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4:1-11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4:1-11



1. 우리는 이름을 호명 당하면 “예!”로 답합니다. 그러면 미국 사람들은 뭐라고 대답할까요? “Yes!” 물론 이렇게도 답하긴 하지만 많지는 않습니다. 미국인들은 호명을 당하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Here!” 여기에 있다라는 뜻일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더 합리적인 대답일 것입니다. Here!

연초에 우리는 올 한 해 신앙 생활의 목표를 이렇게 정했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Lord! Here am I!” 늘 주님 앞에서 올바른 생활, 주님 앞에서 실존적 삶을 살자고 그렇게 정하였습니다. 아프면 아픈대로 주님 앞에 들고 나가 “주님,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아픔을 안고 이렇게 있습니다!” 괴로우면 괴로운대로 “주님, 내가 이렇게 괴로움 가운데 있습니다!” 즐거우면 즐거운대로, 우리 삶의 그 모습 그대로 들고 주님 앞에 선 삶을 살자고 그렇게 이 해를 출발하였습니다.

이제 12월 첫 주일입니다. 어떻게 사셨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 “주님!”하며 무어라고 대답하실 것입니까?

2. 성경에 보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러 곳에 나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성경 앞부분, 그리고 중간 부분, 끝 부분에 인상적인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독특한 모습들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의 이야기로 요셉이 있습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이 요셉인데, 그 요셉은 인생이 억울하게 하향 곡선을 그릴 때마다, 생각지 못한 억울한 일을 당하여 그 인생이 시궁창으로 떨어질 때마다 우리 같으면 분하고 억울해서 울고불고 할텐데, 그는 단 한 마디 불평이 없습니다. 보통 우리들 같으면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하고 대들텐데 요셉은 단 한 마디 불평이 없습니다.

동방의 의인이라고 불리던 욥조차도 억울하게 받는 고난의 정도가 심해지자,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하며 항변하는데, 정말 억울하고도 억울하게 인생이 곤두박질하는 데도 요셉은 단 한 마디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 비결이 뭘까요?

창 39:9절에 보여집니다.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와 시위대장, 즉 경호실장 보디발의 집안 총무가 되었을 때, 잘 생긴 외모, 요즘 아이들 말로 ‘얼짱’인 이유로 보디발의 부인이 요셉을 유혹하였습니다. 집안에 아무도 없다, 우리 둘 뿐이다 하며 유혹합니다. 거절하기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런데 이 장면에서 요셉은 아주 단호하게 거절하는 데, 그 이유인 즉, ‘당신은 내 주인의 부인이다’라는 철저한 윤리 의식과,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신앙적 자의식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보지 않는다, 아무도 없다 하는 것은 그에게 의미 없습니다. 요셉은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합니다. 그 은밀한 방, 어두컴컴한 곳에서 요셉은 마치 천군 천사와 더불어 자신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을 느낍니다. 그리곤 자신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피할 수 없으며, 자신의 삶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생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아무도 없다고 해도 자신은 하나님을 그 자리에서 느끼기에 범죄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삶을 ‘쿼람 대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유혹 받을 때에만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아니라, 잘 나갈 때도, 추락할 때도, 기쁠 때도, 비통할 때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어떠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입을 가벼이 놀리지 않았습니다.

절망적이고 비통하며, 억울함이 가득하여 눈물이 고일 때 요셉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현재 보고 계심을 의식하기에 꾸욱 참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내 억울함을 보고 계시는 데 그냥 버려 두시겠는가, 주님께서 내 아픔을 지금 이렇게 보고 계시는 데 ... 주님~ !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확신하는 자의 삶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볼 수 있는 인상적인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의 모습은 스가랴 3장에 기록된 대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3:1-3)

대제사장이라면 백성들 중에서 가장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하는 가장 온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서 있는데,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습니다. 죄가 많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평신도라면 몰라도 대제사장이 죄악의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소환 당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를 기회다 싶어 사탄이 그 옆에서 그의 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한 마디 말도 못하는 것으로 보아 사탄의 고발에 틀린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당혹스러울까요!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그런 대로 존경받는 직분에 있었고, 그런 대로 사람들에게 괜찮은 인간이라고 여겨졌는데, 정작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가장 거룩해야 할 그 때에 그 동안 감추어져 있던 그 모든 죄악들이 드러나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어야 하는 그 심정, 정말이지 죽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예기치 않은 사랑, 놀라운 사랑이 이어집니다.

4절,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마침내 하나님께 소환 당하여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우리의 부끄러운 삶이 낱낱이 사탄에 의해 고발당할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서 있는 우리에게 이런 기가 막힌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이 축복이 여러분에게 분명히 있을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성경의 끝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 앞에 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쏟아 부으시는 은혜와 역사 속에 놀라운 성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자기 재물을 주님께 아낌없이 드리는 헌신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교인들이 다 그렇게 함에 자신들도 거기에 동참하고 싶었습니다. 자기들도 믿음이 좋은 성도의 대열에 끼고 싶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름다운 욕망입니다.

