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일하지 않는 죄 민32:1-15
지난 주간부터 지구촌은 월드컵 열기로 후끈 달아 올랐습니다. 지난 13일 월드컵 토고와의 첫 경기에서 이천수 선수와 안정환 선수가 동점골과 역전골을 장식했습니다. 우리나라도 1승을 올려서 4년전의 기적을 다시 꿈꾸고 있습니다.
토고는 국민 평균소득이 400달러도 안 되는 가난한 나라, 월드컵에 가까스로 출전했는데 약소국의 설움을 당하고 맙니다. 국가연주 때 실수로 애국가가 2번 나갈 때 선수들이 어리둥절합니다. 그러나 30분후에 쿠바자 선수가 선취골을 뽑아내고 댕댕이 춤을 춥니다.
경기도중 쓰러진 이을용 선수에게 다리를 만져 마사지 해 주던 선수의 모습이 뒤늦게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면서 네티즌 사이에서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결국, 후반전 우리나라가 2골을 넣고 역전극이 벌어지자 경기가 끝난 후 첫골을 넣은 쿠바자선수가 그라운드에 넘어져 하염없이 울기 시작합니다. 정말 찡한 장면입니다. 과거 우리나라도 저랬을텐데 . . 그 때 이영표 선수와 몇 명이 기도를 마치고 다가가서 위로해 줍니다. 이영표 선수가 쿠바자 선수의 머리에 손을 얹고(안수??) . .
네티즌 강씨는 “이영표 선수... 모두가 승리에 취해있는 상황에서 저렇게 뒤를 돌아보고 손을 잡아줄 수 있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이영표 선수와 저의 종교는 틀리지만 오늘따라 그의 기도가 거룩해 보이는 이유는 왜일까요”
또 네티즌 김씨는 “울고 있는 쿠바자 선수에게 우리의 태극전사 이영표 선수가 위로해주는 모습...골을 넣은 만큼이나 자랑스럽습니다. 승리해서 그 영광을 느끼는 것만이 승리자의 몫이라고만 생각되진 않네요. 이영표선수와 같이 상대선수를 배려할 수 있는 마음...그것이 진정한 승리자의 모습이 아닐까요”라고 . . .
이번 월드컵에서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월드컵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을 온세계에 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일 새벽 프랑스와의 격돌이 기대됩니다.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고, 또 한 종류의 사람은 사사건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은 목표가 분명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삶은 매사에 희망과 소망과 기쁨을 안겨 주는 인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은 목표를 정하는 것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삶은 모든 일에 낙심과 포기와 실망을 안겨 주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집트에서 400여 년간 노예생활을 하다가 모세의 인도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 거의 40여 년의 고통스런 세월을 보냈습니다. 고된 연단의 기간이 거의 끝날 무렵, 이스라엘 12종족이 힘을 합쳐 요단강 동편의 땅을 정복했습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만 하면 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모세는 이 일을 위하여 전쟁터에 나갈만한 사람들을 점검하며 군대를 재정비합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때에 모든 백성들에게 힘빠지게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들이 자기들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모든 백성들을 낙심하게 하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1절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의 떼가 있었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가축에 적당한 곳인지라 . . . . 5절 또 가로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그 땅은 길르앗 지역으로(민32:1-3), 큰 상수리나무들로 뒤덮인 숲지대가 있고(삼하 18:8-9), 토질이 비옥한 편이어서 지금도 그 지역은 목장지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그리고 르우벤과 갓지파의 사람들은 가축이 많았습니다. 가축이 많다는 것은 이동중인 당시의 상황에서는 풍요로운 지파였다는 뜻이 됩니다. 재산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풍요로움이, 그 넉넉함이 그들을 약삭빠르고 현실적인 계산으로 지금의 땅, 목축하기에 적합한 땅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요단강 동편이 아니라 “요단강 서편”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향한 기대보다는 ‘지금 머무는 곳이 짐승들을 기르기에 좋은 땅이니 여기서 머물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곳입니다. 출애굽해서 갈 곳이 없으니까 가는 곳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된 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시키실 때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도록 하게 하기 위해 미리 예비하신 곳입니다. 그래서 바로의 압제에서 기적적으로 이끌어 내셔서 홍해를 가르고 광야를 지나 예비하신 땅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12지파는 힘을 합쳐 요단강을 건너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르우벤과 갓지파의 사람들은 다른 10지파의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품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보기에 편하고 자신들이 좋게 보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모세가 책망하기 시작합니다. 6절, 7절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민32:6-7)
모세는 저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다른 형제들은 그 땅을 얻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 전투를 감행해야 하는데 너희는 그 싸움을 피하고 여기 머물겠다는 말이냐?’고 꾸짖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이 낙담하게 되어 사기가 떨어지게 되면 어떤 결과가 생길지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1. 이기주의가 죄가 됩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변하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가축 떼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얻은 재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형제들보다, 공동체의 평화와 안정보다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축들과 재산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공동체 전체의 유익보다 자기들이 가진 재산 관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물질의 풍요를 누리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풍요로움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사는 일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일에 방해가 되고 오히려 하나님을 외면하는 도구가 된다면 그 풍요로움은 오히려 화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업이 잘 되어서 바쁘다는 핑계로 슬금 슬금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배를 소홀히 한다면 그 일로 인해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 하면서 . . . 