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의 역사 마3:1-7
침례요한을 아시지요. 장로교에서는 ‘세례요한’이라고도 합니다만은 침례와 세례의 의식 차이로 요한을 부르는 호칭 또한 다르게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침례요한이 엄청난 능력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도전과 회개의 역사를 이루고 침례를 통한 정결의 사상을 심어주었는데도 그 분의 사역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사역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침례요한은 자기는 쇠하여야겠고 예수님은 흥하셔야겠다고 말하였고 또한 자기는 예수님의 신들메를 들기에도 부족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침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지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이 한 마디가 침례요한의 사명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런지 침례요한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침례요한의 사역은 대단한 사역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침례를 받게 함으로서 정결한 삶을 강조했지요. 얼마나 종교지도자들과 기득권 세력들과 정치인들의 위협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헤롯왕은 동생 헤롯빌립의 처였던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안 침례요한이 이런 행위가 옳지 않다고 강력히 경고했습니다. 이로 인해 헤로디아가 자기 딸을 시켜 헤롯왕의 생일잔치 때 춤을 추게 하여 왕을 기쁘게 한 것으로 인해 왕이 헤로디아 딸에게 소원을 묻습니다. 그 소원이 바로 요한의 목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 20절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 도 달게 들음이러라’ 요한이 헤롯왕에게 ‘당신의 행위가 옳지 않습니다.’ 하는 이 말을 달게 들었다고 했습니다. 왜 입니까?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기에 헤롯도 두려워했습니다. 모세가 거룩한 몸을 입고 하나님의 광체를 받고 나올 때 백성들이 두려워했습니다. 요한은 왕까지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그는 정결했으며 거룩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결국 요한에게서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죄인들을 두렵게 합니다. 이 능력이 요한에게 있었다는 말이지요. 26절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여기서 헤롯왕의 고민을 읽을 수 있습니다. 왜 입니까? 거룩한 것이 헤롯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에게 해당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침례요한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요한을 통해서 도전을 받고 회개하고 하나님말씀으로 돌아오고 수많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고민할 수밖에 없지요. 물론 침례요한의 목이 한낱 술판의 안주거리밖에 되지 못한 것 같지만 요한이 얼마나 백성들에게 영향력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면 침례요한의 능력은 어디서 나왔고 그 담대함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침례요한이 살던 곳은 광야입니다. 마가복음 1장2절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배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게하라 기록된 것같이 침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의 광야의 생활을 잘 말해주는 쿰란 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1947-56년 사이에 발견된 사해사본을 말합니다. 그것은 사해지역 쿰란의 11개 굴속에서 사본이 발견되었지요. 목동이 양을 치고 있는데 양 한 마리가 길을 잃어서 그 양을 찾다가 굴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본 중에서 그 당시 광야생활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쿰란 공통체입니다. 그 당시 광야에서는 크게 엣세네파 공동체와 쿰란공동체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들의 삶이나 종교행사는 비슷합니다. 물론 차이점이 있기는 합니다. 엣세네파는 결혼을 하지 않고 금기생활을 하고 쿰란공동체는 결혼을 합니다. 엣세네파는 노예제도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반면 쿰란공동체는 노예제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든 것으로 보입니다. 엣세네파는 부에 현혹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했지만 그리고 철저히 공동체생활을 했지만 쿰란공동체는 개인 소유를 인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엣세네파는 맹세하는 일이 그의 없었고 쿰란공동체는 매년 맹세가 있었습니다. 이 정도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두 공동체의 중요한 부분은 굉장히 유사합니다. 유대주의에서 분리된 집단이며, 훈련규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회원의 생활은 감독자의 책임 하에 있었고 소유를 공동으로 관리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정결의식을 행했으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율법을 엄격히 해석했으며 높은 수준의 의를 추구 했습니다 만은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씻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정결의식은 물로 계속해서 씻어내었다는 점입니다. 마가복음에서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그랬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쿰란공동체나 에세네공동체처럼 요한이 공동체생활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날 때부터 성령 충만한 사람 이였을 뿐만 아니라 늘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요한의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찾아왔고 제자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며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보자마자 ‘자기는 쇠하여야겠고 예수님은 흥하셔야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시각과 성령에 충만하지 않으면 그렇게 볼 수도 없고 그렇게 고백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람입니다. 옥에 갇혀서 제자들이 찾아와 선생님은 이렇게 감옥에서 고생을 하시는데 예수님은 모른 체 하고 정말 우리가 기다리든 메시야가 맞습니까? 라는 질문을 할 때 요한이 그러면 너희들이 예수께 가서 직접한번 물어봐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한이 그렇게 한 이유는 믿음 없는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기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다른 학설에는 요한도 의심이 들어서 제자들을 보낸다라는 주장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주장을 신뢰하지는 않습니다만은 중요한 것은 요한도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자기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보고 자기는 신들메를 들기에도 부족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그런 차원에서 보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고백입니다.
