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제를 드려라

속죄제를 드리라
레16:6-10





요즘 점집이 아주 성황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이 점집이 잘 사는 동네에서 더욱 성행하는데 벤처기업이 밀집한 서울의 테헤란로가 성황을 이룬다고 합니다. 그곳에 벤처기업 사장들이 점을 보러 온다고 합니다

. 강남역에 있는 김 모 철학원에서 있었던 정보입니다. 기업체 사장들이 직원을 채용할 때 이력서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들의 실력과 학력보다도 누구를 직원으로 채용해야 내 사업에 횡재수를 줄 것인가를 사주 관상을 가지고 참고하는 사장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해고를 시켜야 될 경우에도 데리고 와서는 어느 친구를 해고시켜야 될는지를 결정해달라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이런 세태 풍속은 오래 전부터 있어온 것이겠지만 우리가 다른 면에서 이런 문제들을 접근해보면 누군가를 해고시키고 채용할 때 무속을 가지고 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 사회의 모든 면이 이런 경쟁관계에 있고 어느 한쪽이 희생을 해야만 일이 되는 측면이 많이 있습니다.



속죄의 수고



속죄라는 말은 대가를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제사가 속죄제사입니다. 우리의 생활원리가 속죄 원리입니다. 농부들이 농사를 짓는 속죄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에 농산물이 생산이 되고 우리가 먹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부들의 속죄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해산물을 먹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이라는 것도 부모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녀교육도 속죄의 원리입니다. 만사는 모두 속죄의 관계와 원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환경은 그 사람에게는 제일 중요합니다. 병을 않고 계시는 분은 그 병의 치료가 가장 절실한 문제입니다. 다른 일보다도 우선 치료를 받아 건강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은 빨리 석방을 받아 출감하는 일입니다. 그곳에 있으면 어떤 계획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면 무엇보다도 죄 용서를 받는 일이 시급합니다. 때문에 다른 일보다도 이 죄 사함의 멍에를 벗는 축복이 가장 절실한 것입니다. 사람이 죄 사함의 은혜를 염두해 두지 않고도 집도 짓고 결혼도 하고 여행도 가는 등 모든 일을 합니다만 죄인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가장 먼저 요구되는 은혜는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속죄제의 두 형식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죄제사를 주셨습니다. 속죄함을 입어 죄의 용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죄인이다, 영원한 멸망을 받는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입으라고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속죄를 위해서 속죄제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속죄제는 다른 제사와 다릅니다. 우선 속죄제사는 두 염소를 택하여 제비를 뽑습니다. 한 염소는 여호와께 드리고 한 염소는 아사셀을 위하여 드린다고 했습니다. 여호와께 드린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아사셀을 위하여 드린다는 말은 다른 제사와는 구별됩니다. 속죄제사는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있어야 합니다. 아사셀이란 말은 떠나 보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외경 에녹스에 보면 아사셀이 나오는데 거기서는 타락한 천사의 이름으로 나옵니다. 이 아사셀은 광야에 거하는 악령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과 정 반대되는 흑암의 권세를 지배하는 영입니다. 아사셀은 광야의 출입구가 없는 깊은 절벽과 캄캄한 곳에 거하는 영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속죄제를 드리라고 할 때 여호와께만 드리지 않고 아사셀을 위해서도 한 마리의 염소를 희생시키는가 이것이 특이한 원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속죄 제사를 위해서 두 가지 모형을 가지고 제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입으려면 먼저 죄를 지어야 됩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죄 사함의 은혜를 입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죄 사함이 절실합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특별한 두 가지 형식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선 염소 두 마리 가운데 제비에 뽑힌 한 마리의 염소는 여호와께 드려집니다. 물론 그 염소 위에 안수기도를 하여 나와 백성의 죄를 다 거기에 전가시킵니다. 그리고는 죽여서 피를 바르고 각을 떠서 여호와의 단에 올려서 하나님께 속죄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또다른 한 마리는 염소머리에 안수기도를 한 다음 백성들의 죄를 전부 거기에 전가시켜서 광야 먼 곳으로 끌고가 산 채로 버리고 오는 것이 아사셀 제사입니다. 이 두 가지 형식으로 하나님이 속죄제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이 두 가지 면에서 영적인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기서 배우게 됩니다.



