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인도를 받는 법 행16:6-10
우리의 가는 길 우리 앞에 하루에도 수많은 결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대학에 가야하는지? 어느 직장에 가야 하는지?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 어떤 사업을 해야 하는지? 이것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저 것을 해야 하는지? 이것은 왜 안 되는지? 궁금해서 하나님께 묻고 싶은 것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낭패입니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마귀가 인도하는 길로 가다가 낭패와 파멸을 당하기도 합니다. 마귀도 천사의 광명한 얼굴로 꾸밀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사울왕은 블레셋과 전쟁을 앞두고 초조하고 불안해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갈급한 사울왕은 엔돌에 신접한 여인을 찾았습니다. 무당은 사울이 전쟁에서 죽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가는 길에 힘내라고 저녁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사울은 그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전쟁에 나가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 사람의 최후가 이렇게 비극적입니다. 무당이 해 준 밥을 먹고 다음날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생명과 축복의 길이 열릴 것이고, 악령의 인도를 받거나 세상의 길로 가면 고생과 파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중에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성령이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리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4-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성령이 어떻게 막았는지는 잘 모릅니다. 꿈이나 환상으로 막았을 수도 있고, 유대인의 반대와 같은 주변의 환경으로 막았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아시아 선교를 막은 사실입니다. 바울은 아시아 선교를 계속 고집합니다. 이번에는 무시아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할 때에 다시 예수의 영이 막았습니다. 예수의 영은 성령에 대한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바울은 소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바울같이 유능한 선교사도 성령의 인도 없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선한 일도 성령의 인도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가 무엇입니까? 성령 하나님은 우리 속에 내주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보낸 영이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내는 영입니다. 성령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자녀와 함께 하시면서 천국 가는 날까지 우리를 책임지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뜻과 생각과 행동을 주장하십니다. 성령은 당신의 의지대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성령의 인도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당신의 뜻과 의지대로 우리를 이끄심을 말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주된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있습니다. 성령은 구체적으로 우리를 간섭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호와 통치 안에 있게 하십니다. 성령의 주된 관심사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천국 가는데 이상이 없도록 책임지십니다. 우리를 믿게 하고, 믿음을 유지하게 하고, 믿음이 성장하도록 하십니다. 성령은 택한 백성의 구원을 최종적으로 책임지십니다. 이것을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어떤 과정을 거치더라도 결국에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관심은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고 복되게 사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실패자가 되거나 낙오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넘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선하시고 아름다운 역사가 날마다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성령에게 맡기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복된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나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의 체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건전한 인격이십니다. 우리와 건전한 교제를 통해 건전한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환상이나 환청 같은 특별하고 비상적인 방법을 사용하시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요긴하게 하십니다. 불건전한 체험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비인격적인 판단이나 결정으로 연결시켜도 안 됩니다. 성령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어서 파격적으로 인도하실 수 있지만 모든 것을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대개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게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너무 잘 아는 분입니다. 우리 수준에 맞게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어두운 밤길에 나타난 도깨비불로 생각해서 안 됩니다. 있는 것 같은데 없고, 있다 할지라도 생산적인 기능이 없는 것이 도깨비불입니다. 성령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 어두운 밤길에 불이 반짝거리면 참 무섭습니다. 그 불이 작아졌다가 커지고, 커졌다가 다시 작아집니다. 도대체 이 불빛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혹시 귀신불입니까? 긴장해서 가까이 갔는데 시커먼 물체가 가까이 다가옵니다. 