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적 죄를 지니고 서는 거룩을 대면 할수 없다

만성적 죄를 지니고서는 거룩을 대면할 수 없다
레13:





레위기 13장은 두 개의 주요한 구분으로 나누인다. 하나는 인간의 피부병에 대한 진단과 치료요(2-46), 또 하나는 직물에 관계된 진단과 치료법(47-58)이다. 27가지의 피부병과 세 가지 다른 직물에 관한 병이 기술되고 있다(사람의 경우/ 털, 흰점/난육/, 다시 생겼을 때, 불에 데였을 때)

성경에서 말하는 문둥병을 오늘날의 한센 병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그 이유는 직물과 빌딩 등에도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둥병에 관한 내용을 종기, 변색, 피부병에 의한 딱지, 벗겨짐, 곰팡이 등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5세기 전에는 문둥병에 의해 고통을 받았다는 기록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기독교 시기 전에는 매우 드물었으며, lepra라는 헬라어 역시 진짜 문둥병을 말하는 elephantiasis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피부병에서 언급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는 정확치 않지만 건선(2-17), 기계총(황선: 29-37), leucoderma(38-40)을 포함하며, 데임에 의한 조직 손상이나 습진, 포진, 혹은 문둥병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최근에는 leprosy of joints가 많지만, 이 성경의 내용은 White leprosy(called Lepra Mosaica)는 최근에도 아라비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고 카일 & 델리취의 주석에서는 말한다. 그리고 Trusen의 기술을 인용한다.

“매우 자주 그 병이 일어나기 전 수년 전에 하얗고 노란 점들이 피부에 특히 생식기에 이마에 그리고 얼굴에 그리고 관절에 나타난다. 그것들은 느낌이 없고, 때로 머리카락을 점들과 똑 같은 상태로 만든다. 이 점들은 후에 피부를 파고 들어가서 근육과 뼈에 미친다. 머리는 하얗게 되고 결국 떨어진다. 아교질의 부풀어 오름이 세포 조직에 형성되며 피부는 딱딱해 지고 거칠어지며 솔기가 되어지며 림프액이 그것으로부터 나오며 커다란 딱지가 생긴다. 매우 아프다. 손톱이 부풀어 오르며, 끝부터 감아 올려지며 떨어진다. 코가 막히며 심각한 점액이 흐르고 감각은 무뎌지며 환자는 야위고 약해지며 끊임없는 갈증과 뜨거운 열이 그의 고통을 끝낸다(Krankheiten d. alten Hebr. P. 165)

제사장들이 기간을 두고 판단해야만 했던 것은 그것이 고정된 것인가 혹은 낫고 있는가(정함), 퍼지고 있는가 그리고 전염적인 것인가(부정해 짐)를 판단해야 했다.
그것을 위해 제사장들은 피부병 진단의 주요한 기준으로 그 감염이 만성적인 것이거나 한 주 드리고 두 주 이상 되어지는가를 지켜 보아야 했고 피부보다 깊은 것인가를 확인해야만 했다. 그 결과 속살이 나오고, 색이 바뀐 것은 부정한 것이었다. 직물 역시 한 주 이상이어야 하고 깨끗이 씻기지 않아야만 했다.
특이한 기록은 13의 내용인데 완전히 하얗게 되었을 때는 정하다는 판결을 내리라는 명령이다. 그것은 그 병이 끝나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되었던 것이 비듬이 되어 죽어 나가고 깨끗해 진다. 그러나 기운이 넘치는 살이 있으면 하얗게 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진행 중인 것으로 부정하다고 정해졌다.

결과: 고통 받는 자는 한 주 동안 분리된 후 좀 더 심각한 것일 때 좀 더 장기적인 분리 필요했다. 그것은 공동체를 영향 주지 않기 위함 처럼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만져 부정케 되는 일이 없도록 함이었다. 그러나 제일의 목적은 부정한 것이 거룩한 것을 접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종교적 목적이 우선했다는 말이다

감염된 직물을 불사르는 이유 역시 그것을 입음으로 사람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들 자신이 위험에 직면할 뿐만 아니라, 만일 부정한 채로 예배에 참석할 때에는 다른 이들을 위험에 직면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실질적으로 죽은 자에 속했다, 그 병이 죽음으로 여전히 살아 있는 몸을 침범하게 하기 때문이며 공동체와 경배의 장소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정하다고 정한 사람은 옷을 찢고 텁수룩한 머리와 가려진 얼굴로 슬픔의 예식을 행해야만 했다(45-46). 그것은 죽은 자들에 대한 표현이었다(10:26; 21:10). 옷을 찢는 것은 슬픔을 의미했다. 죽음이나 죄 혹은 그 결과에 대한 슬픔이 그것이다. 수염을 가리우는 것은 특히 (겔 24:17, 22) 죽음의 슬픔을 위한 것이었다. 미가서 3:7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대답을 받지 못한 자들의 수치와 관련되어진다.

그는 또한 영문 밖에서 살아야 했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들의 집으로부터 떠나 살아야 했다. 그것은 비참한 상황이었다. 고대에서 그것 자체가 재난이었다. 한적한 곳에 사는 것이 아닌 죽음과 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나님의 집으로부터의 분리였다.

그것은 가장 하나님과 가까운 거룩한 장소인 성막으로부터 가장 멀어진 삶을 살아야 했는데 그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막은 거룩한 백성들이 사는 진들로 둘러 쌓여야만 했다. 그는 살아 있는 죽음을 경험했다.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박탈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에덴 동산으로부터의 축출과 같다. 하나님 개의치 않는 곳으로의 축출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길어질 때, 그것이 이미 옛 것일 때, 지속적인 것일 때에 그러했다 씻음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에 그러하다.
거룩은 레위기에서 온전함에 의해 상징되어진다. 동물들은 희생되기에 완전해야 했으며, 제사장은 육체적인 흠이 없어야 했고, 혼방은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에 있어 온전함과 신실함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행동해야만 했다.
어떤 사람이 지속적인 부조화의 상태에서 온전함의 부족을 보였을 때에, 그는 배척되어야만 했다. 일시적인 일탈은 그 경우에 해당치 않는다.

이 법은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순결함과 거룩의 중요성에 대한 웅변적인 증언이다. 개인적인 불편함이 나라의 영적인 안녕을 위태롭게 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중심으로부터 배척되어진 부정에 근거하여 그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사 6:3-5).

일상에서 믿음에 의한 변화가 믿지 않는 이들의 변화 이상이지 못한 것처럼 보일 때,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경험치 못한 수준의 성결을 요구하고 계심을 배운다. 단지 우리가 그것에 미치지 못하기에 예수님 안에서의 변화를 그저 그런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배운다. 지속되는 정결치 못함이 결코 거룩을 대면할 수 없음을 드러내시는 이 말씀이 우리로 더욱 거룩한 삶을 사모케 하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