영원한 제사



구약의 사람들은 속죄제를 한번 드리고 끝나는 게 아니라 자주 드렸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1절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구약의 제사장들이 속죄제를 드리지만 백성들이 속죄제를 한번 드렸다해서 죄를 안 짖는 것이 아닙니다.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럴 때마다 속죄제사를 드려야 죄 사함을 받는 것이 구약의 제사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자주 제사를 드리지만 죄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계속 제사를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또다른 속죄제사를 말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 \"하나님의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로서 십자가에 단번에 죽으신 제사가 속죄제입니다. 그 속죄를 믿는 자는 죄를 범할 때마다 속죄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2절에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예수 그리스도가 드린 제사가 속죄제사입니다. 그가 우리의 죄값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메시야는 한 번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효력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제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속죄제사를 믿는 자는 영원한 죄 사함의 효력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죽으심이 나를 위한 속죄제로 받아들임으로 우리가 영원히 죄 사함의 은혜를 입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단번에 죽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죄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사함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는 영원한 효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넘어졌다고 해서 죄사함의 은혜가 무효가 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넘어져도 우리의 죄사함의 은혜는 영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 속죄제사와 다른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믿고 나서 자꾸 죄를 짓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일마다 회개기도를 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회개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정확한 이해를 가져야 됩니다. 구원에 이르는 죄 사함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번 회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바로 살기 위해서 불신앙적인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 회개하는 게 아닙니다. 죄 사함의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됨을 믿습니다 라고 받아들이는 회개가 구원에 이르는 회개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주되심을 내가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영적인 경험이 확실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죄 사함의 은혜에 이른 것입니다. 죄 사함의 회개에 벌써 확정이 된 것입니다. 다시는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위험한 유혹



어느 날 전도자가 서울역에서 내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교인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접근하지 불신자에게는 접근합니다. 그들이 보기에 저 사람이 목사 같다 싶으니까 내게 다가와서 \'선생님, 잠시 시간 좀 내 줄 수 있겠습니까?\'라는 것입니다. \'지금 열차 타려고 여기 서 있는 중입니다.\' \'선생님, 죄 사함을 받으셨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구원파의 전도구호가 그렇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습니까\' \'거듭났습니까\' \'구원받았습니까?\'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물을 때 나는 \'죄 사함 받았습니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못하는 사람들이 머뭇거리면 \'선생님은 아직 죄 사함의 은혜를 모르십니다. 죄 사함의 은혜를 아셔야 됩니다.\' 이렇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이들의 정체와 수법을 알았기 때문에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죄 사함은 우리가 회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래가 아닙니다. 죄 사함은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하신 그 속죄를 내가 믿습니다 라고 받아들일 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믿고 살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어떤 도덕적인 죄를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나의 주되심을 받아들임으로서 그 죄는 사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땅위에 살면서 행실을 잘못하고 덕을 끼치지 못하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관계된 회개입니다. 우리가 부덕한 것을 회개하지 않고 살면 덕을 잃어버리고 축복을 잃어버립니다. 그것을 위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회개를 한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죄사함 받은 은혜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싱경기는 상대방을 KO 시켜야 내가 이깁니다. 그러나 신앙경기는 내가 하나님 앞에 KO를 먼저 당해야 됩니다. KO 당하는게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전도하자는 것도 바로 이 죄 사함의 선물을 그들에게 나누어주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을 자기의 죽음으로 받아들임으로서 죄가 속함을 입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 전도의 열매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이 우리의 전도축제입니다.