그런 거룩한 욕망 속에 드디어 자기들도 땅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땅을 팔고 보니 그 판 돈이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거액이었습니다. 이걸 다 바친다?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사람은 고민하다가 그 일부를 떼어 감추고, 나머지를 들고 교회에 갔습니다. 그리곤 사도 베드로에게 자기 땅 판 값 전부라고 자랑스럽게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 뿐이라 하더라”(행 5:8)

그들이 땅을 팔아 그 재물을 들고 간 곳은 교회이며, 사도 앞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선 것입니다. 더군다나 헌신의 재물을 들고 하나님께 모두 드립니다 하며 하나님 앞에 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하나님 앞에서조차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이 신앙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해 주고 인정해 주기를 바래,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다고 봉헌 시간에 다 일어섭니다. 여러분, 그 일어서는 순간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일어서는 순간 모두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다며 예물을 드립니다.

나는 중고등학생 시절, 예배드릴 때 꼭 이 봉헌 시간만 되면 갈등을 빚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봉헌 찬송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사랑하고 의지하여 주만 따라 가겠네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

찬송가 71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친다고 찬송하면서 때로는 아깝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걸로 만화책을 몇 권을 볼 수 있는데 ..., 이걸로 이대 앞의 그린 하우스에 가면 빵이 몇 개인데 ... 사랑하는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 하면서 실은 그 헌금액수보다 더 많은 돈이 주머니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바치지도 못하면서, 아까운 마음으로 드리면서 아낌없이 바치고, 모두 드린다는 그 찬송이 언제나 나를 기죽게 하였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그 자리에서 그 찬송을 부르는 나에게 ‘너 이게 정말 다냐? 너 정말 즐거이 드리냐?’ 물으셨다면 나는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거짓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배짱 좋게 이게 다냐 묻는 그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고, 그리곤 죽었습니다.

3. 인상적인 3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있습니다. 창세기의 사람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서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이지 성경에 기록된 유일한 모범생입니다.

스가랴서에 기록된 대제사장 여호수아, 하나님 앞에 호출 당해 서 있는데, 유구무언, 죄악 속에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습니다. 정말이지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사탄은 곁에서 가만있지 않고 더욱 더 여호수아를 하나님 앞에서 파렴치한 죄인으로 몰아갑니다. 꼼짝달싹 못할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예리한 사탄의 고발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는데, 심판관인 하나님이 도리어 그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비록 죄악 속에 있지만, 무언으로 그 죄들을 인정하며 아파할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제 발로 하나님 앞에 걸어나와 서서 그 하나님 앞에서 거짓된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게 정말 다냐 하는 물음에도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그렇다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거짓말합니다. 그리곤 은혜 받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우리 모두 결국 하나님 앞에 섭니다. 아니 지금도 서 있습니다. 주님,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라고 소리치지 않아도 우린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뭘까요?

12월이 시작되는 날, 나는 주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이런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제가 어떤 처지에 있느냐고요? 제가 어떻게 한 해를 살아왔느냐고요? 주님, 이 모양 이 꼴로 이렇게 살아왔습니다”하며 동시에 아주 심한 부끄러움이 솟아올라왔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원하신 모습은 이게 아닌데 하는 자책과 더불어 내 부족한 모습들이 눈에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마치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듯한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부끄러움 속에 어쩔 줄을 몰라하는데, 아주 아주 깊은 곳에서 이런 주님의 응답이 들려왔습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아무런 책망도 없이 이런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지나간 때로 족하다!”

얼마나 기가 막힌 지 ... 퍼뜩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어,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이었습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3)

죄짓고 산 것, 지나간 때로 족하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와 이제 돌에 맞아 죽을 직전인데,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에 구사일생 살아난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하신 것처럼, 네가 지은 죄, 지난 간 때로 족하다, 이제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 후반부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믿습니까?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 순종하십니까?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아멘?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자기 재물, 자기 건강이라고 교만해 하지 마십시오!

4.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외칠 때, 선함과 거룩함 속에 외칠 수 있는 이, 마치 요셉과 같은 이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대제사장 여호수아처럼 더러운 옷을 입고 죄악 속에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바라기는 끝까지 회개치 않는, 거짓으로 일관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유구무언, 눈물 뚝뚝 흘리면서라도 주님 앞에 정직하게 서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지나간 때로 족하다. 이제 너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죄악, 지나간 때로 족합니다. 더 이상 거기에 붙들리지 말고, 반복하지 말고, 사유하시는, 깨끗이 하시는 주님의 피묻은 십자가의 손길을 의지하고 이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삽시다. 남은 세월, 주의 일에 힘쓰며, 주님께 영광 돌립시다.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