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의 표적 행4:23-31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에 일어난 모든 이적과 능력의 역사 뿐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사도들의 사역과 그들의 거룩한 수고로 인한 것이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행하시는 역사를 기록한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우리들이 사도행전을 읽으면서도, 사도들이 어떻게 성령을 받아서 역사하였는가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의 주체자가 되시는 성령님께서 그의 일군된 사도들을 어떻게 고용하심으로 역사하시는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같은 원리를 따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충성하는 것 같고, 우리들의 열심으로 이루는 지는 것 같이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실은 아닙니다. 연약하고 부족하고 어리석은 인생으로서는 감히 알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심히도 크고 중차대한 구원의 사역인데, 이것이 어떻게 우리 힘과 지혜로 이루어지겠습니까? 다만 우리들은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심을 따르는 것 뿐이요, 우리들의 있는 힘을 다해 수고할 때에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는 그 과정을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암만 훌륭하고, 놀라운 감동의 설교를 했다고 해도 한 설교에 삼천명이 회개하고 또 두 번째 설교를 듣고 오천명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런 일이 베드로가 말한대로 인간의 개인의 권능과 경건에서 가능하겠습니까? 이 모든 역사를 일으키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 증거는 이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와 스데반의 설교 어떤 설교가 낫습니까? 다 능력있는 성령의 충만한 증거입니다. 같은 성령의 크신 능력의 설교지만, 베드로의 설교에는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는 회개의 부흥의 역사가 있었는데, 스데반의 설교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는 돌을 들어 스데반을 쳐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의 설교가 잘못된 것입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다만, 이 때는 이렇게, 저 때는 저렇게 반응이 나타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우리가 바로 알 것은 그렇다고 베드로의 설교만 성공적인 결과를 맺은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당장에 효과를 본 것은 아닙니다. 스데반은 자기 설교 때문에 돌에 맞아 죽으므로 허무하게 끝난 것 같지만, 그 설교를 하고 장엄하게 돌에 맞아 죽는 그 장면을 낱낱이 지켜본 그 사형 현장의 증인으로 세워졌던 사울이라는 청년은 이 일로 인해 뒤에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 바울 한사람을 회심시킨 설교지만, 바울로 통하여 이방인을 구원하는 선교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그 가운데는 유식한 사람도 있고 무식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형편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오늘도 여러 모양의 사람을 강권적으로 고용하시어 자신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가심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사건을 살펴보는 보면서 지나간 옛날 이야기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 때 사도시대 때에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붙들고 역사하시던 그 성령께서 지금까지 교회 역사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붙들고 역사하셨고,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붙들고 나를 붙들고 역사하신다는 진리를 깨닫고 믿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늘은 마지막 때가 가깝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더욱 강한 능력으로 붙드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이심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진리를 살펴보면서 일방적인 지식만을 취하면 크게 위험한 신앙이 됩니다. 성령충만한 자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제는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 어려움도 없고 만사형통한 것입니까? 성령충만한 사도 시대에 그 성령의 크신 능력이 역사하는 때에 있음에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과 교회에게 세상이 주는 핍박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충만하면 핍박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 핍박이 없고 고통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기대입니다. 흔히들 장사도 잘되고 시험에도 합격하고, 그리고 항상 건강하고 만사가 형통해야 그것이 성령 충만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하다면서 어떻게 고난 당하고 죽고 쫓겨나고 비난당하고 핍박을 당할 수 있느냐, 그것이 말도 안된다.\\\' 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 구하는 기도를 힘있게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주시옵소서...성령충만 성령충만... 그분은 계속해서 성령충만을 갈급합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성령충만을 구하느냐고 물으니 성령충만해야 장사가 잘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웃어넘길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체로 우리는 성령충만 하면 모든 일이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성령론을 다루면서 이렇게 교인들을 미혹했던 것입니다. 물어보겠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면, 감옥에 들어갔다가도 옥문이 열려서 나와야됩니까? 병이 들었다가도 나아야 합니까?
