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짐을 내려 놓으세요?

죄의 짐을 내려놓으세요/슥9:11-17 마11:25-30/2006-12-21

죄의 짐을 내려놓으세요
슥9:11-17 마11:25-30





지난 두 주일에 걸쳐서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들과는 대조가 되는 말씀을 오늘 읽었습니다. 지난 두 주일에는 무거운 말씀들이 전해졌습니다. 참 삶은 고난의 짐을 지고 십자가를 지는 길이요 좁은 길임을 그 말씀들이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와는 반대로 짐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늘 새롭게 기억하고 위로를 받는 말씀입니다.



지난 두 주일의 말씀과 대조를 이룬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만이 오늘의 말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무거운 짐을 져 보아야 그 아픔을 알고 고통을 알아서 그 짐을 져 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를 알게됩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쓰러지고 넘어지는 아픔을 겪는 사람은 그 짐을 대신 져 주는 분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을 오라고 하셨고 그리고 그 짐을 가볍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짐을 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씀은 무의미합니다.



무거운 짐을 가난이나 병고 혹은 인간들 상호간의 잘못된 인간관계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들을 항상 괴롭히는 무거운 짐들입니다. 그러나 이 짐들을 좀더 깊이 살펴보면 인간의 죄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실로 우리들을 괴롭히는 괴물은 아픔, 사고, 잘못된 인간관계 등등 그 자체 보다는 그것들을 발생시킨 인간의 죄악성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7: 15절 이하에서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바로 그 죄악성입니다.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바 악을 행하였기에 여러 가지 인간의 불행이 생긴다는 것을 바울은 너무나 잘 알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무렇게나 바람 부는 대로 살았으면 그런 고민이 있을 이가 없었겠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자기의 욕심이 시키는 대로 살면 되니까요.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늘 눌리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원하고 있는데 현실에서는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하나님의 뜻과 멀리 떨어진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원죄성이 문제로 부각됩니다.



이 로마서의 바울의 고백은 신학도들 사이에 많은 논쟁을 야기 시킨 구절입니다. 인간의 성악설과 성선설의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종교개혁자 칼빈이나 루터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주장했습니다. 이 고백을 한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중생하여 구원받은 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한 엄청난 수고를 통하여 아시아 선교 사역에 몸을 바쳤던 경험을 가진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의 원죄성을 벗어날 길이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권면 하기도 했고 “우리가 약할 때에 곧 강하다”라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인식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절대적 조건이기도 합니다. 만약 내 속에 조금이라도 선한 것이 있다고 전제한다면 나의 공로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로마 캐톨릭 교회가 타락하기 시작한 원인이 인간에게 선의 가능성을 부여함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바탕한 성선설을 기초하여 신학대계를 세웠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다름 아닌 로마 캐톨릭교회의 신학인데, 그것은 결국 교회로 기독교국을 만들게 한 원동력이 되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교회의 오만을 가져왔고 결국 교회를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한때 세상의 왕을 쥐락펴락하는 대권을 교황이 가졌었고 수많은 선한 성도들을 화형이라는 극형으로 참혹하게 죽였던 까닭도 인간의 선을 인정한 구교의 잘못된 신학에 있었습니다. 위클리프나 후쓰 같은 종교개혁자들을 화형에 처했고 지동설을 주장했던 정직한 과학자 갈리레오를 파문한 교황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도 실수하는 인간이요 죄성을 지닌 존재임을 깊이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죄인인데 어떻게 교황 무오설을 주장할 수 있습니까? 실로 교황은 하나님과 맞먹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황 이상으로 경건한 종이었고 위대한 구령사업을 이룩한 하나님의 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원죄성을 너무나 깊이 깨닫고 참회하고 있습니다. (표준새번역성경 롬 7: 20-24)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바울이 탄식하는 “이 죽음의 몸”이 다름 아닌 원죄의 인간성입니다. 이미 구원받았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의 선교 사업에 일생을 바치기로 하였고 이미 일차 전도여행과 2차의 전도 여행을 통하여 많은 생명을 구원하였고 많은 교회들을 설립했으며 이 편지를 쓰고 있는 현재도 나머지 미전도 지역을 다니면서 영혼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세 번째의 전도여행 중이었습니다. 그토록 위대한 신앙의 사람 바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자신의 원죄성을 근본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일생동안 한 일들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많습니다. 자신의 공로를 조금은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비참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바울 자신은 죽은목숨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5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서 입니다. 자신의 공로는 무효화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효과가 있어서 자신이 구속받고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백하면서도 끝에 가서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함에서 죄인인 인간의 본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안에서는 의인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같은 경험들을 하실 것입니다. 구원의 은총을 확신했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의 법에서 해방되지 못한 자신을 보면서 얼마나 자책하고 아파하고 계십니까? 적어도 여러분들은 “될 대로 되라. 난 모르겠다” 라고 포기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분들의 아픔이 있고 고민이 있습니다. 죄인이면서도 동시에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법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법 아래에서 살기에 무거운 짐에 눌립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외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머리 속에 와 닿는 내용이 각기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이 말을 주실 때는 어떤 이들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말씀으로 해석하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밥 문제가 저들의 큰짐이었기 때문입니다. 혹은 병마와 싸우던 사람들에게는 병을 고쳐주시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실로 당대에도 질병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밥이나 주고 병이나 고치시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시고 고쳐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육신의 양식이나 병 고치는 일이 그의 일이었다면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저들의 임금으로 추대되어 얼마동안만이라도 영광스럽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실로 예수는 이 땅에서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도우셔서 그들을 싸매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문제란 끝이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메시아 예수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즉 인간의 죄성을 없애주어서 비로소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인간의 한계성이 죄로 인하여 왔습니다. 인간의 고통이 죄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고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때 인간은 참 해방을 받습니다.