속죄의 양면



그런데 죄가 사하여졌다 라는 것은 양면이 있습니다. 염소 두 마리를 가지고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리고 한 마리는 아사셀에게 드렸습니다. 이 양면이 속죄제에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일반적인 원리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수술할 때 우리 몸안에 있는 축출물은 더러운 것입니다. 수술하고 드러낸 그 축출물은 특별히 관리를 합니다. 그것은 일반 쓰레기보다 훨씬 더 더러운 것입니다. 이와 같이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수술입니다.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건강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제거하는 수술이 있어야 우리 몸 안에 생명이 소생됩니다. 썩은 살을 제거해야 성한 살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술의 양면입니다.

속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제거되어야 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는 작업이 일어나야 합니다. 여호와 앞에 드려졌다는 이 의미가 무슨 뜻일까요? 염소 한 마리를 여호와께 드렸다고 했는데 속죄제는 여호와께 드려지는 측면이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이제 너는 내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소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몸을 사셨기 때문에 이제 너희는 하나님의 것이다 라고 성경이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속죄를 믿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으로 소유가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께 드려지는 염소의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영혼과 우리의 생애는 여호와의 수중에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성도는 이제는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소유가 되어버렸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한참 믿었는데도 나는 내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죄 사함의 기쁨을 모르는 것입니다. 죄 사함의 기쁨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소유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해야만 죄 사함의 기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바쳐지는 제사가 완전히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사셀 염소에게 모든 죄를 전가시키게 됩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광야에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산채로 보내지만 거기서 죽게 하기 때문에 여호와께 죽여서 드리는 것이나 산채로 광야에 끌고 가서 죽는 것과 똑같은 죽음입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염소 이것은 영적으로 우리의 죄가 다시는 우리를 멸망의 길로 끌고 가지 못하도록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하나님의 증표인 것입니다.

시편 103편 8절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12절에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죄가 다시는 우리를 끌고 가지 못하도록 아사셀 염소에게 우리의 죄를 실어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죄가 완전히 사해졌다는 것입니다.



적용되는 제사



오늘 우리의 영적 생활에도 이 원리가 계속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곧잘 드려지는데 아사셀 염소를 내어보내는 것을 하지 않는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수술로서 제거해야 할 것을 제거하고 하나님 앞에 찬양과 기도와 순종으로 살아야 되는데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보내지 않고 여호와께만 드리려고 하는 신앙생활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양면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필요한 것은 깨끗이 아사셀 염소에게 실어서 광야에 내어 보내야 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드려져야 합니다.

미국이 한참 월남전쟁을 할 때 월남전에서 부상당한 장병들을 모아놓고 미 국방성에서 대대적인 위문공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코메디언 밥 호프를 초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너무 유명하니까 도저히 그 행사에 시간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데 이미 선약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위문공연에 못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밥 호프가 안오면 그 행사의 격이 떨어지기 때문에 기어코 데리고 와야 될 형편이었습니다. 끈질기게 설득하여 5분만 와서 공연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한 무대에 서면 최소한 30분 내지 한 시간 가량 공연을 해야만 진가를 발휘하는 사람인데 5분의 공연을 위해서 오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밥 호프가 왔는데 온 청중들이 환호를 했습니다. 그런데 30분이 흘러가도 그칠 줄을 모릅니다. 이 호프가 눈물을 흘리면서 40분까지 공연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 사람이 왜 저렇게 하는가 주최측 뿐 아니라 모두가 놀랐습니다. 뒤에 호프가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그날 공연할 때 앞자리에 있는 두 장병을 보고 무대를 내려 올 수가 없었습니다. 한 장병은 오른팔을 잃었고 한 장병은 왼팔을 잃었는데 이 두 장병이 나란히 앉아 서로 한쪽 손을 가지고는 서로 박수를 치면서 얼마나 즐겁게 이 공연을 즐기며 기뻐하는지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나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공연하게 되었고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그 친구들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내 생애에 가장 진한 기쁨을 그 친구들의 웃음에서 발견을 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장병은 부상을 당한 후에 몇 번이나 죽으려는 좌절을 겪다가 자기 속에 있는 큰 절망을 거두어내고 이제는 소망 가운데 살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에 이 호프의 공연장소에 나와서 즐거움을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절망감에 있는 상의 용사라면 그 공연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병사는 그런 절망을 아사셀 염소에게 내어보낸 다음에 그들의 삶 속에 소망이 온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안에 거두어져야 될 아사셀 염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불필요한 온갖 걱정, 근심, 염려, 시기, 질투, 불평, 원망, 탐심,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다 아사셀 염소에게 실어서 광야에 내어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참된 기쁨과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가운데 소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안주시는게 아닙니다. 은혜와 축복을 주셨지만 우리 안에 아사셀 염소를 내어 보내지 않기 때문에 축복이 임해도 오염되고 맙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병의 세력을 거두지 않고는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영양이 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원리입니다.