긴장이 극에 달해서 곧 기절하고 넘어질 것 같습니다. 그의 정체는 자기 집 식구를 마중 나온 동네 사람이었습니다. 밤길에 짐승 만나는 것보다 사람 만다는 것이 더 무섭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어두운 밤길에 자기 집 식구를 마중 나와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담배를 피우면서, 한 모금 빨아들일 때마다 불이 커졌다가 작아졌다 한 것입니다. 멀리서 오는 사람이 혹시 자기 집 사람인가 확인하기 위하여 가까이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도깨비불이 아니라 동네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은 성령입니다. 늘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성령의 인도는 암흑 가운데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잠깐 비추었다가 사라지는 도깨비불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함은 늘 신실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누구나 다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성령이여 그 음성을 항상 들려 줍소서 내 마음은 정했어요 변치 말게 하소서!” 이 찬송은 특별한 은혜 체험이 있는 사람만이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모든 성도들이 부를 수 있는 보편적인 찬송입니다. 성령의 인도는 개인적이고 비밀스럽습니다. 모든 성도는 성령의 인도를 맛봅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고백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법 첫째,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경은 성령의 인도를 나타내는 안내서입니다. 성경에는 성령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데 있어서 먼저 생각할 것은 도덕적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지만, 성령은 성경에 이미 그 정해진 뜻을 기록했습니다. 그대로 인도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는 어느 정도 객관적입니다. 공개된 것입니다. 예측 가능한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불변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성령의 인도는 럭비공처럼 아무 곳으로 불규칙하게 튀지 않습니다. 누구와 결혼을 할 것인지 성령의 인도를 기다립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결혼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주 안에서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배우자의 신앙을 먼저 고려해야 합니다. 기독교적인 인생관과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우선 판단해야 합니다. 거짓말이나 도적질을 하면 이익이 생긴다고 합시다. 우리에게 이런 이익이 주어진다면 참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이럴 때 성령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계명을 생각해야 합니다. 요셉은 주인 보디발의 아내의 집요한 동침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간음은 성령의 인도가 아닙니다. 일시적으로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지만, 요셉은 순결을 지킴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도덕질 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 탐심을 버리라. 말은 쉽지만 막상 이런 유혹을 받으면 흔들리기 쉽습니다. 잠시 고민할 수 있습니다. 할까, 하지 말까? 그러나 성령님은 이미 뜻을 결정해 놓고 우리의 순종을 기다립니다. 추석 귀경 길에 고생하신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길이 막히면 짜증도 나고 힘도 듭니다. 도속도로에서 밤을 새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끔찍합니다. 버스전용차로 달려볼까, 갓길로 달려볼까? 유혹을 받습니다. 밤2시가 지나니까 이성을 잃은 분들이 많이 생깁니다. 누가 보랴! 경찰이 어디 있으랴! 갓길로 주행하는 차들이 늘어납니다. 대부분의 양식 있는 사람들은 끝까지 인내함으로 법을 지킵니다. 어려워도 양심을 지키고 법을 지키는 것이 성령의 인도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마지막에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를 출석하고 섬길까? 성도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결정입니다. 건물이 크고 성도가 많은 것을 보니 괜찮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혹 누가 다니니까 믿을 만하고, 내가 아는 사람이 다니니까 편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 교회가 복음을 제대로 선포하는지, 영적으로 충만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성경적인 교회인지 아닌지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은 좋아하시는 것이 있고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고민할 일도 아니고, 고민한다고 달리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성령의 인도하심은 결정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깨닫고 순종하여 따라갈 것인가 결단만 남았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령은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입시다. 말씀은 우리를 인도하는 길의 빛이고 등불입니다. “주여 말씀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겸손하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읍시다. 말씀을 분명히 깨닫고 적용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무지와 죄성 때문에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여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무지를 면합니다. 기도하여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우리 안에 죄성이 억제됩니다. 성령이 역사해야 말씀이 말씀으로 들려집니다. 성령의 조명이 아니면 말씀은 효력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말씀을 몰라도 못하지만, 알아도 영적으로 민감하게 순종하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습니다. 기도 가운데서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읍시다.
