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소죄소로

결국 속죄소로
민16:1-3





지난 수요일예배 때 지성소안에 언약궤에 대해서 살펴본 일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적용시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언약궤안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동강난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왜 언약궤안에 들어 있느냐 하는 것과 더불어서 언약궤위에 지성소가 왜 있느냐하는 것에 대해서 세부적으로 말씀을 나누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수요예배 때 계속해서 지성소에 대해 알아보겠지만 출애굽25장에 기록되어있는 말씀에서 속죄소가 언약궤 위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일 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이 갖다 뭇는 피가 언약궤를 덮을 수밖에 없는 상징들을 이해하셔야합니다. 오늘은 싹 난 지팡이를 중심으로 말씀을 전개하겠습니다. 수요일에 말씀을 드린 부분의 중복이 좀 되더라도 이해하십시오. 싹 난 지팡이는 민수가 16장에서 17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게 되면 언약궤 속에 세 가지 물건을 간직해야했던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민수기16:1-3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스스로 높이느뇨’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당신이 무슨 권리로 우리를 다스리고 누가 그 권리를 주었기에 우리위에서 지도하느냐, 아론을 누가 대제사장으로 삼았느냐 우리는 그를 대제사장으로 삼은 적이 없다’ 이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보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당을 지어서 그들을 좇는 이백오십 인의 족장과 함께 모세와 아론을 거스렸던 사건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과연 누구를 선택했는지 보자하며 너희는 너희끼리 향로에 불을 담아 기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라고 합니다.

15절 이하를 보시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 향로를 가지고 나왔다가 향로에서 나온 불이 오히려 그들을 소멸시킨 하나님의 저주를 보게 됩니다. 또한 고라와 그의 자손들과 백 오십 인의 족장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어떻게 무너졌는가 하는 것이 나오고 그 후에는 아직 남아 있는 다단과 아비람이 백성들이 떠난 이후에 지진이 일어나서 산 채로 땅속에 묻혀 버리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1절에 보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멸망한 후의 백성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하고 회중이 모여 모세와 아론을 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서 그들에게 염병이 시작됩니다. 그 염병으로 1만4천7백 명이 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백성들을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다 죽게 생겼으니까 각 지파에게 지파대로 지팡이를 가져오도록 명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새겨 넣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의 아론은 레위족속의 지도자였으므로 자신도 지팡이를 그 곳에 가져갔습니다. 하나님은 그 지팡이를 지성소 안으로 가져오게 했는데 그 다음날 보니 아론의 지팡이에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가 맺히고 나머지 지팡이는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선택했다는 것을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17장 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자에게 대한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이렇게 지금까지 싹 난 지팡이가 어떤 사건과 경위를 거쳐서 언약궤 속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살펴보아야 될 것은 어째서 싹 난 지팡이가 앞에 있었던 사건의 답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고라와 다단과 온이 모세를 배반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그리고 왜 이스라엘백성들이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느냐하는 문제와 그리고 그기에 대한 답을 하나님이 싹 난 지팡이로 한 것은 무선 이유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동시에 가장 중요한 내용은 언약궤 안에 싹 난 지팡이를 넣고 그 언약궤 위에 속제소를 놓아서 속죄의 피를 그 위에 부어야만 했는가 하는 결론을 얻어야합니다.

그러면 16장으로 돌아가서 고라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을 세우고 이백 오십 인의 족장을 자기네 편으로 끌어 들어서 모세와 아론을 대항했는지를 알면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아론의 명예를 탐했다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들이 신을 섬길 때는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왕은 이름이 천자입니다.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이지요. 그것은 하늘의 두 번째 서열이라는 뜻보다 그 만큼 높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아니라 신이란 말이지요. 고대문명을 봐도 그렇고 왕조를 보면 신은 아들이 있고 그 신은 세상의 왕입니다. 로마황제들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황제로 출발했는데 나중에 가면 신의위치와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 로마황제를 신으로 섬기라는 명령에 신자들은 과감히 거부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엄청난 핍박을 받게 되는 근거였습니다. 이렇게 신을 들먹일 때는 자기들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실재하시고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기독교 역사를 보면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신앙을 가지고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동원될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 이 사건이 바로 그런 차원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무 너희만 뻐기고 있으니 너무한 것 아니냐 우리와 나누어 가지자’ 이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싸움에서 가장 모욕을 당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계십니까? 하나님을 자기의 유익을 위한 수단이나 장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라의 일당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셔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반대로 하나님께 묻자는 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명심하셔야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런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생각이나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찬양을 부르는데 그렇게 은혜로울 수가 없습니다. 눈물을 흐리면서 두 손 들고 그의 삶을 고백하는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끝나고 어디를 가느냐, 술집에 가서 신나게 회포를 푸는 것입니다. 찬양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술로 푼다고 생각됩니다. 실지로 이런 사례가 있습니다.

