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도 회개치 아니하면 (1) 눅13:1-5 지하철 화재 사건 오랜만에 누가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4월 13일 종려주일부터 누가복음을 떠났으니까 7주 만입니다. 몇 달 전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 때 있었던 일입니다. 대구에서 30년 동안 믿음 생활을 해 온/ 김창제 집사는(69세) 교회의 기도모임에 가기 위해/ 전철을 탔다가 변을 당했습니다. 그는 출입문이 굳게 닫혀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불타고 있는 전동차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부인 석태순 집사에게/ 여러 번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는데/ 웅성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또 다시 전화가 연결되었는데/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나 하늘나라로 먼저 올라가네....할렐루야 아멘” 그 말을 남기고는 전화가 끊겼습니다. 전화 통화된 지 다섯 시간 후/ 그의 부인은 성경책을 꼭 품은 채/ 눈을 감은 남편의 시신을/ 병원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김창제 집사와 같이/ 갑작스런 재난을 당하여/ 세상을 떠나게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삶과 죽음 사이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았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날 동안/ 단 하루라도 무의미하게 보내서는 안됩니다. 자기 삶에 후회없이 살아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몇 가지 반응 주위에 불행당한 사람을 보며/ 몇 가지 형태의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 위로하는 형입니다. 그 당한 일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어떻게든 그 사람을 위로하려고 하고/ 상대방의 아픔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정죄하는 형입니다. 그 당한 것에 대해/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그 일은 분명히 당한 사람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 평소에 지은 죄가 많아서 그렇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기어이 내 말 안 듣더니/ 결국 그렇게 됐다.” 셋째, 의미를 찾는 형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의미를 찾고 교훈을 얻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텐데’ 하며/ 말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유형의 사람입니까? 무조건 위로하는 형입니까? 대놓고 정죄하는 형입니까? 의미를 찾게 하는 형입니까? 무조건 위로하면 상처는 안 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풀리지 않습니다. 대놓고 정죄하면 상처를 줍니다. 상처 위에 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미를 찾도록 돕는 것이 좋습니다. 할 수 있으면 말을 아끼고/ 가르치려고 하는 자세를 버리고/ 본인 스스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돕는 것이 최상책입니다. 여러분은 고난당한 이웃을 향해/ 지금까지 어떤 형태를 취하여 왔습니까? 여러분이 한 그대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뿌린 말의 씨가 자라/ 언젠가 열매가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될 것입니다. 여러분, 섣부르게 판단하지 마세요. 이웃의 불행에 대해 함부로 입을 열지 마세요. 고통 받는 이웃에게 정죄하는 것을 금하세요. 전도서 5장 2절을 보세요. 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고 합니다.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합니다. 우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임을/ 잊어선 안됩니다.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보다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을 보세요.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그대로 되돌려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말은/ 능히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능력있는 말을 가지고/ 남을 비판하는데 사용하고/ 남을 헤아리는데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축복의 입술이 되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언어의 능력을..... 남을 축복하는 일에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데 쓰시기 바랍니다. 타인을 세우는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남을 축복하면서 살아도 짧은 인생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아도/ 길지 않은 인생입니다. 타인을 좋게 생각하면서 살아도/ 금방 지나가는 인생입니다. 우리의 입술만 잘 지키면/ 죄짓는 것의/ 절반은 줄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복받기 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시편 34편 12-13절을 보세요. 34:12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34: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무슨 말입니까? 죽고 사는 것이/ 혀에 달렸다는 말입니다. 복을 받느냐 못 받느냐가/ 입술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회개하는 입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어떤 입술이 복된 입술입니까? 타인에 대해서는 축복하는 입술이고/ 자신에 대해서는 회개하는 입술입니다. 물론 자신을 축복하는 입술이어야 합니다. 1978년 태어나/ 이화여대 유아교육과를 졸업한/ 한 자매가 있습니다. 대학 4학년이던/ 2000년 7월 30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함께 승용차로 귀가하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 55퍼센트에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한 음주 운전자가 낸/ 6중 추돌사고 때문이었습니다. 응급실을 향해 달려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동생의 곁을 지키던 오빠는/ 살 가망이 없는 동생에게/ 이렇게 작별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넌 누구보다 좋은 동생이었어. 평생 잊지 않을 게. 