둘째, 옳고 그름이나 도덕적 판단의 문제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의지에 관한 문제가 있습니다.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이 다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선택할 것입니까? 성경을 아무리 찾아도 이름이 없습니다. 어느 동네로 이사할 것입니까? 어떤 집을 선택할 것입니까? 여행을 할 때 비행기로 할 것입니까? 아니면 기차로 할 것입니까? 이런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에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는 분명 있습니다. 선교사로 나가려고 합니다. 선교는 주님의 지상명령이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중국으로 갈 것입니까, 아프리카로 갈 것입니까? 평신도 선교사로 갈 것입니까? 평생을 헌신할 것입니까? 어느 하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장하시는 길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데 속 시원하게 그 답을 모른다는 것이 답답합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분명 있습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는 가에 따라서 그 결과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는 가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의지에 관해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속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바울도 아시아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말고 유럽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외에는 하나님의 의지를 알 방법이 없고, 기도 외에는 하나님의 의지를 이룰 방법이 없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성령이 인도할 것입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확신이 생깁니다. 기도하면 지혜가 생깁니다. 기도하면 길이 보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선택할 때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신적인 지식으로 열두 명을 알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습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백성을 인도하고 바벨론을 떠나기 전에 가는 길의 평탄함을 위해 금식하여 기도했습니다. “때에 내가 아하와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에스라8:21-23).”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왕의 술관원장으로 어떻게 왕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를 할 것인지, 가서 성벽 재건을 하라는 허락과 도움을 어떻게 받을지 몰랐습니다. 느헤미야는 금식하여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이 왕의 마음을 움직여서 가는 길을 허락할 뿐 아니라 행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도움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라면 기도하면 다 해결됩니다. 기도만큼 우리의 눈이 열립니다. 아람 군대가 도단성을 포위했을 때, 엘리사는 기도했습니다. 영안이 열려져서 도단성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불말과 불병거 곧, 천군천사를 보았습니다. 우리도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고,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신앙의 양심을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하면 성령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기도하면 성령이 우리를 책임지시고 인도하십니다. 그 길이 평탄할지 험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평탄한 길을 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요셉의 경우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나의 경우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탈 때까지는 의기양양했지만 성령의 인도를 거역했기 때문에 파선했습니다. 세상적으로 잘 나가는 것이 다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가가 중요합니다. 환상이나 다른 표적이 임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 전도의 문이 막힘으로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마네도냐인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건너와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달라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바울에게 임한 환상은 기도의 응답입니다. 바울은 늘 선교의 문을 열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시아 선교를 막는 것도 응답이고, 마게도냐로 건너오라는 환상도 응답입니다. 환상이 필요하면 환상을 주십니다. 환상이 필요 없으면 환상 없이도 성령이 인도하십니다. 환상을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 당시에는 환상이 계시의 수단이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충족되었습니다. 다른 계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무지하고 눈이 어두워서 미처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환상을 통해 보조적으로 보여 줄 수도 있습니다. 환상을 주셔도 감사하고 그렇지 않아도 감사합니다. 환상은 계시가 아니라 조명입니다. 이미 기록된 계시를 깨닫게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특별한 사건이나 체험을 부정해서 안 됩니다. 우리에게 이런 보조적인 수단을 주신 것은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충분히 깨닫게 하신 것을 다시 증거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하기 위해서 무슨 환상이나 표적을 구해서 안 됩니다. 자기만의 체험이나 느낌을 구하다가 마귀에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귀에게 문을 열어 주어서 안 됩니다. 마음껏 기도합시다. 말씀이 깨달아지면 마음의 확신과 평강과 담대함이 생깁니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입니다.
