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적인 회개

복음적인 회개/마18:21-35

복음적인 회개
마18:21-35





\"하나님도 우리가 회개해야 용서해 주시는데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도 그가 회개해야 우리가 용서해 줄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 이런 말,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내가 용서해야겠지만, 그가 \"회개하노라\"하지 않는데 어찌 용서합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치고 가만히 있으면 영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합니다. 내가 용서할려고 해도 저 사람이 용서를 빌지 않으니,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죄가 생각나고 괘심하고 심장이 상합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오늘 본문과 대칭되는 눅 17:3-4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네 형제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얼마나 분명합니까? 철저히 회개할 때 용서해 주면 된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회개하거든\"이란 조건이 빠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70x7, 7도 완전수 10도 완전수 그것을 곱하고 곱했으니 용서의 참된 정신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마음의 어떤 상태이지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명백한 의미는 간단합니다. \"중단없이 용서하라. 언제나 네 형제에 대해서 친절하라\"는 것입니다. 얼핏보면 우리가 회개하기 때문에 죄가 용서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법적 회개라고 합시다. 법적으로 회개할 때 용서한다면 우리의 회개는 얼마나 철저해야 하겠습니까? 죄지을 때마다, 큰 죄에는 거기에 상응한 회개를 해야 한다면 우리는 이 회개의 중압감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나아가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왜 회개합니까? 회개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의 은혜를 확보해 놓으시고 실제로 우리에게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입장에 서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덮어쓰시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대신 회개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담보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법적인 회개를 하셨습니다. 죄의 대가를 당신의 죽으심으로 다 치루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를 대표해서 회개가 지향하는 목표인 영원한 복종까지 담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주님이 되십니다. 우리가 받을 저주를 그 몸에 받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우리의 불완전한 복종을 온전케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조건으로 해서 회개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회개합니다만 우리의 회개는 늘 불완전합니다. 우리는 실제 우리의 회개가 부족함을 회개한다고 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우리 대신 완전하게 회개하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히 12:2). 그러므로 우리가 부족해도 예수 앞에 나오면 주님께서 우리가 할 수 없는 회개를 친히 온전케 해 주십니다. 우리 죄를 향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예수님에게서 끝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큰 범과를 저질렀지만 그 아이는 그 죄의 심연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 아이의 회개란 다만 잘못했다는 사실 하나를 그 부모앞에서 인정한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이의 부모가 그 아이가 실수한 것을 다 변상해 줍니다. 찬 205장, \"예수 앞에 나오면\"을 부릅시다.

죄사함은 회복과 치유와 자유의 근거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무의미합니다. 왜요? 주 하나님은 죄인을 대적하시고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회개란 옷을 입은 믿음을 통하여 죄용서를 받는 순간 예수 새생명이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 생명은 의와 평화의 생명이요 우리에게 안정과 건강과 자유라는 소망을 안겨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네 죄를 사하노라\"하신 다음 건강을 주셨습니다(막 2:5-11).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며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안식이라고 가르쳤습니다(눅 6:6-10). 죄를 용서받은 사람만이, 새생명을 얻은 사람만이,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회개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 예수님의 회개를 믿었기 때문에 이런 복된 자리에 들어온 줄 아는 사람입니다.

복음으로 말하면 회개란 하나님의 은총을 믿고 그 은혜에 응답한데 지나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나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것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감사의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나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의 나를 위한, 나를 대신한, 나를 대표한 회개가 나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가 나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부추겼다면 우리는 우리 형제들이 회개하든, 하지 않든, 우리 쪽에서는 늘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용서할 때, 그들은 우리에게서 복음을 보고 은혜를 봅니다. 우리는 흔히 주께서 그때 나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늦게 깨달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회개같지도 않는 회개를 회개라고 봐 주시며,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눅 17:6)을 믿음이라고 간주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신 주님이 아니십니까?