잘 가.” 4-5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중화상 환자로/ 의사들마저 치료를 포기한 상황이었습니다. 7개월간의 입원/ 11차례의 수술/ 너무나 고통스러운 치료/ 3년여의 시간을 뒤로한 지금/ 더 이상 예전의 곱던 얼굴은 찾아볼 수 없고/ 온몸에 화상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지만/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는 자매가/ 이번에 책을 한 권 냈습니다. 그 자매는 그 책에서/ 사고로 자신의 인생이 끝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때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며/ 앞으로 상담심리학을 공부한 후/ 마음이 아픈 사람들의 마음 곁에 함께 서고 싶다는/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 자매의 이름은 이지선이고/ 책 이름은 [지선아 사랑해 : 희망과 용기의 꽃 이지선 이야기]입니다. 이지선 자매는/ 오늘도 화상으로 심히 일그러진 얼굴이지만/ 거울을 향해 손을 흔들며/ 자신에게 인사한다고 합니다. “지선아, 사랑해” 자신을 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할 때만이/ 자신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신을 향해 진정으로 축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오천남부교회 믿음의 식구 여러분, 하루에 한 번 이상/ 자신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한번 연습을 해볼까요? “너는 복의 근원으로 살지어다” “너는 행복할지어다” ...... 회개의 입술이 되라 그런데 자신을 축복하는 입술 이전에/ 먼저 회개하는 입술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됩니다. 회개함이 없이/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없이/ 축복이 임할 수 없습니다. 회개라는 말을/ 무겁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회개는 그릇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릇을 깨끗이 씻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 없이 축복 없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복을 사모한다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문제는 회개를 지체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을 미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인데/ 회개하는 일을 연기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내일 회개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없습니다. 중세의 탁월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회개할 내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으셨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회개를 내일로 미루지 마세요.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내일이 온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충격적인 뉴스 예수님이 여느 때처럼/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있는데/ 두어 사람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무슨 소식을 갖고 왔을까요? 참으로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것입니다. 여러 명의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빌라도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유월절 제사 때에는/ 3천명의 유대인들이/ 제단에 바쳐지는 짐승들처럼 학살당했으며/ 또 다른 어떤 유월절에는/ 무려 2만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총독이 괜히 유대인들을/ 학살하지는 않았을 거고/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독립을 요구하는 열심당원들이/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백성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자/ 로마 군인들이 이를 평정하고자/ 성전을 짓밟고/ 절기를 지키려고/ 성전 안에 있던/ 죄 없는 사람들까지 학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보는/ 유대인들의 시각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죄 없이 죽은 자들을 애도하는 입장입니다. 로마 군대에 분노하면서/ 빌라도와 헤롯을 정죄하고/ 무고하게 죽은 자들을 애도하는 입장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전에서 죽은 사람들을 정죄하는 입장입니다. 다른 곳에서 죽은 것도 아니고/ 성전에서 죽은 것을 보면/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어떤 입장을 취했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정죄하는 입장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사고와 불행을/ 죄의 결과로 여겼습니다. 아마 예수님께 나아와 보고한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관점을 가졌을 것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처럼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사실 맞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틀렸다고 말하기도 그렇습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죄에 있다는 점에서는 맞는 말이고/ 모든 사건 사고를/ 죄의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와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서 말씀하셨습니다. 2-5절을 보세요. 13: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은 크게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정죄하지 말라 첫째,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변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셨지만/ 누구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죄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빌라도의 죄 때문이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빌라도에 의하여 자행된 성전 양민 학살 사건의 소식을 듣고서/ 어느 한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들을 애도하지도 않고/ 빌라도에 대하여 분노하지도 않고/ 성전에서 싸움을 벌이다 죽은 자들을/ 율법을 범한 사람으로 정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셨습니다. 