특히 당대의 사람들은 인간의 질병이 죄로 인하여 왔다고 믿었습니다. 죄 없이는 병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율법을 지키면 죄악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엄밀히 분석해 보면 인간의 선을 전제한 것입니다. 즉 스스로의 힘으로 죄 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불교나 유교와 비슷하게 인간의 행위의 공로가 기초에 깔린 종교가 율법주의 유대종교였습니다. 이런 종교들은 인간의 힘으로 깨끗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선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신앙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인간은 절대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진리 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 절대 신앙,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에 절대적으로 의지하여야만 비로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 기독교는 강조합니다. 이것은 동시에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현대인들에게 매력을 잃고 있습니다. 지성인들이, 무엇을 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독교 대신에 유교나 불교를 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들을 편히 쉬게 하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꼬깝게 듣습니다. 스스로의 작은 선을, 자기의 공로를 앞세우면서 결코 초라한 존재가 아니라고 우깁니다. 무엇이든 자기 스스로 책임지는 존재라고 믿습니다. 자기의 실존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지, 어째서 절대자에게 그 문제를 가지고 가야 하는 가고 항변합니다. 몸도 건강하고 지식도 많고 돈도 많고 사회적인 지위도 괜찮아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어 있는 사람들일수록 절대자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가난하고 무식하고 몸이 쇠약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된 말씀이라고 여길 뿐 자신들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다가 죽음 앞에서 생각을 고칩니다. 자기 자신의 초라함을 비로소 느낍니다. 인간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때서야 예수님의 부르심의 뜻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어서 그 무거운 짐을 예수님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늦습니다. 결국 그의 생의 마지막 짐을 자기 혼자 지고 지구를 영원히 떠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장례를 집례하면서 고집스럽도록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마지막이 얼마나 불행한가를 경험했습니다. 자기의 실존의 짐을 스스로 지겠다고 도도하게 살던 사람들이 결국에는, 마지막에는 자기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어가곤 합니다. 무거운 짐을 그대로 진 채 말입니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서만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고 실존의 무거운 책임도 그 안에서 100% 해결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은 그의 마지막 죽음 앞에서 가장 평온하게 눈을 감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아니 진 자들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 인류 모두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죄의 짐입니다. 원죄의 짐입니다. 죽음으로 이어지는 무거운 짐입니다. 이것을 안 사람은 자기 혼자서 이 짐을 질 수 없음을 압니다. 그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유일한 구세주 예수님께로 그 짐을 맡깁니다. 그 짐을 그에게 내려놓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짐을 대신 져 주십니다. 그 무거운 짐을 그에게 내려놓은 자는 참 쉼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러분 모두가 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죄의 짐이요 삶의 짐입니다. 가난의 짐도 병마의 짐도 있습니다. 종국적으로 죽음의 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발 앞에 그 짐을 내려놓으세요. 한 번 맡겼다가 다시 찾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아주 확실하게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참된 쉼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