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이 임재하시는 예배 행8:26-40 어느 저명한 의사가 매우 바쁘게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린 아들이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 아버지 옆에 다가갔습니다. 일에 몰두해 있던 아버지는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동전을 끄집어내어 아들에게 주며 만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이 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나는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니예요\\\" 잠시 놀랐지만 여전히 그 일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여전히 아버지 곁에서 나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몇 분이 지난 후에 아버지는 책상 서랍을 열고서 과자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습니다. \\\"아빠, 저는 과자도 원하지 않아요\\\" 그때 아버지는 하던 일을 멈추고 \\\"돈도 과자도 원하지 않으면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아들이 대답하기를 \\\"아빠, 저는 돈도 과자도 필요 없어요. 아빠하고 함께 있고 싶어요\\\" 예배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복이며 또한 본분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임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인간이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성에 동참하는 것이며, 죄인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덧입는 것이고, 한시적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의 영원성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누추함과 죄악의 모습을 보여드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총을 받고, 우리의 마음과 영을 드려 하나님의 영을 받으며, 우리의 절망과 좌절을 드려 하나님의 소망과 기쁨을 받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최대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부분을 고쳐야 합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에 대해 믿음으로 응답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응답하여 참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드림으로 복이 온다는 것은 이교적 예배입니다. 물론 복이 따릅니다. 그러나 예배를 마땅히 드려야 함에도 드리지 않음으로서 어려운 일을 만나고 예배를 회복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말씀을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드림으로 복을 받는다고 하는 복을 받는데 예배가 전제 조건이 아니라 마땅히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기에 그 은혜에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 기독교 예배의 본질이라는 것을 항상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화려한 장소에서 화려한 예배 성물과 화려한 사람들, 그리고 아주 좋은 예배의 순서에 따라 예배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그 예배 가운데 빠지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배는 건물이 아니라도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의 순서는 뒤바뀔 수도 있고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빠지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구약성경에서 는 법궤를 통하여 임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을 통하여 임재 하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성령이 임재하지 않으신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의 행사에 불과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님의 임재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우리예배의 자세, 예배에 임하는 정신은 어떠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내용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책임지고 있는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이유는 외교 사절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인공인 내시를 가리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라는 것을 밝힌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적어도 에디오피아는 아프리카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으로서 예수를 믿은 사람이요, 아프리카인으로서 최초의 예배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에디오피아에서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 올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만큼 부와 권세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잘 드리다가도 부를 누리거나 권세를 가지면 그 부유함과 그 권세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에 현장을 살피고 주일에 선거유세를 하고, 주일에 당무를 해야 하고, 주일에 집무를 해야 하고, 특정 종교를 믿는 것을 백성들에게 드러내어서는 안된다고 하여 예배드리는 것조차도 겁을 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에디오피아 내시는 자신이 최고의 통치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통치자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형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멀리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올라왔다는 것은 그의 믿음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국고를 맡은 내시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국무총리거나 아니면 재무장관쯤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바쁜 사람입니까?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공사다망 하신 어른이 예배 한 번 드리기 위해 수천리길을 걸어 왔다는 것은 그의 열심 있는 신앙을 알 수 없습니다. 에디오피아가 애굽의 남쪽에 위치한 나라로서 3000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인데 수천리나 되는 예루살렘까지 많은 종들을 데리고 병거를 타고 왔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와 같이 예배는 성심 성의가 필요합니다. 그 마음에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요즘 우리는 자동차 때문에 거리의 개념이 멀어졌습니다. 걸어서 다니던 시대의 개념으로 보면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도 이제는 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동차로 오는 거리가 불과 얼마되지 않는데도 멀다고 합니다. 결국 거리가 멀고 가까운 것의 판단은 우리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 10리를 걸어서 다니고 5리를 걸어서 새벽기도회를 다녀도 멀다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거리의 개념이 아닙니다. 거기에 말씀이 있다면 한시간 걷는 것은 괜찮습니다. 자전거를 타고도 한 두 시간씩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물론 당시에는 교회가 많이 없던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중국에는 처소교회가 많습니다. 교회에 소속이 되어 있어도 거리가 멀고 자동차로 가려고 해도 차비가 없어서 가정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멀리서 예배하러 오신분 계십니까? 그 예배를 하나님이 귀히 보실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보다도 먼저 집을 나서야 하고 준비해서 오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가지되 열심 있는 믿음 생활을 하십시오. 