거기에 깔려죽은 18명에 대해 슬퍼하시지 않고/ 망대를 쌓았던 시공자들에게 화살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누구를 지목하여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성전에서의 학살 사건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은/ 대단한 이야기 거리였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애도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정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죽은 사람들과/ 죽인 사람들에게 쏠려 있는 시선을/ 말씀을 듣고 있는 무리들에게로 돌리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느라고/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정죄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는 순간 하게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3절을 보세요.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상합니다. 우리 눈은 자기 자신보다/ 남을 더 잘 봅니다. 내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달은 사람은/ 쉽게 남을 정죄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남의 허물이 보일 때/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을 보세요.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네 자신을 돌아보아”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의 말은/ 깊이가 없습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현대는 자기성찰이 부족한 시대입니다. 정말 중요한 거울을 보지 않는 시대입니다. 얼굴을 비춰보는 거울을 물경(物鏡)이라면/ 마음을 비춰보는 거울은 심경(心鏡)입니다. 우리는 물경 외에/ 심경을 가져야 합니다. 내 성격을 비춰보고/ 내 인품을 비춰보고/ 내 영혼을 비춰보는/ 마음의 거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거울을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1절을 보세요.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의 거울을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일반 거울과 원리에 있어서 같습니다. 거울의 목적은 보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보는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자기 모습을 고치기 위해서 봅니다. 우리가 말씀의 거울을 보는 것도/ 자신의 영혼을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이 올바른가를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살피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시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고쳐야 할 부분이 있으면 고쳐야 합니다. 거울을 보고/ 얼굴에 묻은 것을 보고/ 아 뭐가 묻어있구나 하고/ 그냥 놔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거울을 보고는/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먼지가 많이 끼어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보고도 그냥 지나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의 거울을 보는/ 또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미리 경계하는 것입니다. ‘아, 그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아, 그렇게 살아야 복을 받을 수 있겠구나.’ 오늘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목적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는 미리 경계합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펴라.’ ‘남의 눈에 티를 지적하기 전에 자기 눈에 들보부터 빼라.’ 우리는 무슨 사건이든지/ 어떤 일을 만났을 때/ 그 것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겸손히 찾아야지/ 성급하게 다른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 고하러 온 사람들의 마음속에/ 은근히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고/ 사고를 당한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사실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죄는 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죄는 크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문제가 없고/ 상대방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남을 정죄하게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죄의 질과 죄의 행태는/ 약간 다를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입니다. 드러난 죄인과/ 드러나지 않은 죄인의/ 차이일 뿐입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타인을 정죄해도 되는 겁니까? 아니죠? 하늘에 계신 분이 보고 계십니다. 그 분이 웃으십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그 조카 롯이/ 헤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난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재산이 많아짐으로/ 목자들 간에 다툼이 잦아짐으로/ 더 이상 한 곳에 거할 수 없게 된 겁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합니까? 삼촌으로서 롯을 나무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롯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롯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는 조카인 롯에게/ 목초지를 먼저 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습니다. 창세기 13장 9절을 보세요. 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문제의 원인을/ 더 이상 상대방에게서 찾지 않고/ 갈등의 원인을 찾아 해결합니다. 그 상황에서 붙들고 있어본들/ 계속하여 갈등만 재연될 뿐이었습니다. 목자들의 다툼은/ 급기야 자신과 롯과의 다툼으로 발전하게 될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누가봐도 손해보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죄보다 손해를 택했습니다. 