셋째,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 위해서는 주변의 환경, 여건, 지혜, 정보, 자료를 잘 검토해야 합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드로아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항구입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말씀을 금방 실천할 수 있습니다. 만약 드로아가 항구가 아닌 깊은 내륙 지방이었다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설령 무슨 뜻인지 알았다 할지라도 실천에 옮기는데 지체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의 하나님입니다. 이성적인 판단과 경험이라는 선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교회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 것은 성경의 계시나 기도 외에 현실적인 필요성과 용도를 고려해야 합니다. 결혼의 배우자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격이나 개성 등을 충분히 검토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 중에 선택하고, 기도해서 확신이 생기는 사람 중에 선택합니다. 그리고 충분한 교제를 통해서 개인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삭은 얼굴도 보지 않고 리브가를 신부로 맞이해서 잘 살았지만, 야곱은 라헬을 사랑해서 칠년이 언제 지나는지 모르게 연애해서 결혼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영감을 믿습니다. 무슨 영감입니까? 영감의 성격이 기계적인 영감이 아니라 유기적인 영감을 믿습니다. 기계적인 영감은 모세가 오경을 기록할 때 눈을 감고 있었더니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손이 저절로 움직여져서 성경이 줄줄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는 여러 자료와 구전을 검토했습니다. 모세의 교육이나 경험까지도 성경을 기록하는데 쓰여졌습니다. 모세가 창세기의 이야기를 어떻게 알 수 있었습니까?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가 언약입니다. 언약은 모세가 갑자기 생각해 낸 독창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모세 당시에 흔히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상호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언약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사업을 하면 경제적인 이익을 얻어야 합니다. 일을 시작해 놓고 돈을 벌지 못하면 오히려 화가 됩니다. 무슨 사업을 할 것인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먼저 사업이 성경적인가를 검토해야 합니다. 다음은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업이 성공할 요인이 있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사업의 성공을 위해 조해야 합니다. 햄버거 사업은 음식 사업이 아니라 부동산 사업이라는 말을 이해해야 합니다. 맛있는 햄버거를 만드는 것도 필요하지만, 장소와 위치가 좋아야 합니다. 호텔은 아무리 외쳐도 장소입니다. 위치, 위치라고 했습니다. 직장을 선택할 때도 은사와 재능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 남보다 구별되게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를 알고 일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만족되어야 혹 우리가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성령이 도울 수 있습니다. 오래도록 기쁘고 즐겁게 일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환경과 여건을 찾는 것을 게을리 해서 안 됩니다. 직장이나 사업을 위해 기도원으로 가는 것도 필요하고, 동시에 견문을 넓히고 정보와 안목을 얻는 것도 필요합니다. 훌륭한 설교자는 한 손에 성경, 다른 손에는 그날의 신문을 든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기도의 무릎과 현실을 직시하는 통찰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다소 출신입니다. 다소는 항구에 접해 있어서 바울은 어려서부터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보면서 먼 나라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다소는 헬라 문화와 철학을 맛볼 수 있는 곳입니다. 로마시민권자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서 택한 것은 합당합니다. 스데반 집사를 비롯해서 헬라인 중에 일곱 집사를 선택한 것도 합당합니다.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고, 헬라파 과부를 구제하는데 집사들을 세움으로 공평을 기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유대교 출신이라 유대교를 쉽게 버릴 수 없었지만, 헬라파 집사들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어떻게 다른지 잘 알았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설교하다가 유대인의 비위를 거슬러 순교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했습니다. 교회의 새 출발을 위해서 헬라파 일곱 집사가 필요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 우리의 가진 것이나 삶의 모든 것을 통찰합시다. 성경을 깨닫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고, 세상 공부를 잘 하게 하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기도해서 병을 고치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고, 병원에서 최선의 치료를 받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죄인이 회개해서 마음을 고치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고, 경찰이 죄를 막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믿는 자가 구제하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고, 불신자가 구제하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내면적으로 역사하는가, 아니면 겉으로 역사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내면적으로 영혼의 변화까지 일으키면 더욱 좋으나 겉으로 역사한 것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신자를 통해 역사하면 좋거니와 불신자를 통해 역사해도 좋습니다. 선한 것은 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버릴 것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성령은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성령께 우리의 가는 길을 맡깁시다. 선하고 아름답게 풍성한 결실이 있는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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