성가 연습 끝나고 술집으로 향하는 성도들이 있다고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보지도 않은 것을 목사님이 한부로 이야기 할 수 있느냐 그렇게 시비를 걸면 증인도 세우겠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느냐 하면 기독교를 자기의 유익으로만 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거나 아니면 주위 성도들이 힘들거나 아픔을 당하면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위로하십니까? 혹시 술로 위로하지는 않습니까?

수다 떠는 것으로 인간적인 위로에 급급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은 우리의 삶에 없고 단지 기독교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종교로만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우리의 삶을 주도하고 있다고 믿으면 모세와 아론처럼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야 됩니다.

여기 보세요. 고라일파들이 어떻게 죽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방법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세상의 원리와 방법은 결국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운행하시고 지키시며 주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반역자들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불이 나서 죽고 지진으로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민수기 16:41을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오히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들은 이 일에 항복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끈질깁니다. 애굽의 바로가 10가지 재앙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결국은 항복하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이스라엘백성들을 잡으러 온 사건은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수 없이 경고하고 복음을 전하고 예언해도 안 듣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하나님이 음으로 양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체험도 하고 그래서 일시적으로나마 정신도 차리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께 항복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반역자들은 염병에 걸러 이스라엘 회중에 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다가는 다 죽겠다 싶어 하나님의 방지책이 아론의 지팡이에 싹을 내고 열매를 맺히게 함으로서 이 사건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왜 하필 지팡이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함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까? 이 때의 지팡이는 전부나무로 했습니다. 지팡이는 이미 생명이 없어진 죽은 막대기로 만듭니다. 원래 생명이 있는 나무는 땅에 뿌리를 박고 있어서 그것을 손에 들고 사람들이 사용하거나 남을 때리거나 찌르거나 할 수 없습니다. 잘려서 죽은 나무에만 누구에게나 들어서 몸을 지탱하기도하고 상대방을 질타하는데 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죽은 나무토막만이 남을 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나무는 반드시 열매를 맺는 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정답입니다.

마태복음 3:7-10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침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이 장면은 침례요한이 침례를 베풀고 있는 장면입니다.

좋은 열매 맺는 나무는 그냥 두고 나쁜 열매 맺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지겠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무엇이냐 하면 ‘나쁜 열매’입니다. 성경에 좋은 열매 맺는 나무의 대표적인 것으로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를 들고 있습니다. 포도를 맺는 나무를 포도나무라 하지요. 포도나무에 유전공학으로가 아닌, 다른 열매를 맺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포도나무에 포도밖에 맺지 못합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더러 나쁜 열매를 맺으면 찍어 불에 던진다는 말씀이 맞는 말입니까?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A를 맺으면 살려두고 B를 맺으면 죽이겠다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A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고 B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데 A를 맺으면 살고 B를 맺으면 죽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 성령의 열매들의 큰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서로 관련성이 있으며 그것은 바로 대인 관계적입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열매를 맺느냐 성령의 열매를 맺느냐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의 열매를 맺어놓고 성령의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한다는 핑계로 얼마나 사람들을 괴롭히는지 아십니까?

사랑이라는 핑계로 자기 할 말 다합니다. 본인한데 불리하면 사랑하기 때문이랍니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는 줄 아셔야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대인 관계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육체의 열매를 봅시다. 갈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여기서 보듯이 육체의 열매들은 거의가 대인 관계적인 것들입니다.