죄짓는 것보다 물질적인 손해를 택했습니다. 이게 신앙인으로서/ 바른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회개하라 둘째,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말고/ 자신을 살필 것을 요구하신 주님은/ 이제 회개를 강력히 촉구하셨습니다. 3절과 5절의 말씀이 똑같지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 말씀에서 주님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 그들이 너희 생각대로/ 죄 때문에 죽었다고 하자. 그럼 너희들은 죄가 없어서 살아 있는 줄 아느냐?” 예수님은 남에게 향해 있는 관심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죄를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는 무관심하고/ 남의 죄에 지나친 관심을 갖고 있으니/ 예수님이 보시기에 답답하신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도 죄인이다’는 생각이/ 회개의 첫걸음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의식하는 사람이/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럼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의 원어 ‘메타노에오’는/ 지난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까지가 회개라면/ 우리는 회개에 미치지 못할 때가 많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까지는 합니다. 깨닫고 뉘우치기까지는 합니다. 그래서 후회의 눈물도 흘려봅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면 다시 그 자리입니다. 얼마 지나면 그 자리에 다시 와 있습니다. 은혜 받으면 뭐가 바뀐 것 같습니다. 새로워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식으면 내가 언제 그랬는가 합니다. 그렇게 하기를 수없이 반복해오다 보니/ 이제 자신에게 별 기대를 갖지 않습니다. ‘해보니까 나는 안 되더라.’ ‘또 그렇게 될 텐데 뭘.’ ‘내가 한 두번 해본 게 아니다.’ 미리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건 포기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질 수 있는 존재임을 아십니다. 단번에 세워지지 못하는 연약성을 지니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잠언 24장 16절을 보세요.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넘어졌으면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다시 일어나지 않으면 망한다는 말입니다. 계속하여 넘어져 있으면 망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망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망하기를 바라신 것은 아닙니다. 망할 것을 작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망할 것을 예고하신 겁니다. 예고를 듣고 돌이키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예고를 무시하고/ 계속하여 회개치 않으면 망하게 됩니다. 끝까지 예고를 무시하고/ 회개를 거부하면 망하는 길 외에 없습니다. 성경은 회개 후에 회복이 있음을 말합니다. 역대하 7장 14절을 보세요.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죄를 사하시고/ 땅을 고쳐주시는 조건으로/ 회개하는 걸 제시하셨습니다. 회개만 하면/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시겠다는/ 약속 아닙니까? 회개와 부흥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약 50여년 전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 콩고의 웸바라는 마을에/ 주목할 만한 부흥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한 마을 전체가/ 다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집단적인 회심의 사건이/ 선교사들의 눈물겨운 사역의 결과가 아니고/ 힘들여 가르친 성경공부 때문도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부흥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두 여인과 한 남자 성도의/ 진실한 회개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저들이 모여 기도할 때/ 두 여인의 마음에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했습니다. 그 결과 성령의 빛이/ 자기들의 삶에 강하게 비쳐짐을 인하여/ 공개적으로 회개하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한 여인은 교회에서 제일 많이 봉사하는 분이었는데/ 교회의 성미 한 자루를 남 몰래 갖다 쓴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서/ 쌀 한 자루를 교회에 가지고 와서/ 회중들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사실 이 쌀은 교회에서 쓰여져야 할 것인데/ 제가 갖다 썼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또 한 여인이 성도들 앞에 나서며 회개했습니다. “저는 남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인 집 계란 한 줄을/ 주인에게 말하지 않고 가져온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회개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 남자 교인이 회개했습니다. “나는 오래 전에 어떤 선교사의 집에 갔습니다. 돌아오면서 그 선교사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성경 한 권을 그냥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것을 다시 돌려드립니다. 나의 죄를 고백합니다.” 진실한 회개로 말미암아/ 웸바 마을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회개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을 보세요.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 것인가/ 회개치 않고 망할 것인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회개를 미루지 마세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입니다. 회개를 연기하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모험입니다. 예수님이 회개에 대해/ 그렇게 강도 높게 말씀하신 것은/ 절대로 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릇을 잘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 그릇에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차고 흘러 넘쳐/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복을 받게 되기를 바라신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