우리는 미처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채 믿지 못할 때라도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일생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우리를 상대하십니다. 우리 중에 그 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지 아니한 사람이 있습니까? 다 죄의 길로 걸어간 전력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다시 품으신 주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아니하십니다. 기억도 하지 아니하십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형제들에 대해서 입도 벙긋해선 안됩니다. 하나님께 평생을 용서받고 죄 가리움을 받은 우리는 그 누구라도 전과자를 만들어선 안됩니다. 세례를 받고 입교하신 여러분, 세례의 제1상징은 우리가 죄 씻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은혜는 여기에 기초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도 잘 모르는 원죄와 자범죄의 모든 죄에서 씻음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요 여러분이 세례받을 때 가진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죄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또는 그것을 믿기 때문에 죄를 깨달을 때마다 회개합니다. 예수께서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복음을 믿는 우리는 복음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잘못하는 모든 사람을 한없이 용서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한없이 받아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끝없이 우리에게 잘못하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들을 볼 때 하나님께 잘못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동시에 우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할려고 할 때 당하는 고통을 통하여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용서를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ex-nihilo, 무가 되는 경험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찬상에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고전 11:24, 25).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몸 찢고 피 쏟아 죽으심으로 ex-nihilo의 절정을 경험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을 힘입어 형제들을 용서할 때 우리도 무가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나는 없습니다. 나는 내 판단, 내 원한의 죽음을 선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베푸는 자, 용서를 베푸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ex-nihilo의 과정에 포함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당신의 용서의 복음을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개인에게 적용시키십니다.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행위입니다. 성령을 힘입어 형제를 용서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오늘도 교회를 통하여 계속됩니다. 죄와 사망에서 살아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이 세상에서, 동료신자 가운데서 실천해야 합니다. 용서의 복음은 내가 용서할 때 또는 내가 용서받을 때 능력있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비유로써 세상에 살아가는 신자는 용서를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없이 천국복음은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배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법적인 용서를 따지는 자가 된다면 긍휼없는 심판이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이유없이 용서해주고 그 용서는 예수의 은혜 때문에 베풀어진다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에게 나를 용서하라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회개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중요시 하십니다. 죄사함 없이는 의로움도 치료도 평화도 없습니다. 죄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동시에 죄와 사망에서 살아난 새생명의 삶을 강조하십니다. 새 생명의 삶은 화해의 삶이요 화목의 삶입니다. 용서가 길을 연다면 화목은 그 길로 통행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다리가 놓였어도 왕래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용서받은 우리는 화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 화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하고 기도하듯이 우리는 서로 문안하고 선물이 오가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조용석 선교사의 감사). 우리는 용서하고 용서를 구할 뿐 아니라 화목하고 화목을 구하는 삶(고후 5:18-19)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역사는 우리가 성령을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동료신자 사이에, 또는 세상 사람 가운데서 용서를 실천하며 살 때 오늘도 계속 됩니다.

옛말에 인수지우 책인칙명(人雖至愚 責人則明)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우둔해도 남을 책망할 때에는 똑똑해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도 남을 책망하기에 바쁩니다. 남을 책망하는 지혜는 나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병원을 책망하기는 쉽지만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복음병원은 복음 때문에 회개할 줄 알아야 하고 교회는 복음 때문에 용서하고 축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음병원을 용서합니다. 축복하여 주소서. 영민한 지도자를 보내주시고 최소한 30년의 태평성대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인하여 살았기에 회개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용서합니다. 그리하여 화목을 성취합니다. 한 마디로, 복음적인 회개는 회개와 용서와 화목의 싸이클을 그립니다. 성령의 싸이클링, 은혜의 순환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구원이 임합니다.

욥 22:21-30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 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을 인하여 그런 자가 건지심을 입으리라\" 하나님의 언약에는 여러 가지 약속이 포함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면 평안이 임합니다. 복이 임합니다. 다시 흥합니다. 300명, 600명, 900명의 영혼이 밀려옵니다. 기도가 응답됩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경영이 이루어지고 길에 빛이 비췹니다. 먼저 믿음과 부흥의 빛이 비취고 다음에 건강과 경제의 빛, 기적과 형통의 빛이 비취는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