보십시오. 성령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핍박당하고 체포당하고 위협 당하고 순교 당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이 핍박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들은 핍박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세속적 성공주의는 잘못된 복음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질을 떨어뜨리고, 능력을 잃어버린 비겁한 그리스도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왜 고난이 있습니까? 왜 베드로는 체포당하고, 야고보는 목베임을 당하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까? 왜 우리는 집에서 쫓겨나야 합니까? 왜 우리 산업을 빼앗겨야합니까? 우리가 굶주리고 헐 벗어야합니까?\\\" 이렇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저들은 이 핍박을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계시는 것입니까, 안계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어떻게 핍박을 받아들이는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핍박을 하나님의 능력과 뜻 안에 있는 일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핍박이 일어났지만, 결코 그 고난이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 밖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도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예정하신 것을 행하려고(28절)\\\" 이는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이는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고난과 핍박과 환난과 질병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 밖에서 하나님의 능력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 은 절대로 없습니다. 믿으십니까? 그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안에서 말입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얼마나 다릅니까? 하늘이 땅에서 먼 것 같이 우리들의 생각은 미천한 땅에 있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은 지극히 높고 거룩한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고 살지만 하나님은 알고 사십니다. 우리는 현재에 매이고 있지만 하나님은 미래를, 저 앞을 내다 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리석기 짝이 없지요. 우리가 무엇을 더 고집하겠습니까? 보십시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사람들은 환난과 핍박을 하나님 앞에서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가 그들은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계획 가운데 있어진 일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벗어 난 것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일어나는 사건을 어쩌다 보니까 일어난 일이거나 우연한 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원 전 예정한 일이 나타나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지 않으시는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의미 없이 이런 저런 현실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을 가진다면 담대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방해하고 핍박하는 자들에게 서 있을 지라도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 모든 것을 행하시기에 능하신 분의 계획 가운데, 능력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십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놀랍게도 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극히 미천한 나를 통해서 오늘도 역사하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을 주셨느냐? 하나님께서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고난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어나는 고난과 핍박을 복음 전파를 위한 필수적인 사건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이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핍박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이루시기 위해서도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그 고난의 맥락을 알았습니다. 지금 당하는 이 고난은 죄 때문도 아니요 저주 때문도 아니요 형벌도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이 고난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연계된 사건이라고 하는 높은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는 고난이 예수님께서 당하신 그 고난과 연계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야 문제가 없지요. 당할 만하지요. 얼마나 고상한 고난이겠습니까? 내 생의 의미 자체가 고상해지는 것이거든요.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한 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 부활의 영광에 참예한 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27, 28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더니 그것도 모자라 오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려고 이 성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과 빌라도가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자,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린 것 같지만, 이 모든 것들도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예정된 것이요,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고난의 의미를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의미에 연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비슷한 의미의 고난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려 한다고 말씀함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지금 우리를 죽이려 한다고 말씀함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들이 지금 우리를 핍박하려 한다고 말씀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라고 고난을 기뻐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내 고난에는 그리스도적 고난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기쁘게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고난 당한다고 다 슬픈 것은 아닙니다. 어떤 성격의 고난을 받았느냐가 문제입니다. 정말로 그리스도적 고난, 십자가적 의미의 고난을 당할 수만 있다면 매맞는 것이 문제입니까? 죽는 것이 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고난의 성격, 고난의 의미가 문제입니다. 이렇듯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한 고난의 의미를 높은 가치에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때문에 추호의 걱정도 두려움도 없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선교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핍박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시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때에 일어나는 환난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이 없어야 전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환난 없이 전도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 지시고 고난 받으심으로 이루신 십자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전달되는 과정 속에 수많은 박해와 고난과 희생의 죽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말하면서, 고전 16:9에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했습니다.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려고 가려했는데,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려는 일정을 뒤로 미룬다고 했습니다. 왜 입니까? 박해가 시작된 이 때가 효과적으로 복음이 전파되려는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 생강에는 교회는 고난이 없으면 부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신앙에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 교회가 문을 닫습니다. 신자의 수가 줄어듭니다. 박해를 받을수록 복음은 더 강하게 전해지고, 신자들의 믿음은 진실하게 만들어집니다. 이는 교회 역사에서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함께 모여서 기도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고, 하나님께서 주장하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면 다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에 기도해야합니다. 기도할 때에 이 믿음으로 기도해야합니다.
그들의 기도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29, 30절).\\\" 그들이 당연히 고난을 면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특별히 그 사건 자체에 변화가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이 달라지기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핍박도 없게 하여주시고, 고난도 없게 하여주시고...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환경의 변화를 위하여 하는 기도가 결코 아닙니다.
세상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은 그대로 두고 그 현실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이 환경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환경의 변화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그 환경 그대로가 하나님의 경륜과 뜻이니까요. 이 현실에 내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것만 바랄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특별히 자신의 안일이나 평안을 위하여 기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 환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담대하게 해주옵소서. 대적 앞에서 비겁해지지 않게 해주옵소서. 일어나는 핍박을 겁내지 않게 용기를 주셔서 복음을 바로 전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기도입니다. 여러분, 성령충만의 목적이 장사가 잘되고 시험 합격하는데에 있지 않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하여 고난의 선교적 의미와 그 효과적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기도와 응답 사이에 아주 중요하고도 미묘한 관계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의 기도 속에는 충만하게 해달라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더니 성령이 충만해졌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성령 충만은 개인적 신비체험이 아닌 것입니다. 충만은 복음 전파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소인 것입니다. 저들의 궁극적 목적은 핍박을 면하자는 것도 아니요 안일하자는 것도 아니요 영광을 누리자는 것도 아니요 명예를 구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용기 있게 전하자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게 해주옵소서,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말씀을 전하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또한 성령충만한 표적으로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하는 능력을 달라고 했습니다.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성령충만을 주심으로 그 모인 곳이 크게 진동하고, 그들이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맥락을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이제 비겁하고 소극적인 기도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꾸 뒤로 도망가면서 말로만 \\\'하나님, 저로 복음을 전하게 해주세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세요\\\'하는 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온다해도 어떤 담대함을 가져야합니까?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계획과 권능 가운데 있음을 믿습니다. 고난 없이 복음이 전해지지 않음을 믿습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제물로 바쳐도 좋고 핍박을 받아도 좋고 환난도 좋고 가난도 좋고 질병도 좋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해주세요\\\'하고 진심으로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에 필요한 모든 은사를 더하실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더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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