우리가 많은 시간을 들여 수고와 노력을 바칠수록, 땀과 흘린 눈물이 많을수록 그 일의 가치가 높고 소중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땀을 흘리고 비를 맞기도 하고 찬바람을 쏘이고 먼 거리를 차를 놓쳐서 걸어서 오실 때, 걸어서는 아니라도 예배시간 늦지 않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많은 비용을 들여 택시를 타고 왔을 때 그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받지 않겠습니까? 예배드리러 올 때에 말씀을 갈망하는 마음을 준비하십시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내시가 예배하러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길에 성경을 읽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긴 여행길입니다. 이제 먼길을 올라와 예배를 드리고 내려갈 때쯤 되면 피곤합니다. 그러면 이제는 병가에서 잠을 자거나 가는 길에 좌우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면서 내려갈 수 있을 것인데 내시는 구경하지 않고 잠자지도 않고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을 보면 진리탐구에 대단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길이 어떤 길입니까?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인데 그 길은 광야라고 했습니다. 즉 사막이라는 뜻입니다. 모렛바람이 불어오고 날씨는 덥고 짜증스러운 기후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환경을 탓하지 않고 병거에서 구약성경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우리 형편을 말하면 어떤 성도가 경운기를 타고 먼 곳에서 예배를 드리러 왔다가 예배를 마치고 가면서 경운기를 타고 가는데 바람도 불고 햇볕도 내려쪼이는데도 성경을 읽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함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진리에 대한 간절한 마음,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은 내시도 성경의 뜻을 잘 모르면서 읽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알면서 읽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뜻을 잘 몰라도 읽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을 다 알고 읽으시려고 하지 마시고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읽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열심 있는 신앙을 가진 내시를 위해서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빌립을 부르시고 빌립을 급하게 파송했습니다. 내시 한 사람을 위해서 단기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성령이 빌립을 불러서 급히 내려가라고 했고 빌립은 순종하여 내려갔는데 바로 에디오피아 내시가 병거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내시에게 다가가서 \\\"이사야의 글을 깨닫느뇨?\\\"라고 했습니다. 그때 내시의 대답은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성경학자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전문적인 신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뜻을 몰라도 펴고 읽으십시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오시면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시면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빌립을 보내주시어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성령을 통하여 가르쳐 주시고 목사를 통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목사를 통하여 설교를 듣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알기 위한 갈망과 열심있는 믿음의 삶을 살면 하나 님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예배를 드리고 내려가는 내시가 예루살렘에 올라와도 다 몰랐습니다. 여러분이 예배 한번 드린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한번 읽었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말씀을 읽고 성령이 조명하시는 은혜를 따라 조금씩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이탈리아 군대 백부장 고넬료가 있는데 그는 경건한 생활로 늘 기도하며 구제하는 사람으로서 하루는 기도중에 천사를 보내어 말씀하시기를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기에 네 종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해서 그대로 시행하여 베드로를 통해 설교를 들은후에 온 집안이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고넬료집에 도착했을 때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하는 말이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을 듣고자 하여 하나님 앞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말씀에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경건한 성도에게는 멀리 있는 목회자를 보내서라도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와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사역을 감당하실 때 어느날 마리아와 마르다 집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마도 무엇이든지 다 드려도 아까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동네로 들어가 자랑하며 잔치를 벌여도 괜찮을 일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부엌에 들어가서 음식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 무릎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불평투로 자기 동생 마리아가 자기 일을 도와주도록 하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시기를 \\\"마리아는 좋은 것을 택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우선에 두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좋은 예가 됩니다. 우리가 믿음생활 하는데 너무 쓸데없는 일에 분주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본질을 잃어버리고 비본질것인 것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예로 들어봅시다. 추석이 내일 모래입니다. 일가 친척들이 모이게 되면 무엇을 준비합니까? 음식 장만입니다. 먹기 위해서 모이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먹는 것 준비한다고 야단법석입니다. 없는 돈에 시장에 가서 비싼 물건들을 장만하여 밤새도록 일하여 가족들이 나누고 손님들을 대접합니다. 예수 안믿는 가정에는 조상들을 위하여 생전에 먹어보지도 못한 음식을 준비합니다. 생전에 비사서 한 번도 사드리지 못한 것들도 상에 올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많이 준비하다 보니 설거지도 많습니다. 명절이 끝날 때쯤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동서가 일을 안했다느니, 형 아우끼리 티격태격 싸우고, 집에가면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습니다. 모처럼 시어머니의 선물을 사들고 온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를 비교하는 등 상처 받은 사람들이 생겨 점차 해를 넘길수록 가족간의 갈등이 더 심화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생긴 병이 명절 증후군이라는 병까지 생겼습니다. 명절이 되면 머리가 아프고 몸이 쑤시고 명절이 끝나면 며칠씩 앓아 누워야 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특히 종가집 맡며느리들은 더 심합니다. 우리 가족들이 이번 추석에 모여서 정말 해야할 일은‘무엇을 얘기할 것인가?, 누구를 도울 것인가? 어떻게 믿음생활을 잘 할 것인가?’하며 대화하고 기도하며 예배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번 추석만은 음식장만 하다가 시험 들지 말고 서로 대화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가정에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여러분이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은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일은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일은 하더라도 예배를 귀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자녀들이 바르게 크고 이 교회가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또한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발아래 부은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비난했습니다. 