또한 충실하지 못한 시간의 낭비에 관한 것들입니다. 성경은 한 그루의 나무에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 나무가 심겨져서 자기의 열매를 맺느냐 아니면 지팡이가 되어서 남을 때리고 다니느냐 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에게 생명을 준 그 분의 요구인 열매 맺는 일을 거부하고 죽은 나무가 되어 누구의 손에 붙잡힌바 되어 지적하고, 때리고, 찌르고 하는 지팡이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쁜 열매, 육체의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적감각을 가지고 주님이 열어놓은 길을 가면서 맺는 열매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 분께 붙어 있으면 절로 열매를 맺는 부분에 대해 요한복음15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꽃피우고 열매 맺는 나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의 방법으로 서지 못하니까 결국 지팡이가 되어 사람들을 찌르고 때리고 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것이 이상하게 마른 가지가 되고 지팡이가 되어서 상처주고 편을 가르고 부정적인 소문을 내고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시험이 되고 보기 싫은 사람이 나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가정에서 이웃에서 행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미움입니까? 시기입니까? 자기 자랑입니까? 시험에 든 것입니까? 아니면 온유입니까? 화평입니까? 인내와 절제입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신앙 안에서 무엇을 내고 있습니까? 이것이 한국교회에 심각한 문제라고 봅니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은, 성경을 더 깊이 깨닫는다는 것은 한 사람을 용납하는 것이요 온유와 절제로 참아내는 것이요,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밖에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다시 한번 본문을 생각해봅시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이백 오십 인의 족장을 데리고 항의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들고 나온 향로에서 불이 나와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깨달았습니까? 못 깨달았습니까? 깨닫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올라오지 않았던 아비람과 온은 자기 장막에서 아직까지 살기등등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두 번째 심판을 지진으로 했습니다. 이 사건은 분명히 우연도 아니고, 사람의 방법도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위해서 지진이라는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이렇게 했는데도 이스라엘백성들이 몽땅 뛰어나와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단 말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염병이 나돌았지요.

여러분들은 이 사건을 보면서 어디에 속합니까? 하나님께 도전하는 쪽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이미 향로에 탄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지진, 그렇지 않으면 염병입니까? 언제쯤 회개하겠습니까? 향로, 지진, 염병, 아니면 싹 난 지팡이를 보고나서, 어디쯤 갔을 때 회개가 나올 것 같습니까? 성경이 말하고 싶은 것은 어느 때에도 회개치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그 어느 때도 항복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서 싹 난 지팡이를 언약궤에 넣어두고 그 위에 피를 흘러야만 우리를 고칠 수 있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성경이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많은 기적으로도 사람들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 복음서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 많은 기적들을 행했지만 이스라엘백성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넘겨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팔려서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회개치 않았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만나를 담는 항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백성들은 다 죽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으나 죽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산다고 했습니다. ‘내가 주는 떡은 내 살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만나 항아리가 언약궤에 들어가서 속제소를 통해서 피 흘림으로 영원히 사는 예수그리스도의 찢기신 육신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십계명을 지킬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십계명을 보고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나약한 존재인가? 죄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확인해서 어디로 갑니까? 예수그리스도께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가야 우리가 삽니다.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연약궤안에 조각난 돌 판을 넣어놓고 그 위에 지성소에서 피를 뿌려야하는 것입니다. 언약궤에 피를 덮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해서 만나를 주고, 그들이 회개치 않아서 싹 난 지팡이를 주고, 그들이 자기자랑과 증명으로 살기에 십계명을 주어도 깨닫지 못하고 돌아서지 못해서 피를 뿌린 것입니다.

여러분 산 나무는 절대로 싸울 수 없습니다. 죽은 나무이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죽은 지팡이가 서로 칼이 되어 칼싸움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산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열매를 맺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려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이 영광의 길을 거부하고 죽은 나무를 고집한다면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맺고 싶어서 맺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것이 은혜요 감격이요 축복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으면 자랑할 수없고 남을 경멸 할 수도 없고 이 길로 연합시키신 예수님께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좀 다른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혹시 여러분 중에 오늘 교회 나오기 싫은데 억지로 나오신 분계십니까?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절대로 안합니다. 동의 하십니까? 그렇다면 나오기 싫은 교회를 억지로 강요한다고 하십니까? 안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이요, 어쩌면 불가사이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교회는 나가지만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만큼 우리의 인생이 우리 손에 있지 않고 어떤 큰 은혜의 손길에 있다는 것을 보다 더 잘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잘 난 사람 없고,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착각하고 살지 마세요. 누구나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며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입니다. 다른 것이 있고 구별되는 것이 있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느냐 세상적인 시각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돈이 많고 형편이 났느냐,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 이것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동원하고 그 분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무기가 되는 삶을 사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 나무입니다. 죽은 나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산 나무로서의 삶이 분명히 놓여있습니다.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반드시 그 길을 가야 열매를 맺고 영원한 나라의 영광된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죽은 나무가 아닌데 죽은 나무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죽은 나무도 아닌데 죽은 나무처럼 사람을 찌르고 때리고 사는 것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우리가 가야할 길을 주님께서 열어놓았습니다.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축복의 길입니다. 영생의 길입니다. 감격과 은혜의 길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영원한 나라의 소유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