자기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면 힘이 됩니다. 그래서 자신감도 생기고 용기가 생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만나면 낙심하게 됩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일이 안될 것 같고, 부정적인 생각만 든다면 그런 사람과 교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형제를 낙심케 하는 것은 당연히 받을 복까지도 받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함께 협력해서 살도록 운명지어져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나만 편하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여행자가 말과 당나귀에 짐을 싣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즐겁게 여행을 떠났는데 도중에 당나귀가 먼저 지쳤습니다. 그래서 당나귀는 곁에 가는 말 에게 “내가 지금 너무 힘이 들어 견디기 어려우니 내 짐을 조금만 져달라” 부탁하였습니다. 말은 당나귀의 이 요청을 일축했습니다. “내 짐 지기도 무거운데 남의 짐 져줄 것이 무엇이냐?” 생각 했습니다. 힘에 지친 당나귀는 결국 얼마 못 가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당나귀가 죽고 나자 주인은 당나귀가 지고 가던 모든 짐은 물론이요 죽은 당나귀의 털가죽까지 벗겨 말의 등에 실었습니다. 말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큰 고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혼자만 잘 살려하다가 결국은 어려움을 혼자 지게 됩니다.
믿음생활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이 있다면 갈아엎어 버립시다.
므낫세와 갓 자손들은 가만히 앉아서 평안을 누리기를 바라고 자신의 몸은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정복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두 청년이 깊은 산 속에 들어갔다가 무서운 곰 한 마리를 만났습니다. 한 청년이 곰을 먼저 발 견하고는 혼자 재빠르게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도망가지 못한 청년은 얼떨결에 죽은 듯이 땅에 엎드렸습니다. 곰이 땅에 엎드린 청년에게 와서 그 얼굴 주위를 돌면서 혀를 대보고 냄새를 맏곤 하더니 죽은 것같자 그냥 가버렸습니다. 곰이 멀리 간 다음, 도망갔던 청년이 돌아와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조금 전에 곰이 자네 얼굴에 대 놓고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무슨 소릴 하든가?” 이 친구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습니다. “위험할 때 혼자 도망가는 친구와는 다시 친구 를 하지 말라고 충고를 해 주었다네” 혼자만 잘 살겠다는 것, 혼자만 평안하겠다는 것, 옳지 않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좋은 교회였습니까? 가 장 순수하고 깨끗했던 교회, 은혜와 기쁨이 충만했고, 유무상통이 이루어졌던 교회였습니다. 교회의 영원한 모범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자기들끼리 좋아 했습니다. 예수 믿어 좋았고, 구원받아 좋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좋았고, 은혜가 충만하니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자기들끼리만 좋았지 주님의 명령에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병은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그래서 땅끝까지 복음 전하라고 했는데 복음 전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 어떻게 하였습니까? 무서운 환난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무서운 핍박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환난을 피해 흩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흩어져 가는 곳마다 눈물로 복음 전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역사입니다.
2.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잘못된 과거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잘못된 역사는 반성하여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잘 된 역사는 오늘에 살려 발전의 디딤돌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불을 처음본 인간은 불에 데여 화상을 입고 물집이 나서야 뜨겁고 무섭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지만, 그 후세 사람은 그걸 역사로 미리 배웠기 때문에 일부러 알기위해 데여보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아픈 역사를 까마득하게 잊어 버리고 과거의 잘못을 답습한다면 참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모세는 르우벤과 갓 자손이 전투의 불참요구에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합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상기시켜 줍니다.“너희 열조도 내가 가데스바네아에서 그 땅을 보라고 보내었을 때에 그리하였었나니 그들이 에스골 골짜기에 올라가서 그 땅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었느니라”(8-9절)
이 일은 약 40년 전에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땅을 정복하기 위해 각 지파에서 1명씩 모두 12명의 정탐꾼을 선발했습니다. 정탐꾼들은 가나안 전 지역을 40일이나 샅샅히 탐지했습니다. 그리고 보고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능히 우리가 그 땅을 취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10명의 정탐꾼들은 그 산지를 우리를 삼키는 산지라고 했습니다. 그 땅의 사람들은 거인이고, 장사요, 우리는 그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싸움을 하면 분명 죽을 것이다라고 부정적으로 보고를 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이 말을 듣고, 통곡을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우리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백성들을 낙심케 했습니다. 부정적인 병이 전염되게 했습니다.
