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에 이끌리어 사는 삶 행16:6-10
삶이 힘들고 곤고하다 싶을 때면 제가 뒤적이는 낡은 시집 한 권이 있습니다. 매일 기차로 출퇴근하는 프랑스의 한 카톨릭 수사가 쓴 \\\'가난한 기도자\\\'라는 책인데 거기 보면 \\\'내 원대로 마옵시고\\\'라는 제목의 이런 시가 있습니다. \\\"주님, 퇴근길에 정거장을 걸어나오며 군중 속에 끼어서 문득 멀리 도망가 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습니다. 도피하여 인간을 떠난다는 것은 또한 당신을 떠난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되겠습니다. 아니, 어찌하여 남들보다도 더 많이 알아야만 하고 더 많은 일과 완수의 임무들이 제게 주어져 있사온지. 다른 이들과 같은 경우였다면 차라리 훨씬 더 행복하였을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은 그렇게 많은 것을 알지도 못했고 주어진 책임을 그토록 무겁게 느끼지도 않았으니 마음은 무척 평화로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모든 일을 어렵게만 생각하려 드는지...\\\" 이렇게 수사는 현실의 삶에 버거워합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눈부신 파리의 태양 아래 정거장을 흘러나오는 군중을 바라보면서 순간 그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어졌습니다. 저들 속에 끼어서, 일을 마치고 홀가분히 퇴근하는 셀러리맨처럼, 고달픈 하루였지만 일당을 받고 집으로 향하는 저 노무자처럼, 아니면 차표를 검열하고 있는 이 역원이라고 되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떤 존재가 되든지 그저 이 아무도 모르는 군중 속에 끼어서 그렇게 많은 것을 알지 못하고 굳이 까다로운 사고를 하지 않아도 될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것이옵니다. 주님, 소문도 없이 사라져 우편배달부도 오지 않고, 궁핍도 없으며, 본받아야할 모범도 없고, 기도조차도 필요 없는 그런 고요한 곳으로 떠나고 싶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솔직한 인간적 바람을 피력한 수사는 계속해서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어느날 밤 주님은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둬가 주소서...\\\' 확실히 그날 밤 당신을 기다리고 있던 운명은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오나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시기 전에 그렇게 말씀하신 사실은 제게 힘을 주시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기의 인간적 바람과 하나님의 신적 바람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끝내 자기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선택하며 살았던 한 신앙인의 진솔한 고백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렇게 말하기 전에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내 잔을 좀 옮겨주십시오\\\'라고 기도한 주님의 그 기도가 너무도 인간적이라 공감이 되고 또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뤼시엥 제르파뇽 수사만의 경험이겠습니까? 아버지의 뜻을 좇을 것인가 내 뜻을 좇을 것인가...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한 평생 고민하고 갈등하고 짊어지고 가야할 인생의 과제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런 갈등 상황을 경험했던 한 신앙인을 만나게 됩니다. 바나바와 함께 소아시아 지방을 다니며 제1차 전도여행을 했던 사도 바울은 그 소아시아 지방의 여러 교회들을 다시 한번 돌면서 저들의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서 두 번째 전도여행을 계획합니다. 마가 문제로 바나바와 결별하는 아픔을 겪은 사도 바울은 마침내 실라와 함께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자꾸 그 계획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자기가 마음먹은대로 모든 게 되지가 않았습니다. 아시아를 향한 선교의 길이 열리질 않고 자꾸 막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드로아라고 하는 막다른 항구에 다다르게 됩니다. 바울은 답답했고 막막했고 한편으론 조바심이 나기도 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안풀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는 그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성령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선교의 동력이신 그 성령께서 바울로 하여금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바울은 자기 계획을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 허락지를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바울의 딜렘마가 있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 지방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거라는 확신을 갖고서 이 일을 감행했는데 하나님이 그걸 허락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 길을 막고 훼방하는 겁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 그가 당도한 곳이 바로 드로아 항구였습니다. 그는 한 밤중에 드로아 항구에 서 있습니다. 이 현실 자체가 얼마나 상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까? 밤이란 캄캄해서 앞이 보이질 않는 시간입니다. 드로아는 소아시아 대륙의 맨왼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이제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망망대해 앞에서 캄캄한 어둠 속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바울이 겪었던 이런 경험은 없으십니까? 이건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했는데 그 계획이 자꾸 막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내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길이라고 여겼는데 그 길에 자꾸 장애물이 생기지는 않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라고 힘차게 내달렸는데 그만 돌뿌리에 걸려 넘어져 코피를 쏟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사도 바울에게 그런 경험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참으로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확신했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주님이 그 선교의 동력으로 보내주신 성령님께서 기꺼이 자신들의 선교여정을 인도해 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이 지금 자기들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훼방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확신과 예상과는 전혀 다른 현실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그 밤, 그 자리... 