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과 기도 행1:12-14
여러분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보면 복음서의 교회와 사도행전의 교회의 차이점을 뚜렷하게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의 교회라 그러면 제자 공동체를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과 복음서의 제자들을 비교하면 너무나 대조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 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12 제자들이 동일하게 사도행전에 나오는 12 사도들입니다. 동일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생각들이나 행동들을 보면 전혀 다른 사람같아 보입니다. 그 제자들이 내나 그 사도들입니다. 사람은 같은 사람들인데 사람들이 영 달라 보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다르게 만든 것일까요? 복음서의 주인공은 예수님이고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성령님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의 능력에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님도 하나님이십니 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볼 때 신학적으로 말하는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점진적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에 관한 진리를 계시하실 때에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알려주지 않고 점진적으로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타락했을 때 요한계시록까지 다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따라 조금 씩 조금씩 구원에 관한 진리를 알려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를 받는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더 많은 말씀을 하고 싶었고, 더 깊은 얘기를 하고 싶었으나 제자들이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속으로 삼키신 적이 많습니다. 지난 주일에 함께 나눈 요한복음 16:12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도 제자 들에게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복음서의 제자들, 다시 말해 복음서의 교회의 모습을 보면 지지부진입니다. 지리멸렬입니다. 미성숙합니다. 세속적입니다.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예수님을 알아도 자기들 방식으로 압니다. 자기 수준에서 알뿐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교회/ 즉 예수님의 사도들은 능력(powerful)이 있습니다. 성숙합니다. 영적입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압니다.
그 비밀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능력이 성령님의 능력보다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다 깨달아지는 것들도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깨닫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어릴 때 할머니 할아버지를 통해 자주 듣던 말이 무엇인 줄 아세요? \\\"너희도 이 다음에 크면 알게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할머니들끼리 길쌈을 하시다가 무슨 말씀을 한참 재미있게 나누는 것을 옆에서 듣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시다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궁금해서 묻습니다. 할머니 그 말이 무슨 말이예요? 그러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이 다음에 크면 알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습니다. 그 당시에 할머니가 말씀해 주시 지 않았던 이유는 아이가 알아들어서 별 유익할 것이 없다 싶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제자들은 그 관심사가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것에 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무리 알아듣게 말씀을 하셔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된 일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더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곰곰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예수님 과 함께 따라다닐 때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따라다니기도 바빴거니와 조 용히 앉아서 사역을 정리할 시간적 여유조차도 없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따라다니기에 급급했습니다. 자기들의 능력이 예수님의 능력인 것 같았고, 예수님의 능력이 자기들의 능력인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 옆에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시고 난 후에는 사태가 다릅니다. 이제는 끈 떨어진 신발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문제가 터지면 제자들 스스로 해결을 해야 합니다. 기가 찰 일 입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을 그대로 제자들이 해야할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발견한 비밀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사실 복음서의 제자들은 기도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무엇이든지 예수님으로부터 얻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필 요성을 구태여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시고 난 후에 예수님의 사역에 그 토록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게 된 원인을 간파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기도생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역을 하실 때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서 사역을 했다면 구태여 기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누구에게 기도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서 사역의 모델이 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연 약한 인간으로서 숱하게 많이 기도했습니다. 위기 때마다 예수님은 기도하기를 쉬지 않 으셨습니다.
크고 작은 모든 일에 기도를 생활화하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고 난 후에 사도들이 즉시로 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기도였습니다.
제자는 급할 때는 스승이 하던 그대로를 따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 로 떠나가신 후에 제자들이 즉시로 깨달은 진리가 있다면 예수님처럼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로 간구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깨달음 치고는 정말 값진 깨달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서의 제자들의 특징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제자들의 특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야말로 능력을 얻는 통로요, 기도야말로 지혜를 얻는 통로라는 것을 사도행전의 r교 회는 드디어 깨달은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특징은 기도하는 모습이 수도 없이 많이 나타 난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이 나타났던 현장에는 언제난 간절한 기도의 부르짖음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120여명이 간절히 기도하는 시점은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하늘나라로 승천하신 후입니다. 그러나 아직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기 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미 승천하셨고 성령님은 아직 강림하시기 전입니다. 그러니까 불과 10일 정도의 기간입니다.
