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승천과 땅으로 재림의 뜻

하늘로 승천과 땅에로 재림의 뜻
계21:3-7





교회력상 오늘은 부활절 후 여섯째 주일로서 승천주일입니다.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백한 후, 곧 이어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라는 중요한 고백구를 삽입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오르셨다는 말,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말, 저리로서 다시 재림하시겠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늘은 성경 속의 초대 부활공동체가 증언하려 했던 승천과 재림 신앙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여 올바른 우리의 신앙을 갖고자 합니다.

첫째로 이해해야 할 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늘과 땅이라는 두 가지 어휘로 말하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천지 곧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사도신경 첫 구절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사오며\"라고 첫 고백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하늘과 땅\' 이라는 두마디 말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 그 전체를 총괄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단순히 푸른 창공과 우리가 발딛고 다니는 대지 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보면, \'하늘\'이라는 피조물은 저 창공 어딘가에 있는 별나라세계의 또다른 공간이라기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만물이 존재하기 위하여서 반드시 없어서는 아니될 \'형상, 이념, 이데아, 본질\'을 의미하고 \'땅\'이란 \'질료\'를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또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저 유명한 <사도신경 해설> 속에서 말하기를 \"하늘은 인간에게 이해될 수 없는 피조물이며, 땅은 이해될 수 있는 피조물이다\"고 해석했습니다. 하늘과 땅은 모두 다 피조물의 범주에 들어있는 피조물의 형식인데, 하늘에 속한 피조세계는 공간적 거리로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실재계가 아니고, 다만 인간지성이 다 이해할 수 없고 지배 할 수 없고 정복할 수 없는 전혀 차원이 다른 피조세계질서라는 의미에서 하늘처럼 높고 멀고 숭고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관심하고 증언하려는 더 중요한 메시지는 하늘이 무엇이고, 땅이 무엇이냐라는 해석이 아니고, 그 상호간의 질서와 관계, 그 상호간의 불가분리적인 통일성, 그 하늘과 땅이라는 두 질서가 모두 새롭게 변화할 열려진 미래의 희망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로서 하늘과 땅은 그 영적 질서에 있어서 위와 아래,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으로서 구별되어 있고 서로 혼동 할 수 없이 엄존할 지라도, 놀랍게도 그 양질서의 세계는 동시에 불가분리적으로 우리의 호흡과 크고 작은 체험 속에, 그리고 모든 생동하는 생명체들의 운동 속에 함께 있고, 서로 눈짓하며 서로 부르며 서로 관계 맺으며 서로 의지하며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백자 청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도예가의 마음속에 형상과 질로서의 진흙덩이가 따로 있었지만, 작품 속에서는 형상과 질료가 어울려져 분리할 수 없이 함께 있듯이 말 입니다.

아주 오랜 이스라엘의 고대전승 야곱의 벧엘 이야기 속에도 그 사실은 아름다운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로서, 층계로서 은유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야훼하나님 전능자 하나님이 야곱에게 땅의 기업 축복을 약속하고 있으며,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계약의 대상자 인간 야곱을 떠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은총의 약속으로 벧엘 이야기를 끝맺고 있습니다. 야곱이 꿈에 보니, 하나님의 보좌와 자기가 누어있는 땅의 돌배게까지 사닥다리가, 층계가 이어져 하늘에 닿아있더라는 것은 두질서 세계가 통하고 서로 잇대어 있다는 상징입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분명히 영적 질서 상에서 보면 하늘은 땅에 대립해있고, 상위의 질서이며,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이 있고 하나님의 얼굴을 더 가까이에서 뵙는 천군천사들과 앞서간 성도들의 영적 세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질서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활동의 궁극적 목적지점은 하늘이 아니고 우리의 몸이 살고 있는 이 땅 입니다.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구원이 시작되는 시원점은 하늘이지만, 구원이 열매를 맺는 종착점 목적점은 땅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천군천사들의 구원에 관심이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선상에 서서, 하나님과 계약관계에 서있는 인간을 그 정점으로 하는 땅 위의 모든 피조물을 살리는데 하나님의 전 관심이 있다는 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이야기 본질입니다. 그것이 성육신 신앙의 본질 핵입니다.

예수님의 영성이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우리에게 항상 그렇게 살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이 말하려는 그 중심지향성이 무엇입니까? 주기도문의 중심제목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노심초사,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 일 하는 것이 당신의 양식이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오셨고, 그 일을 위하여 사셨고, 그 일을 완성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그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무시로 기도하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이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은 \'하늘\'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이제 예수님께서 땅 위에 계실 때처럼 유대 땅 갈릴리에 시공간적으로 한정된 제약을 받으실 필요가 없는 영적 몸을 입으시고, 시공을 초월하여 당신의 구원사역을 현재적으로 진행하고 계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은 이제 하나님의 주권, 권능, 영광, 통치를 위임받으시고 하늘과 땅을 하나로 화해시키고 통일시키는 중심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재림하신다는 말은 땅위에 있는 그의 성도들 144,000명을 데리러 오겠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의 종국적 대상인 땅의 실재를 완성하시기 위해 심판하고 갱신하고 새롭게 하시기 위해 당신의 구원사역의 최종목표를 땅으로 설정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 이 기도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신앙이 참된 복음주의신앙인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느냐 못되느냐의 판가름이 사실 주기도문의 그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진지하고 바르게 이해하고, 그 정신에서 살아가고 있는가의 여부로서 판가름이 나는 것입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지난 2,000년 기독교역사는 주님이 가르쳐준 주기도문의 참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순명하는 신앙의 길이라고 하기보다는, 플라톤의 제자들이었고, 영지주의 이교신앙의 제자들 이어서, 주기도문을 버리고 묵시자들의 기사와 이적을 좇는 불신앙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일부 진보적 자유주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오해하듯이, 인간들의 손으로 땅위에 건설하는 도덕적, 복지사회, 정의와 평등과 자유가 지배하는 이상적 지상왕국이 \'하나님나라\'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신앙에 떨어져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나라는 항상 \'저리로서 이곳으로 새롭게 임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속에 있습니다. 하늘이 시원점이고 땅이 그 종국점이라고 했습니다. 낡아진 옛 땅의 수리와 보수가 하나님나라 일 수는 결단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보아라 ,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하시고 새하늘과 새 땅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늘도 땅도 새롭게 변화해 가는 열려진 미래, 열려진 세계상을 지니기에 항상 새롭고 젊고 환상에 불타며, 현상에 고착된 사고를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늘과 땅이 어울러진 신비체의 최고작품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지참자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은 새하늘과 새땅의 처음 열매입니다. 하늘의 여러분 생명 속에 들어와 있고 땅도 여러분의 생명 속에 수렴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인답게, 아름답고 의연하고 당당하고 정의롭게 살아갑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