놓고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바울이 비두니아 쪽으로 가는 것을 계속 막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자꾸 막히면 거기에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물론 마귀가 방해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둘을 신중하게 잘 분별해야 합니다.
만약 마귀가 막고 있는 것이라면 뚫고 나가야 합니다.
교회를 못 나가게 하는데 “아 이게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하면서 안 나가면 안됩니다.
그럴 경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더러운 귀신을 물리치고 그 어려움을 넘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이라면 주의 깊게 살펴서 다른 길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일을 막으실 때는 반드시 다른 길을 열어 놓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찾으십시오.
우리에게 영안이 있어 이를 분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롬12: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결정한 것을 따라서 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생각한 것을 주장하면서 하나님도 그 길로 가셔야 된다는 논리를 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막으시면 순종하여 다른 길로 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길을 막으시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데 너무 많은 장애가 연달아 생길 때에는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심사 숙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동차로 아스팔트를 달릴 때에는 100Km로 달릴 수 있지만 비포장도로로 들어서게 되면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막달리다가 장애물이 너무 많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가려쳐 주시려고 하는가?” 하고 잠깐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일을 하면서 마음에 평안이 없다면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성도들이 말리거나 자기 마음속에 계속해서 불확신과 불안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닌지 모릅니다.
혹 인간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억지로 길을 내려고 할 수도 있지만 설교를 들을 때나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과 부딪치는 것이 생긴다면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믿음으로 밀어붙이면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것이 없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때에도 일방적으로 우리가 믿으면 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습니다.”하고 물위를 걸어 보십시오. 물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내가 믿습니다”하고 독을 마신다면 죽고 말 것입니다.
믿음이 만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기로 약속하셨고, “네 길을 내게 맡겨라 그리하면 내가 네 길을 인도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결혼 문제나 직장을 옮기는 것 등 여러 가지 선택해야 할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십니까?
예전에는 갈 길을 모를 때 손바닥에 침을 뱉어 손가락으로 탁 쳐서 침이 튀는 방향으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얼굴에 튀면 어떻게 합니까?
작대기를 세워 놓고 작대기가 쓰러지는 방향으로 길을 정합니까?
여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문 6-7절에서 배우는 교훈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고, 자기의 명철을 의지하는 대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30:21절에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한다고 하였고, 또한 주님의 말씀은 우리 발의 등불이요 우리 길에 빛과 같아서 갈 길을 보이시고 또 바르게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 놓고 또한 들을 귀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혹 설교를 듣다가, 또는 성경을 읽다가 자신의 갈 길을 인도 받는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어느 나라에 높은 탑을 세웠는데 밤만 되면 탑 아래 새들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새들은 대부분 새끼 새들이었습니다.
높은 탑이 있는지 모르고 날다가 돌탑에 부딪쳐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죽은 새들 중에 어미 새는 없습니다.
왜냐햐면 그 길을 낮에 보았고 전에도 다니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본 일이 없는 새끼 새들은 밤길에 그만 탑에 부딪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길은 안 가본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한번 살다가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길에는 안내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갈 때 이 길은 바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는 기도 중에 생각이 떠올라서 어떤 일을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늘 성령의 인도에 민감함 사람은 시시 때대로 그 인도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5) 하신 것처럼, 성령께서 마땅히 무엇을 어떻게 행할 것인지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2:13)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일이 있으면 이리 저리 방황할 것이 아니라 고요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바른 생각이 떠오르도록 기다리는 것도 현명한 일입니다.
여기서도 주의할 것은 성숙한 사람은 지각을 사용하여 옳고 그른 것을 잘 분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식 이하의 길을 자기 확신에 빠져서 행하는 것은 금해야 합니다.

또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다른 사람의 신앙적인 충고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믿음이 성숙한 선배나 진실한 형제의 권고를 듣고 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다윗은 요나단과 깊은 교제를 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좋은 충고를 들어서 바른 결정들을 내렸고
솔로몬은 말하기를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로 인도할찌니라”(잠23:19) 하였습니다.
결정을 내리기가 불확실하여 지혜가 필요할 때 신실한 믿음의 선배나 선한 목회자의 조언을 듣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청년들, 특히 중.고등학생들은 자신의 문제를 누구에게 이야기하는가 하면 또래 친구들에게 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역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올바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자녀들이 마음을 열고 부모님들에게 이성문제나 성적 문제, 진로문제 등에 대하여 충고를 바랄 때 그 부모들은 행복한 분들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아무에게나 충고를 듣고 분별 없이 받아들이면 오히려 문제가 복잡해지고 다른 길로 가게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여 그 의미를 잘 이해하는 것도 어떤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마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으셨다는 것은, 가는 길이 제대로 열리지 않아 못 갔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환경이 나를 막을 때에는 억지로 밀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바른 길로 가는 것이지 내 고집과 내 용기로 밀어붙이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길이 막히고 담이 높아도 넘어가겠지만,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때는 억지로 관철하려고 하지말고 기다리거나 다른 길을 찾는 것이 빠릅니다.
