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가 무서운 이유

죄가 무서운 이유/요일3:1-6

죄가 무서운 이유/요일3:1-6



죄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습니다. 큰 죄도 용서받아야 하지만 작은 죄도 용서받아야 하나님 앞에 흰 옷을 입고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죄 모두 항상 경계를 해야 하지만 먼저 하나님 앞에 엄청나게 큰 죄가 무엇이 알아야 이 죄를 피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죄보다 큰 죄는 3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가장 큰 계명을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귀신 앞에 절하거나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은 남을 죽이거나 도적질하는 것도 아니고 별로 죄같이 보이지 않지만 살인죄, 간음죄, 도적질하는 죄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더 미워하시고 진노하시는 죄입니다.

출애굽기 20장 4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강력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이 죄 같지 않으면 무섭고 큰 죄입니다.

우상이라는 말은 섬기기 위해 종교의 대상으로 세운 모든 형상.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어던 형태로든 물질로든 마음으로든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 절하고 섬기는 것을 하나님은 가장 싫어하십니다.

둘째로 큰 죄는 “간음하지 말라”(출20:14)는 계명인데 이 계명을 범하는 것도 큰 죄이지만 이보다 더 큰 죄는 동성연애의 죄입니다. 로마서 1장 24~27절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육체적인 사랑의 대상이 바뀌어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죄입니다. 이 죄로 부터 벗어나길 바랍니다.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면 안되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면 안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동성연애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어지럽히는것입니다. 성경은 레위기 18장 22~25절에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가 된 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고 했고, 레위기 20장 13절에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즉 동성연애나 짐승과의 교합, 수간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가증하면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태워버렸겠습니까?

얼마전에 미국 뉴올리언스에 몰아닥친 카트리나 허리케인으로 수천 명이 죽고 엄청난 재산 피해를 가져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뉴올리언스는 해마다 동성연애 축제가 열리는 곳입니다. 카트리나가 불어닥치기 전해에 33번째 동성애 축제에 무려 125,000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34번째에는 더 큰 규모로 모일 예정이었으나 2일 전에 카트리나 허리케인이 그 도시를 뒤덮어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또다른 큰 죄는 바로 위선의 죄(hypocrisy)가 있습니다.

죄 같지 않으면서 무서운 죄 중의 하나가 위선의 죄입니다. 위선이란 겉으로는 선하고 착한데 속에는 죄악이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회칠한 무덤같이 겉은 하얗고 깨끗한데 속에는 썩은 송장이 가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이 동행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큰 죄 3가지를 알았으니 이제는 왜 무서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죄가 왜 무섭습니까? 마치 인두로 죄인에게 이마나 팔이나 지지는 죄처럼 모든 죄는 사라지지 않고 고통의 씨앗을 남기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창세기에 첫 범죄자 아담을 보십시오. 가볍게 하나님의 말씀 한번 어겨도 되겠지 생각에 아내가 주는 선악과 한번 받아 먹었습니다. 그 후에 남은 고통의 씨앗은 무엇입니까? 먼저 살기 좋은 지상 낙원에서 쫒겨났습니다. 그러자 그가 가는 곳 모두에 추위와 더위 그리고 굶주림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영원히 죽게 되는 죽음과 사망까지 오게 되지 않습니까?



또 다른 고통의 씨앗은 바로 부끄러움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때는 못느꼈던 것이 범죄한 순간 무엇을 느꼈습니까? 바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자신이 벌거벗은 그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어서 나무 뒤에 가서 숨습니다. 왜 그동안 이것을 못느꼈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의 옷으로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못느꼈다가 죄를 짓는 순간 하나님께서 덮고 있는 영광의 옷자락이 사라져 버리고 벌거벗게 되는 것입니다. 벗겨졌기 때문에 마음에도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창3: 10절에 보면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죄를 지으면 담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 더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막이 벗겨지므로 부끄럽고 부끄럽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부끄럽고 두렵기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범죄후에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무 옷을 해 입고 땅이 저주를 받아 평생 수고롭게 일해야 먹고 살게 되는 벌을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지만 죄의 결과 흙으로 다시 돌아가는 수모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은 이렇게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는데 오늘날은 어떻게 죄로 인해 저주를 받습니까? 하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는 우리 육신의 옷을 벗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양심을 벌거벗게 만들어 버립니다.