그러니까 앞이 보이질 않는 칠흙같이 어두운 밤, 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막다른 항구 드로아에서 바울은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나 \\\'이리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손짓하여 청하는 환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환상 앞에서의 바울의 처신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 환상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성령님은 사도의 생각보다도 훨씬 크신 분이셨습니다. 사도는 소아시아를 생각했지만 성령님은 땅끝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성령님은 복음이 아시아에서 맴도는 것을 원치 않고 유럽으로 건너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0절의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그 환상을 보고 바울은 소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려 했던 자기의 계획을 완전히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그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참뜻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바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순간 자기의 뜻을 그 즉시 접어버립니다.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정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길 좋아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인정해야 할 것을 인정 못해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받아들여야 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얼른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돌이키면 복이 될 것을 그렇게 아니함으로 화를 자초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 좋다는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자기들의 마음 속에 역사하는데도 궂이 그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그때 주님은 \\\'모든 죄는 사함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사함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그들 마음 속에서 성령이 책망하시고 교훈하시는데도 그걸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게 어리석은 겁니다. 인정할 것은 얼른 인정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화복(禍福)의 갈림길이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의 차이가 그것입니다. 다윗은 나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질책하실 때 깨끗이 인정했습니다. 얼른 몸을 낮추고 바싹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질책에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인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잘못되었으면 깨끗이 잘못을 인정하는 겁니다. 착각했으면 순순히 그 착각을 인정하는 겁니다. 잘못 보았으면 분명히 그 잘못 본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인정함일러라...\\\' 바로 여기서 사도 일행에게 새길이 열립니다. 이제 저들을 새로운 목표를 세웁니다. 그래서 소아시아가 아닌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씁니다.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그때 새로운 비전이 저들 앞에 활짝 열립니다. 그랬을 때에 성령께서도 저들을 이끌어 그 대망의 땅끝 선교을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너무 자기확신이 강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아는 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요 내가 하는 일이 어김없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강변하지는 않습니까? 그게 과연 참신앙일까요?... 참신앙은 자기확신이나 자기도취가 아닙니다. 참신앙은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가 아닙니다. 참신앙은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주님을 사랑하는 저의 사랑을 주님이 아십니다\\\'입니다. 자기확신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바로 그 자기확신에 도취된 자들에게 희생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맞추려하기보다 하나님을 자신에게 맞추려는 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저들은 조금도 바뀌지 아니하고 자기자리에 붙박혀서는 요한을 향해서는 \\\'미친 자\\\'라 하고 주님을 향해서는 \\\'먹고 마시는 자\\\'라 하며 바뀔 줄을 몰랐습니다. 이 자기도취적 신앙으로 저들 스스로 화를 자초하고 만 것입니다.