죄 사함의 기쁨에서 창출되는 기쁨



죄 사함의 기쁨은 근본적인 기쁨입니다. 성도의 기쁨은 죄 사함의 근본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도 죄 사함의 기쁨에서 함께 우러나와야 만들어지는 자생적인 기쁨이 가능한 것입니다.

타겟이라는 분이 창(窓)이란 제목의 단편 글을 하나 썼습니다. 두 환자가 한 병실에 입원을 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폐암말기 환자이고 한 사람은 척추중증 장애자입니다. 폐암말기 환자는 이제 며칠만 있으면 죽을 환자입니다. 그러나 가끔 일어나서 실내를 걷기도 하고 창 밖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척추장애 환자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데 누워만 있어야 되는 환자입니다. 그런데 이 폐암말기 환자가 창 밖을 보면서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또 명랑하게 사는 그 모습을 보고는 이 척추환자가 물어 보았습니다. \'당신 창밖에 무엇이 보입니까? 늘 그렇게 좋아합니까?\' \'예, 이 창밖에는 호수가 있고 백조가 놀고 있으며 그 근방에 잔디밭이 있는데 가족들이 같이 나와서 즐겁게 뛰어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도 마음이 기쁩니다.\' 그때 이 척추환자가 \'내가 자리를 잘못 잡았구나. 이 침대가 창 쪽으로 가야 되는데 나는 안쪽이 되어서 창을 못 보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그만 마음속에 저 친구가 빨리 죽으면 내가 저 쪽으로 갈 수 있지 않겠나 이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어느 날 밤 이 폐암말기 환자가 심한 기침을 하면서 고통 때문에 몸부림을 칩니다. 평소 같으면 서로 비상벨을 눌러 주기로 했는데 이 척추환자가 일부러 비상벨을 안 울리고 그냥 있었습니다. 소동이 나니까 그 폐암말기 환자를 싣고 나갔습니다. 그날 밤 이후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척추환자는 허락을 받아서 침대를 창 쪽으로 옮겼습니다. 억지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니까 호수는 커녕 삭막한 집들밖에 없었습니다. 폐암을 앓던 그 환자는 소망을 가지고 자신이 며칠 살지 못하겠지만 기뻐하면서 사는 방법을 창출하며 자기의 생각과 정신 속에서 기쁨을 만들어내면서 기뻐한 것입니다.



맺는 말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 속죄제의 양면의 원리가 살아 있고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잘 믿으려고 하고 지상의 자기생활 속에서는 지저분한 아사셀 염소를 그냥 두고 있다면 하늘의 축복이 임해도 내게는 축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받은 은혜가 내 안에서 열매맺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나쁜 생각과 더러운 탐심과 정욕들을 아사셀 염소에 실어서 광야로 내어 보내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염소가 살아서 다시 돌아오면 안됩니다. 정확한 결단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끊어야 될 것들을 단절해버려야만 받은 은혜가 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 속죄제의 축복 안에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