예수님을 떠나 보낸 사도행전의 교회는 불과 10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아주 민첩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을 때는 자신들의 기대가 일시에 무너지는 것 같아서 모두가 하나같이 실망했고 절망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재차 듣게 되었습니다. 부활 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새로운 눈을 뜨게된 신약의 교회는 드디어 예수님의 입 장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재점검하고 재정립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음에 정복당하고 말 연약한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야 할 필요성 때문에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얼마나 크나큰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기까지 했던 예수님이었는데 죽 어버렸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으로서는 절망 가운데 있는 제자 들에게 희망을 주고, 믿음을 주기 위해서 당연히 살아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과 살아있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그토록 참담한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을 그냥 버려두실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활하셨고 부활하셔서 자신이 살아났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여러 번에 걸쳐 확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 나라의 일들 을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사역하시면서 제자들에게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메시지의 주제가 뭐였습니까? 한 마디로 요약해 보라면 하나님 나라의 일들입니다. 그런데 왜 3년 동안이나 말씀하신 그 주제를 부활 후 40일 동안 또 다시 되풀이 말씀합 니까? 왜냐하면 제자들의 관심은 아직도 하나님 나라의 일들에 가 있지 않고, 세상 나라 의 일들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관심은 아직도 세상 나라에 가 있습니다. 자기들의 조국 이스라엘 나라에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독립이라고 하는 자기들의 현실 문제와 연관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일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아직도 자신들의 관심사에 관심이 있지 하나님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진지한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의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관심 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 나라의 일들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 세상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것 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적과 기사를 통해서 권능으로 이루 어질 줄로 알고 있습니다. 드러나 보이는 휘황찬란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줄로 기대했습니다. 권력적인 형태를 띠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줄로 기대했습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 로마라는 나라를 상대로 해서 어떤 행동을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참하게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그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 충격에서 도무지 헤어나지를 못 하고 있었습니 다.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부활하셔서 자기들 앞에 나타나 셨습니다.
그래서 부활 사건은 또 하나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며칠 상간에 극과 극을 달리는 충격적인 사건을 연이어 접하다 보니 제자들로서는 정리가 잘 되지 않아서 얼떨떨한 상태에 있습니다. 제자들의 수준이 이러하니 예수님으로서는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또 다시 말씀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승천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통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들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이 점을 염두에 두시고 성령님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을 해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지 말고 기다리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왜 성령님을 보내셔야 하 며,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왜 성령님을 받아야 합니까?
먼저 예수님의 입장에서 성령님을 보내셔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자신의 사역을 이제 마감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은 늘 함께 계시지만 각자가 고유한 자기 자신만의 인격과 사역의 영역을 가지고 계신다. 삼위 하나님은 독특한 자신만의 존재 양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삼위 하나님 은 서로 섞이지도 않고, 서로 분리되지도 않으시면서 영원토록 함께 존재하여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을 질서 정연하게 서로 의논하셔서 진행하십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모든 일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상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이후의 일은 성령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미련없이 하늘 나라로 승천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뢰 때문에 어설픈 12 제자들을 남겨 두신 채 유유히 하 늘 나라로 가실 수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성령님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 일까요?
제자들의 연약성 때문입니다. 어떤 연약입니까? 육체적인 연약 때문이 아니라 신앙적인 연약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아직 연약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돌봄을 받아야 했던 것처럼 지금도 연약하기 때문에 성령님의 돌보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연약하지 않다면 당연히 우리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필요 없겠지요. 그 러나 인간은 연약합니다. 연약할 뿐만 아니라 범죄 타락으로 말미암아 완고합니다.
인간이 연약하고 완고하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인 간은 연약하고, 하나님을 위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완고합니다. 반대로 인간 은 자기를 위한다는 점에서는 강합니다. 그러니 연약하면서도 완고한 제자들을 3년 동안 지켜본 예수님으로서는 염려가 될 수밖 에 없습니다.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획대로 성령님을 보내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야만 했던 더 중요한 이유는 교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회원들의 믿음이 연약했기 때문에 성령님이 오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이름이 뭐죠? 보혜 사입니다. 보혜사란 말은 위로자, 상담자, 권위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염려가 무엇입니까? 제자 들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 상태의 제자들 만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 는 일은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확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들을 보살폈던 것처럼 성령님이 제자들을 감동하시고 간섭하실 것 을 믿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승천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떠나간 후의 일 들을 제자들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맡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16: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더욱 유익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일까요?
성령님이 보혜사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특별히 우리의 어떤 연약함을 도와주십니까? 예수님이 육신을 가지고 계심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시공간의 제한을 받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오시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육신을 가지고 있지만 성령님은 영이시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기만 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영으로 성령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 깨어있으면 언제라도 성령님의 감동을 받을 수도 있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 을 수도 있고, 성령님의 지시를 받을 수도 있고, 성령님의 생각을 확인할 수도 있고, 성 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유익입니까? 엄청난 유익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전능하신 하나 님의 영과 교통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유익이며 부요이며 특권입 니다.