제가 한 20 여년 목회하면서 철칙으로 삼는 것 중의 하나는 \\\'그 어떤 나의 견해도 절대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나보다 크신 분\\\'이시라는 것과, 또 하나는 \\\'하나님은 나만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고 우리를 통해서 역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게 장점도 되고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만은 저는 그것이 자기비움적 겸손한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피차에 서로 대화하고 조정하고 협력하여 우리 신앙 공동체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긴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심과 다를 수 있다는 여지를 접지 않습니다. 안그러면 하나님은 \\\'이놈아, 내가 낄 틈이 어디 있느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비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아무리 당위성과 합리성을 갖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바람은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는 겁니다. 바로 여기서 중요한 것이 Network Mission, \\\'그물망 선교\\\'입니다. 21세기의 선교는 \\\'그물망 선교\\\'입니다. \\\'그물망 선교\\\'를 위해서는 먼저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물망 구조\\\'란 기존의 \\\'피라밋 구조\\\'를 깨뜨린 것입니다. \\\'그물망 선교\\\'에서는 머리가 없어집니다. 과거에는 기업들의 기획조정실이나 비서실에서 정책의 모든 것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물망에서는 그런 특정한 머리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다 머리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북치고 장구치고 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피라밋 시대가 아니라 네크워크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한 그물이라도 코가 빠지거나 뚫어지면 안됩니다. 흔히 리더쉽을 말할 때 대문자 L과 소문자 l로 나누어 씁니다. 대문자 L은 전체 리더자이고 소문자 l은 부분 리더자입니다. 80년대 리더쉽은 한 사람에게 100%를 원하고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는 리더에게 엄청난 카리스마를 요구했고 80%를 잘해도 20%가 부족하면 퇴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리더쉽은 100%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50% 이상이면 됩니다. 나머지 50%는 소문자 l이 감당합니다. 이게 모든 게 다원화되어가는 21세기의 현실입니다. 교회도 이렇게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셀목회\\\'니 \\\'평신도 운동\\\'이니 하는 것들이 바로 그런 겁니다. 이젠 머리 중심의 리더쉽이 아닙니다. 역삼각형으로 바뀌어 갑니다. \\\'위에서\\\'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입니다. NGO의 힘이 커가는 세상에서 교회는 시민단체들과 함께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러한 단체들과 공조하면서 지역사회에 기여함으로 간접선교의 장을 열어가야 합니다. 그러러면 우리의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교인들 중에는 교회가 시민단체에 관여하면 뭐가 잘못되는 줄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두 무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세상 무대\\\'이고 또 하나는 \\\'교회 무대\\\'입니다. 주간은 세상 무대에서 살고 주일은 교회 무대에서 삽니다. 그래서 세상 무대의 제사장이 있고 교회 무대의 제사장이 있는데 전자가 여러분이고 후자가 목회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교회와 세상의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중요한 연결 작업, 브릿지 역할은 목사들이 할 수가 없습니다. 교인들이 해야할 몫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제사장에 대한 역할을 나누어 놓고 있습니다. 미래의 세상은 이게 더 강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중요한 것이 세움받는 일꾼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여러 리더들을 세우는 겁니다. 세상을 향한 선교와 구제와 나눔과 섬김은 누가 하는 겁니까? 바로 세상을 향한 제사장들이 하는 겁니다. 이웃교회를 보니 선교위원회에서 주선해서 캄보디아, 베트남, 방글라데시로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사회위원회가 주선해서 \\\'아버지 학교\\\'를 만들어 시행합니다. 각 부서에서 함께 모여 기도하고 의논하며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당회의 허락을 맡고 시행합니다. 이게 네크워크 시스템입니다.
제가 잘 이해가 되지 않고 안타까운 것은 위원회 모임이 안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제직회는 돈과 관련된 것만 다루는 기관이지 사역을 감당하는 조직은 아닙니다. 사실 제직회는 매달 모일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건 위원회입니다. 사역은 위원회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원회가 모이지 않는다는 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거기서 하나님 앞에 각 부서를 책임맡은 이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지혜를 구하고 합동력여 기획하고 시행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매가 맺어지는 것인데 시작도 못하는 겁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해야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청소년 선교, 우리가 감당해야할 중요한 몫입니다. 서울의 \\\'가리봉 5거리\\\' 하면 구로공단이 가까운 유흥가 밀집지역으로 악명높은 곳입니다. 열 다섯반까지 있는 여고에서 1년이면 한반이 없어지는 곳입니다. 다 유흥가로 빠지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목사님이 그곳의 어느 한 건물을 인수해서는 2천 만원을 들여서 완전히 내부를 까페처럼 꾸몄습니다. 한쪽은 소극장, 한쪽은 찻집... 마음대로 들어와서 차를 타 마시고 음악을 듣고, 춤도 추고, 인터넷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와서 뭐해라\\\'가 아니고 \\\'하고 싶은 것을 마구 발산하게 하는\\\' 그런 공간으로 꾸며놨습니다. 청소년들이 와서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대로 합니다. 자기네들끼리 연극도 하고 음악회도 하고 때로는 토론도 합니다. 저의 벧엘의 꿈 속에는 이런 장면들이 들어있습니다. 노인분들을 위해서도 이런 공간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아쉬운대로 탁자와 의자 몇 개 갖다놓고 사탕이나 과자 들의 간식거리라도 마련해서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교인들은 문화가 틀려서 노인정에도 잘 못 가십니다. 이제 앞으로는 탁아소처럼 탁노소도 필수가 되어갈 것입니다. 현재 노인 치매환자가 30만명입니다. 그럼 한가족 4인 기준으로 치면 120만명이 치매와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거기다 자식들까지 생각하면 수백 만명이 고민하는 가정문제가 바로 치매입니다. 중풍병자는 또 얼마입니까? 이런 분들을 위해서 탁노소가 필수적입니다. 구미시장이 재임 중에 꼭 이루고 싶은 숙원이 \\\'치매 병원\\\'이라고 했습니다. 한번 시장을 만나 우리 부지와 연계해서 그것을 의논하기로 우리 비전21 기획위원회가 약속을 해놓고 있고 얼마 전 제가 만나서 잠시 운을 뗀 적이 있습니다. 독거노인과의 자매결연도 필요합니다. 