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죄, 죄, 그리고 죽음

욕심, 죄 그리고 죽음
민11:31-35





야고보서 1장15절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욕심의 말로는 죽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욕심의 말로는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증거가 본문에 나타난 욕심의 무덤입니다. 욕심의 무덤이란 이름 그대로 욕심을 부리다가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장사지낸 장소를 말합니다.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땅을 향하여 나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줄곧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라는 음식을 먹고살았습니다. 그들은 만나를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솥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어 먹었는데 그 맛이 달콤하고 고소했다고 합니다(출16:31, 민11:8).

광야에서 농사를 지은 일도 없었는데 수백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같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는 것에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고기가 먹고 싶다고 울었습니다. 애굽에 있을 때에는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과 같은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만나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므로 정력이 쇠하여졌다고 온 백성들이 목놓아 울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민11:4-9)

백성들의 울음소리를 들은 모세는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기를 주시되 하루나 이틀 분이 아니라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1개월 동안 먹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고 있는 진으로 메추라기 떼를 몰아서 떨어뜨려 주셨습니다. 메추라기가 얼마나 많이 떨어졌는지 이스라엘 진 사방에 두 규빗 쯤 쌓였다고 했으니 1메타 가까이 메추라기가 쌓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이틀동안 정신없이 메추라기를 거두어 들였는데 적게 거둔 자도 10호멜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약 2200리터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었습니다. 가마니로 따지면 10가마가 넘는 분량이니 그들의 욕심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과 욕심으로 하나님을 멸시하자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심히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재앙이 어떤 것인지 본문에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아마도 식중독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튼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도 전에 욕심을 부리던 수많은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시체를 한곳에 모아 장사지내고, 그곳의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 라고 칭하였으니 그 뜻은 ‘욕심의 무덤’입니다.

그들은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욕심의 무덤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교훈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에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첫째, 욕심을 부린 원인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욕심을 부리게 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잠시 말씀드렸듯이 그들은 출애굽전의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었는데, 지금은 만나 한가지 밖에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그들이 그런 음식들을 값없이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당시 애굽의 노예들이었습니다. 노예들이 어찌 생선이나 과일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설사 그들이 간혹 그런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노예생활 속에서 얻어먹는 음식이 무슨 맛이 있었겠습니까? 비록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일입니까? 호의호식하는 노예보다 헐벗고 굶주린 자유인이 훨씬 더 나은 것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만에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행진하고 있는 중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매일 같이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신선한 만나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자유인이었고. 먹고 마실 것도 풍부했습니다. 하나님의 각별하신 은총으로 그들을 먹이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이처럼 크신 은혜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지 않고 탐욕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히다 보니 탐나는 것만 크게 보일 뿐 하나님의 은혜나 은총 같은 것은 아예 눈에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이 한번 탐욕에 빠지면 매사에 탐나는 것만 눈에 보일 뿐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법입니다.

권세에 욕심을 품는 자는 권세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돈에 욕심을 품는 자는 돈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결국 이러한 욕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대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그런 욕망 정도는 능히 이겨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므로 탐욕에 빠지곤 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서 모든 일에 배부름과 배고픔과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빌4:11-13).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자들은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할 줄 압니다. 이 세상에는 10만원을 가지고도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10억원을 가지고도 불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골 면서기나 도시의 동직원만 되어도 자족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장군이 되고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어도 불만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과 잊어버리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줄 압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친 욕심을 부리게된 두 번째 원인은 그들 속에 섞여있는 다른 민족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애굽을 떠나온 여러 민족의 사람들이었습니다(출12:38).