온전한 순종을 보이지 않았던 출애굽 1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10명의 부정적인 보고에 사기가 저하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낙심하고 절망했고 마침내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온전한 순종을 보인 갈렙과 여호수아만 가나안 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막 광야생활의 종지부를 찍으려는 순간인데 또 과거의 악습을 답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과거의 그 때가 생각 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낙심하면 그런 일이 또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 모세가 그들을 강하게 꾸짖었던 것입니다.
3.‘나 하나쯤’이란 자세가 다른 사람들을 낙심케 합니다.
한 사람의 작은 행위가 전체에게 피해를 줍니다.
7절에 모세가 루우벤과 갓지파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르우벤과 갓지파가 함께 싸우지 아니할 때 이것은 다른 지파로 하여금 낙심케 만든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지파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루우벤과 갓지파는 편안히 앉아 놀고 있습니다. 싸우는 사람들이 루우벤과 갓지파의 모습을 볼 때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우리만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하느냐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자그마한 나라의 임금이 온 국민을 불러놓고 대연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음식은 왕이 마련하고 술은 큰 술통을 준비해놓고 참석자가 각각 포도주를 한 병 씩 가져와 그 술통에 부어놓고 마시기로 했습니다. 잔칫날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가져온 술을 모두 큰 술통에 부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식탁에 앉아 그 포도주를 잔에 따라 마시기 시작하 였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그것은 술이 아니라 맹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포도주를 가져올 것이니까 나 한사람쯤 술 대신 물을 가져와도 아무 상관 없을거야 . . . 그런데 전부 그렇게 생각한 것 입니다. 전부 맹물을 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 한사람쯤이야’ 하는 생각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나만 예수 믿고 나만 복 받고 나만 천국가면 그만이라는 생각, 하나님 싫어하십니다. 영적 이기주의의 죄가 됩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복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고 아이성을 향해 갈 때 실패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간의 죄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아간의 죄와 함께 군사 이삼 천 명만 보내서 아이성을 치게하는 안이한 생각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소극적인 태도가 전염이 되어져서 온 이스라엘을 낙심케 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
부정적인 사고와 소극적인 사고는 전염됩니다. 물론 열정도 . . 여러분은 어떤 것으로 전염시키기 원하십니까?
4. 기독교는 일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섬기는 종교요, 일하는 종교입니다. 도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얼마전 지존파가 있었지요. 현실사회에 대해 일찍부터 불만을 품고 성폭행을 하고 살해 암매장, 살해하고 사체를 토막내어 소각하는 등의 죄를 범했던 지존파를 기억하시죠. 교수형이 집행되었죠. 또 막가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막가파는 지존파이후에 나온 조폭으로 말 그대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여서 야산에 산채로 묻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백수파라는 게 있대요. 백수라는 말은 놀고 먹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건달을 말합니다. 살전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일을 한다는 것은 살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을 하면 밥맛이 살아납니다. 밥맛이 나면 살맛이 납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육체만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도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오래전 상영된 로베레 장군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가운데 나치에 저항했던 많은 저항 운동가들이 감옥에서 처형당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 수많은 저항운동가들 가운데 별로 이 운동에 깊이 관여하지도 않았고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던 한 사람이 붙들려 왔습니다. 이 사람의 사형 차례가 다가왔습니다. 이 사람은 고래 고래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나는 저항운동에 참가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돈이나 벌고 가족들이나 먹여 살리던 소시민입니다. 왜 내가 죽어야 합니까?” 그때 묶여 있던 젊은이가 이 사나이를 향하여 그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잘못이다. 당신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그것 하나로 죽어 마땅하다. 전쟁은 5년이나 계속되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무참하게 피를 흘렸고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어 버렸다. 조국과 민족이 멸망 직전에 놓여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바로 당신이 죽어야 할 이유이다.” 대단히 인상깊은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탐욕과 욕망을 위해서는 별의 별 일을 다했지만, 민족이나 정의를 위해서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이 사나이의 잘못이었습니다. 그것이 죽어 마땅한 죄과였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정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긍정적인 종교입니다. 일하는 종교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나는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 집은 평안합니다. 아무 일이 없습니다.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가족은 모두 교회 잘 다니고 사업은 늘 번창하고 자녀들은 모두 착하고 우등생들입니다. 우리 식탁은 항상 기름지고 풍성합니다.’ 매우 감사가 넘치는 신앙같지만 그것이 신앙 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것에서 머물면 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죄를 범하기 쉬운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 더 힘써야 하고 헌신해야 . .희생해야 합니다.
우리의 형제들은 싸움터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나만이 편히 쉬겠다는 생각이 옳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받은 은혜에 대한 배신의 행위입니다. 신앙생활은 일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각자의 은사를 따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찾아 감당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배신이요 죄입니다.
기독교는 일하는 종교입니다. 함께 일하는 종교입니다. 이기적인 생각 자체가 죄입니다. 함께 비젼을 가지고 함께 땀흘리고 함께 일하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