천만원이 넘는 그 비싼 향유를 왜 허비하느냐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낫다고 비난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네 말이 옳다’고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가만 두어라 가난한 사람들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항상 있지 못한다. 저가 나에게 향유를 붓고 섬기는 것은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제하는 것 보다 예배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주는 것 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더 귀합니다. 이런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역시 다른 구제하고 봉사하고 이웃을 섬기는 일도 잘합니다. 교회에 하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은 이웃에게도 잘하지 못합니다. 의로운 척 하는 것일 뿐입니다. 참된 예배는 그 어떤 일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어느 백화점에서 세일을 하면서 선착순 몇 백명에서 선물을 준다고 하면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가는지 새벽부터 그 백화점 일대가 온통 마비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처 준비하지 못해 다 몰려온 사람들에게 선물을 다 주지 못했더니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고 데모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천원짜리 컵 하나 준다고 하니까, 요구르트 한줄에 5백원 하는 것 백원에 준다하니 부자 가난한 사람 할 것이 사람들이 새벽부터 그렇게도 몰려들어 싸움하는 사람들이 천대까지 하나님께서 복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그 축복이 있는 예배시간을 소홀히 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백화점 세일의 몇 백원 또는 몇 천원짜리 선물보다도 우습게 여긴다면 신앙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옛말에 소금 먹은 자가 물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갈급한 심령이 있을 때 생수를 마음껏 마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예배에 대한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거리에 상관없이 환경에 관계없이 주일을 지키며 예배에 참여할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가 풍성하게 내릴 줄로 믿습니다. 창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전쟁에 이기고 돌아옵니다. 살렘왕 멜기세덱 제사장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합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그를 향해서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때 옆에 있던 소돔왕이 말합니다.“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다 가져라”아브라함이 대답을 합니다“당신이 나를 부자되게 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말이 듣고싶습니다”라고 거절합니다. 그러니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하늘의 별과 같이 축복해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만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게 아무나 준다고 다 복이고, 성공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아무 것이나 다 받아 성공할 수 있지만 복은 아닙니다. 성공은 불신자도 할 수 있지만 복은 하나님을 잘 믿는 하나님의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내시의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은 겸손과 빌립의 가르침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우선은 그렇게도 권세있는 자가 길가는 사람을 불러서 자기 병거에 함께 올라타게 만들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읽고 있던 성경 이사야서 53:7-8절을 다시 읽어주면서 하는 말이 \\\"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같으면 빌립이 내시가 타고 가는 병거에 가까이 다가와서 \\\"당신이 읽는 것을 아느뇨?\\\"라고 했을 때 \\\'당신이 하는 일이나 잘 하구료\\\'하거나 아니면 당신이 누구인데 남의 일에 간섭하느냐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내시는 전혀 그런 모습을 하지 않고 오히려 빌립을 자기가 타고 가는 병거에 올라앉게 만들고 그에게 모르는 것을 솔직하게 시인했다는 것과 그리고 그에게 그 뜻을 물었다 는 것은 내시의 알고자 하는 욕망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이보다 더한 것은 빌립이 이사야서 53장 7-8절 말씀이 표현하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설교를 했을 때 곧바로 그 설교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빌립과 함께 시내로 내려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더 아름다운 겸손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에디오피아 내시를 위해 성령님은 역사하고 있습니다. 빌립이 움직였지만 결국 성령님께서 활동하신 것입니다.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왔으나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고 집으로 가면서 그리고 성경을 열심히 읽음으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예배란 단순히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한시간 예배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배 드리고 가는 도중의 모습에서도 하나님은 놀라울 정도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배 드리는 아름다운 마음, 열심있는 마음으로 드린다면 드리는 그 순간에도 은혜 받지만 예배드리러 오고 가는 길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제 저녁 어떤 성도 가정에 추도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아들 하나에 딸이 넷인데 어머니와 아들가족과 막네 결혼하지 않은 딸만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 이들 형제가 의가 좋아서 오빠의 명은 곧 법입니다. 그래서 멀리 원주서 오시고 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녁식사를 하고 난 다음 맏사위가 대구 시내에서 큰 金房을 하는데 그 분이 솔직한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양해 하십시오. 제가 여기에 올 때는 뭐하러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나. 7시에 목사님 오신다고 하니 우리가 좀 천천히 가자. 그리고 팔달교에 가면 이시간 차가 많이 밀리는 시간인데 아마 여덟시가 넘어야 도착하지 않겠나\\\"그러면서 왔는데 \\\"차는 밀리지 않고 얼마나 시원스럽게 왔는지 모르고 목사님 모시고 예배드리면 피해 버릴까 하다가 참여했는데 정말 좋습니다. 오늘 제가 너무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대단히 좋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본인이 예배에 대한 갈급한 마음이 아니더라도 다른 가족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를 준비하니 이렇게 막히던 차도 막히지 않고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이 모두가 하나니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물며 예배를 정성스럽게 준비된 마음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예배를 소중히 여기시고 예배를 드리되 정성스럽게 그리고 예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드리셔서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성령이 임재하시는 예배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