이들은 아무래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연대의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어도 쉽게 불평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이들이 먼저 욕심을 품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자 그 영향이 삽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퍼져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은 영향보다는 나쁜 영향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성도들이 세속적인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면 필연코 세상 것들에 욕심을 품게되기 마련입니다. 에덴 동산의 하와도 간교한 뱀과 어울리다보니 욕심이 생겨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일전에 기독교 정당이라고 출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기독교와는 하등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니 현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정치에 뜻이 있는 몇몇 분들의 집단행동일 뿐 한국 기독교가 합법적으로 출범시킨 정당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그 정당에서 지난 17대 총선에 목사님들 중에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분들이 있을까하고 관심을 가져보았습니다만은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정말 정치의 길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목사직을 그만 두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는 곧 법입니다. 목사가 세상 권세에 욕심이 있다면 그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목사가 그런 세속적인 탐욕을 가졌다면 그 원인은 평소에 세속적인 사람들과 너무 가까이 어울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세속적인 탐욕을 갖지 않으려면 먼저 세속적인 사람들을 멀리 해야 합니다.

시편1:1-2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로마서12: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둘째,. 욕심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욕심은 지나친 욕구를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예컨대 빵에 대한 욕구, 사랑에 대한 욕구, 자유에 대한 욕구, 신앙에 대한 욕구 등은 인간의 본능적이고도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그러나 욕심은 한도 끝도 없는 욕구로써 인간의 죄 성에서 우러나오는 정욕 적인 속성들을 말합니다. 욕심을 부리는데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그 중에 두 가지만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첫째는 물질에 대한 욕심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무엇인가를 갖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인간에겐 의. 식. 주가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좋은 옷을 보면 입고 싶고 좋은 음식을 보면 먹고 싶고. 좋은 집을 보면 그 집에서 살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래의 성품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욕심이 지나칠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필리핀의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는 그의 구두만 해도 2200여 켤레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숫자라면 매일 새 구두를 바꿔 신는다고 하더라도 6년이 걸려야 겨우 한번씩 신어볼 만큼 엄청나게 많은 숫자입니다. 이 땅에는 구두는 고사하고 고무신발조차 제대로 못 신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처럼 욕심을 부렸으니 어찌 백성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물질에 대한 욕심에서 초월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 하려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랑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성경은 교훈하고 있습니다(딤전6:7-10).

둘째는 권세에 대한 욕심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남보다 앞 설려고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남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권세욕이나. 명예욕, 또는 지배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기 자녀가 학교에서 줄반장만 되어도 좋아합니다. 또 본인도 그렇게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사회에서는 더 말 할 것도 없거니와 어느 공동체이건 선거철만 되면 긴장되고 살벌한 느낌마저 들곤 합니다.

성경에 보면 권세에 대한 욕심이 얼마나 컸는지 아버지를 물리치고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던 패역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다윗 왕은 이러한 아들을 두 명이나 두었던 기구한 인생이었습니다. 첫째로 반역을 일으켰던 인물은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반역을 일으켰던 인물은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였습니다. 그러나 반역을 일으켰던 이 두 아들들은 모두 실패하고 비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결국 스스로 욕심의 무덤을 판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세에 대한 욕심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누가 더 크냐?” 고 쟁론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9:35).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온 인류를 섬기는 자가되셨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으신 것입니다.

셋째, 지나친 욕심을 부린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욕심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인간의 악한 속성입니다. 요일2:16절에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오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 모든 탐욕이 모두 헛되다는 말씀입니다.
중세의 카톨릭에서는 일곱 가지의 큰 죄를 말했는데,
1) 오만스러움 2) 과욕 3) 육욕 4) 노여움 5) 대식(밥 많이 먹는 것). 6) 시기 7) 게으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곱 가지의 대죄 중에 세 가지가 욕심이었던 것입니다.(즉 과욕, 육욕, 대식)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갈5:24).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한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달려간 곳까지의 땅을 모두 주겠다는 임금님의 약속이 떨어지자 한 사나이가 해가 질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가다가 그만 기진맥진하여 쓰러지자 지팡이를 앞으로 쭉 내밀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지팡이 끝까지 내 땅이다” 라고 소리치고는 숨이 끊어져 죽었던 것입니다

욕심의 종말은 무덤입니다. 기브롯 핫다아와의 비극은 오늘 이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욕심만 부리던 옛 옷을 아낌없이 벗어버리고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새 사람의 옷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