이런 복을 우리 같이 받은 피조물이 땅 위에는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육신이 아 닌 영으로 구약 시대보다 더 선명하고 가깝게 우리 가까이 와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령 속에 와서 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우리 안에 와서 거하고 계시는 성령님과 교통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분명히 영으로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 하고, 번번이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보여주 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파악한 제자들에게는 이제 다시 영으로 오시는 성령님과 관계하기가 훨씬 수월해진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누리는 유익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 좁은 유대 나라 주변에서만 활동 하셨지 다른 나라들에는 가지도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 의 사역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님이 오시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모든 영역 에까지 영향력을 줄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언제 어디서든지 제자들을 보살펴 주실 수 가 있으니 예수님으로서는 성령님을 보내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믿음이 연약한 상태에 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아직도 여 전히 세상적인 일에 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관심의 방향을 돌려놓는 일이 급합니 다.
제자들의 관심의 방향을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세상 나라의 일들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들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 일들의 성격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현 실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두신 채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조국 이스라엘의 독립이라고 하는 제자들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서 제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들에 먼저 관심을 가지기를 원하고 계시고, 성령님에게 관심을 가지기를 원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잘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우리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적하고 오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살다가 빚을 질 수도 있고, 또 건강을 잃을 수도 있고, 또 직장을 잃을 수도 있고, 결혼 생활에 실패할 수도 있고, 남편과 자식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장 낫는 것이 필요하고, 당장 내 집이 필요하고, 당장 취직이 필요하고, 당장 결혼이 필요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현실 문제에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으십니다.
또 그 문제를 해결해 주고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 많은 병자들도 고쳐 주셨고, 귀신들린 자들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우선 순위는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이 당한 현실 문제가 우선 순위겠지만 예수님에게는 그것이 우선 순 위가 아니라 여러분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우선 순위입니다. 여러분이 하나 님을 만날 수 있다면 예수님으로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십니다.
여러분이 질병에서 나아서 하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예수님은 얼마든지 여러분의 질병을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집을 주고, 건강을 주었더니 하나님 나라의 일에 열심내기 보다 또 다른 욕심을 부린다면 그것은 고려해 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미덥지가 않아서 여러분의 현실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는 것이지 여러분이 밉거나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아서 현실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현실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여러분에게 알려주고 싶어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앓고 있는 질병이 낫는 것보다 그 질병으로 인하여 여러분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것이 여러분이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더 유익하기 때문에 당장 그 병을 고쳐 주실 수 없는 주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런 점에서 정말 믿음이 연약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 문제에 가장 관심이 많고, 현실 문제를 가장 다급한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정말 산을 들어 옮길 만한 믿음을 발휘합니다. 우리의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거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잠을 자지 않고, 밥을 거르기를 예사롭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관심하시는 일이나 하나님의 우선 순 위에 대해서는 안타깝게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잘 발휘를 못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감으로 버티기를 수도 없이 많이 합니다. 이것이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의 연약성입니다. 나 자신을 위한 일에는 거의 목숨까지도 걸지만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는 일에는 목숨을 걸기는 커녕 온갖 궁리를 동원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습니다. 맞습니까? 예수님이 보실 때 제자들이 이런 수준이고, 우리들이 이런 수준이니까 어떻게 성령님을 보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성령님을 보내실 수밖에 없는 예수님 의 그 안타까운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현실 문제에만 죽도록 관심하고, 그것 때문에 염려하고, 그것 때문에 인색하고, 그것 때문에 속 태우고, 그것에 매달려서 도무지 헤어나지를 못하니까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실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철저히 나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세상 재미를 즐기는 자리에 가 있 을 것입니다.
이렇게 화창한 날씨에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보니 여러분은 분명히 성령님 을 모신 분들인 줄 믿습니다. 아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나 하나님 나라의 일들에 관여 할 생각이 없다면 당연히 성령을 받을 필요도 없고, 예수님을 믿을 필요도 없겠지요.
그냥 세상 사람들이 사는 넓은 길로 가면 그만이겠죠. 그러나 이왕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고 하나님 나라의 일들에 관심하면서 살려면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니까 성령의 권능을 덧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성령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절박하게 필요한 분입니까? 예수님을 떠나보낸 120 여명의 교회 식구들은 자연스럽게 기도를 해 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는 더 이상 당면한 현실 문제나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 문제에 매달릴 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들에 헌신해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습니다. 참으로 얼마 만에 깨닫게 된 진리입니까? 예수님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가르치고 말 씀하셨건만 생각이 돌아가지 않던 제자들이 아닙니까? 그토록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노래를 불렀건만 생각이 바뀌지 않았던 제자들이 아닙니까?