양심이 벗겨지니까 사람들이 괴로워서 감당하지 못합니다. 양심이 벗겨지니까 고뇌와 번뇌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육체는 다 연결되었다는데 있습니다. 양심이 문제가 생기니까 고통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그 양심, 우리 속에 있는 양심이 뼈와 살과 오장육부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니 오장육부가 성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모든 질병은 먼저 마음에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잘 아는 할머니 한 분이 있습니다. 성격도 좋으시고 소탈하시고 건강하시고 70세를 향수하시고 소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에 부모님의 마음을 아주 아프게 큰 아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핍박하고 보내드렸던 용돈도 줄이고 그러니까 이 할머니는 마음에 병이 생긴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고민합니다. 근심 걱정 염려가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밝던 성격도 하루 아침에 시무룩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이 할머니가 이상한 것입니다. 알고 보니 암에 걸린 것입니다. 주변에서 보고 있던 많은 분들이 이야기합니다. 저 분의 병은 그 시작이 마음에서 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든 병은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마음에 근심이 들어오고 염려가 들어오면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는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죄가 들어있는 사람은 마음에서 탄식을 잘합니다. 탄식을 잘하는 사람치고 평안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있는 사람 복음이 들어 있는 사람은 탄식이 평안으로 바뀌고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소망을 발견합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복음의 힘과 위력을 느낍니다. 얼마나 복음을 전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에는 말씀에는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곧 죽는다 곧 죽는다 하던 사람도 살아납니다. 그렇게 흉악한 범죄자도 복음을 듣자 고분 고분한 양이 됩니다. 심한 우울증을 겪던 사람이 복음을 듣자 치유됩니다. 맨날 실패와 좌절 가운데 있던 사람이 복음을 듣자 소망이 생기고 성공합니다. 부모조차 포기하던 중학생이 복음을 받아들이자 태도가 좋아지고 얼굴이 밝아지더니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깽판 부리던 남편이 복음이 들어가자 잉꼬부부를 넘어 닭살 부부로 변화됩니다.



여러분 그래서 복음이 중요합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는 싶어도 혼자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의 특징은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죄의 사실을 혼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죄를 끊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좋은 가족이요, 친구요, 이웃인 것입니다. 왜 우리가

4월29일 이렇게 예수사랑전도잔치를 하는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아직도 마음의 고통을 끊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복음이 들어가야 사람이 변화됩니다. 복음에 힘이 있고 복음에 죄를 끊은 역사가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죄를 지으면 왜 무섭습니까? 하나님을 배신하기 때문에 무섭습니다. 다시 말해 죄를 지으면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큰 슬픔과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상처는 대체로 누구에게 잘 받는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사람.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크게 받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청년목회를 할때 보면 서로 사귀다가 마음이 맞지 않고 사귀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야 그러면 남자들은 그래도 예의를 갖추어서 잘할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자매들을 보면 그렇게 쌀쌀할 수 없어요. 찬 바람이 나고 눈에는 무시하는 눈빛이 나가고 그렇습니다.

부부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도 놓고 다툰다니 말이 안되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상처가 크고 배신감도 크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대체로 여자들은 한번 받은 상처를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끄덕하면 이전에 상처받은 이야기를 하고 또하고 또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을 자신의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 여자분들에게 상처를 입히면 안됩니다. 남자들은 화가 났다가도 금방 잊고 상처당해도 잊어버리는데 여자들은 기분이 상하면 반복적으로 계속하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사랑했는데 나를 배신하고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이것입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에게 받은 상처보다 더 큰 상처는 자식에게서 받은 상처입니다. 자식에게는 어떤 사랑을 합니까? 자기 몸까지 다 퍼주는 사랑을 합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배신하고 돌아보지 않고 슬프게 하면 그보다 더 큰 상처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상처를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느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죽게 하신 댓가를 지불한 그 사랑입니다. 그런데 죄는 그 사랑에 대한 배신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짓밟는 것입니다.



엔도우 슈사꾸라는 일본 기독교 소설가가 지은 <침묵>이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일본 선교를 하던 신부의 배교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신부가 일본선교를 하다가 도쿠가와 정권의 고문에 못이겨 배교했다는 소식이 선교 본부에 전해집니다. 그런데 이분에게 배운 제자들이 너무도 이상한 것입니다. 그렇게 존경하던 자신의 스승이 배교할 리가 없는데 어떻게 그랬을까? 확인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직접 일본으로 잠적하여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 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은 결국 잡혀서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그 고문은 예수님 상이 새겨진 동판위를 땅바닥에 놓고 그것을 밟고 지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제자는 차마 예수님의 상을 밟고 지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 말씀을 하십니다. \"얘야~어서 일어나서 내 상을 짓밟으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해서 세상에 온 것이다. 보아라 바리새교인, 서기관, 대제사장 모두 다 나를 짓밟았지 않았는가. 그러니 나를 밟고 지나가라!\" 제자는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있는 것을 나는 원망했습니다. 왜 이렇게 모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주님은 잠잠하고만 계십니까?\"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침묵한 것이 아니다. 나는 늘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기 위해서 벌을 내리지 않고 괴로워하고 고통을 당하면서 참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주님께서 지금 힘이 없어 당신을 모욕하는 사람을 심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주님은 침묵하고 계십니까?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 그렇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고통당하고서라도 끝까지 한사람이라도 구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만일 주님이 “야~! 이놈들봐라 나를 기분나쁘게 하네” 그러시면서 쳐 죽이기 시작하면 남을 사람 한사람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침묵은 무엇입니까? 고통가운데 침묵이요 죄지는 자를 향한 말없는 기다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은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순종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물질을 드림보다 더 좋은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잘 듣는 것이 최고의 순종입니다.