그러다가도 하나님께서 길을 여시면 쏜살같이 그 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리빙스턴은 처음에 중국을 마음에 두었지만 아편 전쟁이 나면서 영국인의 입북을 막는 바람에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어두운 아프리카를 밝히는 위대한 선교사로 살았습니다.
간단한 예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자기 생각이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여 위대한 일생을 살았습니다.
롬8: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리라”고 했습니다.
즉 내가 계획하는 것이 뜻대로 안 되고 자꾸 무너져 내릴 때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가?”하고 의문을 자지만 하나님은 계십니다.
아이가 잘 걸으려면 무릎에 딱지가 몇 차례 붙어야 합니다.
걷지도 않고 뛸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크게 훈련하기 위해서는 넘어지고 깨지는 훈련을 하나님께서 뻔히 보시면서도 허용하신 다는 것을 여러분은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최후의 방법으로는 기드온처럼 양털을 놓고 하나님께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미디암과 접전하여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감이 없던 기드온은 양털을 타작 마당에 놓고 기도하기를 만일 하나님께서 정말 승리하게 하신다면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게 해 달라고 하였는데, 그 다음날에 보니 정말 그렇게 되었고, 다시 그 반대로 양털을 마르고 땅에만 이슬이 내리게 해 달라고 하였는데 또 그렇게 되었습니다(삿6장).
기드온은 도망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기도하면서도 “안 될걸!”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용사로 쓰시고자 하셨기 때문에 그의 엉뚱한 기도를 오래 참고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바울은 억지로 끌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동행들은 아시아로 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 계속 막았기 때문에 바울은 발길을 돌렸습니다.
여러분도 하고자 하는 일이 자꾸 막힙니까?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제 바울은 성령께서 막으시는 것을 보면서 순조롭게 인도함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확신 없는 길을 억지로 밀고 나가지 않고 무시아를 지나서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이곳은 소아시아의 끝으로 유럽으로 건너가는 문턱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하여 기다리던 날 밤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9-10절을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그 환상의 의미는 이제 소아시아에 머물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뜻은 소아시아로 가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소아시아를 전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에 머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물을 넓게 쳐라는 뜻입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이것이 다 네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바울을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항구 드로아를 거쳐서 유럽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네 지경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네 생각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부 자기 중심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 자신, 자기 가정밖에 모릅니다.
기껏 넓혀 생각해 봐야 자기 교회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 자기 가정, 자기 교회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자기 교회만 잘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가 다 잘되어야 하고 세계교회가 다 잘되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지금 바울의 지경을 넓혀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계를 바라 볼 때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만 보고 자기 주변이나 자기 환경만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도 모르고 돌아온 탕자 동생을 미워했던 첫째 아들처럼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많은 교회가 첫째 아들의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남 구원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환상을 본 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바울은 곧 바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일 좀 같이 하자고 하면 다음에요 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순종은 시간과 상관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때 순종하지 않으면 불순종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곧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지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하는 일에도 지체하지 말고, 또한 헌신하는 것도 미루지 맙시다.
선한 일을 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는 어제와 내일 사이입니다.
즉 오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종종 하나님의 독촉하심을 들으면서도 순종하지 못합니까?
저녀 문제가 장애물이 됩니까?
경제적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막습니까?
사회적인 체면이 우리의 가는 길을 방해합니까?
그런 일은 젊은이들이나 하고 자신은 뒷전에서 바라보기만 하렵니까?
만이 배우지 못한 것이 이유가 됩니까?
신앙생활을 오래하지 않았다고 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즉각 순종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지체하는 것은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는 해변가에 인명 구조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재미있게 노는데 인명 구조의 책임을 진 한 사람이 쏜살같이 구조대에서 뛰어 내려와 물가로 달려가더니 첨벙 물에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한 소년이 방금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못 보았는데, 이 사람만 그 현장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는 서둘러서 인공 호흡을 시키고 물을 토하게 하여 결국 소년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 사람은 하루에도 세 명의 귀한 생명을 건졌습니다.
한 방문객이 구조원들이 머무는 곳에 찾아가 보니 벽에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의심나면 달려가라!” 의심이 나면 따질 것이 없이, 논쟁할 것도 없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잘 모르는 것 같으면 달려가라! 말은 못해도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보니까 마게도냐 사람들이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하는 환상을 바울이 보게 됩니다.
환상을 바울은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그는 그것을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해석했습니다.
“와서 우리를 도우라”
지금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처럼 심각하게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한 영적인 음성을 듣는 귀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바울이 성령님을 통해 이 음성을 들음으로써 유럽에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는 영혼들의 애절한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