부모없는 교우들이 한 분씩 맡아 자기 부모처럼 모시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이런 거 우리 선교회나 교구부에서 가능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의식이 많이 바뀌어야 합니다. 저는 요즈음 우리 농아부를 마음에 두고 특별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에는 농아부 전담교역자가 있었기에 그렇게 깊이 있게 농아부 사역을 생각하질 않았습니다. 대부분 담당교역자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교역자가 비고 보니 어떻게 이 농아부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일까를 새삼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즈음 저에게 \\\'장함교회\\\'라는 한 장애인 공동체를 모델로 보여주십니다. 장함교회란 \\\'장애인과 함께하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져 예배도 드리고 밥상 공동체의 나눔을 갖는 일산에 있는 교회입니다. 이 장함 교회의 목표는 \\\'장애인만 모이는 교회가 이 땅에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통합이 이 교회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남녀, 노소가 없듯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별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와 신학교 동기인 담임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동안의 장애인 선교에 있어 문제점은 교회 안에서 그들을 하나의 부서로 만들고 따로 있게 함으로서 메인 스트림 주위에 들어오지 말게 했다는 것입니다. 장애인은 신앙공동체의 가족이 되기를 원하는데 교회는 자꾸 그들을 따로 섹트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전 그 얘기를 듣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장애인이란 겉으로 봐서 약간의 장애가 있다는 것뿐이지 비장애인과 그리 큰 차이가 나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결혼해 함께 살고, 또 비장애인들도 결혼해서는 성격이 안맞아 못살겠다고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애인 부서를 따로 두기보다는 함께 더불어 가야 한다는 겁니다. 장애인들이 원하는 것은 불쌍하다는 동정어린 시각이나 물질적 도움이 아니라 자기들도 교회 한 일원으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인정받고 신앙적으로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안목사의 말에서 많은 도전과 암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정말 그렇지 않았습니까?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장애인 복지 선교는 우리가 힘써야 할 영역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세계보건기구의 발표에 의하면 열 명당 한 명이 장애인입니다. 2000년도에 개종된 복지법은 장애를 이렇게 분류합니다. \\\'시각장애, 언어장애, 청각장애, 발달장애(자폐증), 정신장애(우울증/조울증), 정신지체장애( IQ 70 이하), 심근경색, 신부전증, 뇌경변장애(뇌성마비)...\\\' 이게 다 앞으로 우리가 감싸안아야할 선교 영역입니다. 우리가 그 동안 해 온 장애인 선교는 장애인과 거리를 두어왔습니다. 가까운 지역사회 안에 있는 장애인보다 멀리 있는 장애인을 생각했고, 지속적이기보다 간헐적이었고, 복음의 정신보다는 물질적 도움을 주는데 치중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했지 함께 해야할 대상으로는 여기질 않았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말입니다. 제가 아는 교수 한 분이 장애인인데 이 분이 밖에 나가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한번씩 쳐다봅니다. 그냥 지나가면 좋겠는데 꼭 두리번거리고 살핍니다. 그러니 외출하고 싶겠습니까? 그래도 이분은 교수에 박사인데도 그런데 그렇지 못한 이들은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장애인을 도와주어야할 대상이 아닌 동반자로 봐야 합니다. 저는 우리 \\\'햇살지기\\\'를 참으로 대견하게 생각합니다. 몇일 전에는 도개에 있는 어느 장애인의 집 도배를 여러 회원들이 가서 해주었습니다. 모 집사님은 무료로 도배를 해주었고 연세드신 집사님이 열심히 도우셨습니다. 몇일 뒤에는 지난 번 폭우로 무너진 대망교회 교인의 집에 가서 또 도배를 해드릴 것입니다. 또 모 집사님은 무료로 보일러를 설치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역입니까? 우리 교회의 보배들입니다. 중증 장애인들도 외출하고 싶어하고 지체장애인들도 등산하고 싶어합니다. 가정 방문 도우미들을 만들어서 한번이라도 외출할 수 있게 해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선교위원회에서, 사회위원회에서, 교구위원회에서 그런 거 못할까요?... 그 소박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에 돈이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돈이 없어 노인들 못 돌보고 장애인들 못 돌보는 게 아닙니다. 바로 그 손짓을 못보기 때문입니다. \\\'이리 와서 나를 좀 도와달라\\\'는 그 손짓을 못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도 세상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예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지경이 더욱 넓혀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저를 위해서 이것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좀 더 성령의 인도하심에 예민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부족합니다. 지혜도 없습니다. 그런 저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비전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도움이 필요한 곳의 손짓하는 그 손길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만이 아니라 우리 당회원들을 위해서, 항존직들을 위해서, 제직들을 위해서, 구역일꾼들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우리 영락의 모든 교우들이 그럴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사십시다. 자기 아집에 이끌리지도 말고, 자기 주관에 이끌리지도 말고, 오로지 성령에 이끌리어 사십시다. 그가 바로 진정한 주님의 사람이요 참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고 주님이 기뻐하는 그 역사만을 이루어가는 우리되어 더불어 합력하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이 영락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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