그토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당부했건만 졸며 잤던 제자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은 자기들 스스로 깨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한 두 사람만 깨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가 깨어서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변화가 아닙니까?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까?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사 람에 대한 기대와 소망 만큼은 절대로 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말 사람이 언제 변화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정말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우리가 모르는 일에 대해서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되겠습니 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 곁에 머물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 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오순절이 되기까지의 열흘 동안은 제자들이 생각들을 정리하는 기간이 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사도들을 중심으로 교회는 예수님의 사역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들이 이 루어지는 방식에 대해서도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 을 때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비롯한 120명 의 성도들은 기도해야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예수님이 승천하고 없는 이 시점에 와서는 성령님의 임하심과 역사하심과 인도하심과 감동하심 만큼 절실한 것이 없다는 것을 제자들은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당시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의존했듯이 이제는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 존해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기도했습니다. 기도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드디어 하나님의 관 심사에 관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 령을 받고,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일을 위해 합심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기도로써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모함으로 간절히 기 도 하십시다. 중요한 것은 하나되어 기도하고,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전심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도가 아직 살아있는 교회가 있다면 한국교회입니다. 외국인들이 한국 그리 스도인들이 드리는 통성기도를 korean style의 기도라고 합니다. 간절하고도 뜨거운 마 음으로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는 거의 사도행전적인 수준의 기도입니다.
아직도 열심있는 교회에서나 기도원에 가 보면 그런 식의 기도가 드려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기도의 자리에서 함께 기도를 드리면 얼마나 힘을 얻는지 모릅니다. 기도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내 방식의 기도만 고집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여러 방식의 기도가 성경에 다 나와 있다 는 것을 참고하여 가능하다면 함께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성령의 권능을 덧입는 것이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정말 중요하다는 동 일한 인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처럼 능력있고 생명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싶은 거룩한 열망이 있는 줄 압니다. 그것 이 여러분의 개인적인 소원으로 끝나서는 곤란합니다. 여러분의 개인적인 소원이 공동체 적인 소원, 즉 교회적인 소원으로 결집되고, 그 소원이 기도의 불로 타올라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개인적인 체험이 공동체적인 체험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오순절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이 우리 교회와 우리 각 사람 위에 임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십시다. 사도 행전의 제자들과 복음서의 제자들의 삶에서 뚜렷이 차이나는 것이 몇 가지 있지만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제자들이 기도하는 제자들로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 의 삶은 이제 드디어 기도하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기도하는 정신과 중심도 달라졌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 기도하는 장면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구태여 기도라고 한다면 자기들이 필요한 것을 구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내 의지대로 사는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 의지대로 사는 삶의 태도 와 방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지대로 살기로 결정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지금 사도행 전에서 제자들의 기도가 그런 기도입니다. 굉장히 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여태까지는 자기들의 관심사에만 열심을 내어왔던 제 자들입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 더 관심 했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의 뜻에 맞추어서 기도하는 제자들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아름 다운 변화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성령님이 오실 것을 약속하셨던 주님께서 다시 한번 성령 받기를 기다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결과입니다.
그들은 기다리면서 마음과 마음들이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어느 쪽으로 모아졌나? 하나 님의 나라와 그 하나님 나라의 일들 쪽으로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이루는 일은 주님의 말씀처럼 성령을 받는 것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제자들은 주님의 말 씀하신 그 뜻을 기억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일찍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 다\\\".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드디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아 주님의 가르침에 정통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 다. 이런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교회에 치명적으로 부족한 것이 기도라는 것을 깨달았으 면 합니다. 우리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 최선의 일이 기도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은 기도에 전심전력을 기울이셨습니다. 우리가 인간 본연의 자리에서 인간임을 실감할 때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행동이 있다면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 기도를 힘쓰도록 하십시다. 그리하여 성령 의 충만함을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교회적으로 경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단과 촉구/ 여러분은 기도의 필요성을 얼마나 느끼고 있습니까? 느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의 체험과 기도는 너무나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가 그렇게 힘있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간절한 기도에 있었습니다. 코리안 스타일의 합심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새벽기도 식구들 가운데 젊은이들이 25명 이상 나오고 있습니다.
대학생들이 새벽을 깨운다는 것은 정말 좋은 조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의 231교회가 희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함께 새벽을 깨우고 밤을 깨워 기도하십시다. 인간이 일하면 인간만 일할뿐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함께 일하신다는 말도 있 지 않습니까? 우리 이 시간 합심해서 간절히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기도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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