사무엘서에 보니까 이스라엘에 전운이 깃들어 있습니다. 다른나라 군대가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일보직전입니다. 그런데 전쟁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하는지를 하나님께 물어야 하는데 선지자인 사무엘이 오지 않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급한 마음에 사울왕이 자기가 제사장이 되어서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큰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선지자가 왔습니다. “전쟁에 승리한 것을 보고 기뻐하며 참 잘했습니다. 수고많았습니다” 이렇게 말할 줄 알았는데 사무엘상15장22절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무엘을 통해 하신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전쟁에 승리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다. 그것입니다.

여기서 순종의 원어는 바로 “듣다”입니다. 잘 듣는 것이 제사보다 낫고 또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라고 성경은 듣음 곧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죄를 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잘 듣지 않는 사람이 불순종이요 범죄와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요한일서3장4절보세요.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 요한일서 3장8절에 보니까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해 있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기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꾸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는 끊없이 우는 사자처럼 죄짓기를 원하고 유혹하고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끊어내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나오는 최고의 역사가 누구입니까? 바로 삼손입니다. 한번에 1000명을 무기도 없이 나귀턱뼈로 쳐죽인 사람입니다. 사자 한마리는 맨손으로 간단히 처치하고 1000명을 죽일 정도니 자기 힘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감동으로 할 정도로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결정적으로 넘어진 것이 무엇입니까? 데릴라라는 여인의 유혹을 끊어내기 못했기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삼손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 성령의 기름부음이 넘치는 사람이라도 할지라도 죄의 유혹, 마음의 유혹을 끊어내지 못하면 마귀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죄의 유혹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한순간만 충만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함을 한번 받은 것이 아니라 성경은 성령충만을 입으라고 말씀하고있습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을 입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새벽기도입니다. 새벽에 나와서 첫 시간 주님 앞에 무릎끊고 아뢸때 하루가 보호받고 하루를 유혹에서 끊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주 화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의 40일간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때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육신의 정욕을 못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특별한 목적이 이끄는 40일 되어야 합니다. 멀리서도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멀리서 올 수 있으면 와서 해야 합니다. 목적 목표를 주님께 두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곤충학자 장 앙레 파브르라고 하는 분이 곤충들을 연구했는데 곤충들, 특히 하루살이, 버러지들, 날벌레들을 쭉 조사를 해보니까 날벌레들은 목표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잠자리라든지 이런 대체로 날벌레들은 목표가 없고 누가 하나 날아와서 빙빙 돌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골에서 잠자리를 잡으려면 손을 빙빙 돌리면서 접근하면 금방 잡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잠자리들은 누가 빙빙돌리면 높이 올라가서 먹이를 갔다줘도 안내려온답니다. 그냥 따라서 돌다가 목적이 없으니까 수명이 6-7일 되어서 다 끝난답니다. 목표가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목표를 정해야 합니다. 또한 목표도 긍정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을까 목표보다 목적이 이끄는 40일 동안 성령을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보기 원합니다. 내 비전이 실천되기를 원합니다. 내 가족이 예수 믿기를 원합니다. 구체적인 목표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목표가 없으면 사람이 대충 살아갑니다. 왜 노숙자입니까? 목표가 없으니까 노숙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40일간의 기간동안 목표를 세워야 영적 노숙자되지 않습니다.



잠언 29장 18절에 보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묵시란 말이 무슨말이냐? 비전이란 말이예요. 묵시가 없으면 꿈이 없으면 비전이 없으면 사람이 방자해 진대요. 이 40일간의 새벽동안 꿈을 심어보세요. 꿈대로 됩니다. 과거에 세운 미래가 오늘의 자신이듯이 오늘 심은 꿈이 내일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내일 죄의 종이 아니라 비전을 성취하는 사람이 되어 있으려면 오늘부터 기도하며 내일을 준비해야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40일의 목적이 이끄는 40일의 새벽기도를 통해 죄를 끊어내고 꿈과 비전을 심고, 주변의 비전없이 죽어가는 예수모르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