침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선포에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며 침례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말씀으로 돌아왔고 죄에서 벗어나 거룩함의 삶을 추구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요한의 말씀이 그렇게 능력이 있었든 것은 헤롯왕까지 두려워 떨 정도의 위력은 그가 정결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그가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았던가를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그 당시 그의 외침은 한마디로 종교개혁입니다. 유대교의 악습과 죄악 된 세상에서 만연된 형식들을 완전히 뒤집어엎은 일대 전환의 외침 이였습니다. 요한의 회개의 외침은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강력하게 지적함으로서 예수그리스도가 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에서 포로 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돌아가셔야할 예수리스도가 오셔야합니다. 이 선포는 종교개혁입니다. 종교혁신입니다.
딤후 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금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 하며 경건한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말씀을 한 마디로 압축해서 말한다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입니다.’ 보세요. 아담과 화와가 죄 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삶이 깨졌고 가정이 깨졌고 부부관계가 깨진 것이요. 자식 간의 교제도 깨졌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인이 아벨을 처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정의 문제, 부부간의 문제, 경제적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원천적으로 뿌리를 찾아보면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죄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돌아 설 때 회복된다는 것이지요. 죄 문제만 해결하면 회복됩니다.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구원도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도 회복되고 경제적인 면 육신적인 면 인간관계 모든 것이 회복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의 외침은 이런 외침입니다. 회개해야 천국을 볼 수 있고 천국의 삶을 맛볼 수 있고 회개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의 외침은 요한의 광야 삶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6 ‘요한은 약대 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경건한 삶입니다. 거룩한 삶에 있습니다. 요한은 날마다 정결의식을 행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의 능력은 죄 씻음과 회개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회개하라고 외칠 때마다 유대인들의 가슴을 쥐어짜는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이 오시기전에 종교개혁부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침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종교외식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천국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외침으로 유대인들의 종교를 개혁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요한의 말씀에 권위적이고 배타적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꼼짝도 못했습니다. 침례요한의 능력입니다.
요나서를 보면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지 않고 자기마음대로 행동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니느웨성이 범죄하였으니 그들에게 가서 회개를 외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곳은 사실 죄의 도성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나는 민족적인 감정이 있는 니느웨성에 가지 않고 친근감이 있고 온유한 도시인 다시스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스로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죠. 큰 풍랑이 일고 파선될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선장과 더불어 배에 탄 사람들이 이런 재앙이 누구로 인해 나타난 것인지 제비를 뽑아 알아보자 해서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걸렸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무슨 일로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인지 고하라고 합니다. 그때 요나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다 고하고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무리들이 볼 때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요나를 바다에 던집니다. 그리고 난 후 바다가 잠잠하게 되지요. 요나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큰 물고기에 배속 안에서 3일을 지냅니다. 이 요나서 2장을 보면 요나가 고기배속에서 회개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2장 4절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해도 다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회개기도입니다. 그가 큰 물고기 배속에서 철저한 회개기도와 사명회복이 얼마나 큰 능력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3장3절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곤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니느웨성은 3일 길인데 요나가 하룻길을 외친 것입니다. 요나의 말에 무게가 얼마나 있었으면 요나가 하루 동안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선포가 니느웨성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얼마나 말에 능력이 있었으면 왕부터 시작해서 짐승들까지 금식을 시켰겠습니까? 요나가 불순종을 회개하고 그 회개의 능력이 니느웨성을 살리는 능력이 된 것입니다. 또 니느웨성 사람들이 철저히 금식하며 회개하니까 나라가 멸망을 당하지 않고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의 삶은 철저히 회개하는 삶이였습니다. 바울사도가 가는 곳 마다 은혜가 있고 기적이 있고 축복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고난이 있고 감옥이 있고 매를 맞고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가면 갈수록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음사역의 범위가 크질 뿐만 아니라 능력 면에서도 가면 갈수록 많은 사역을 감당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죄문제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죄문제에 대해서 로마서 7장 14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렷도다’ 15절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9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라’ 빌립보서 3장 8절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의 내가 괴수니라’ 사도바울이 사역을 하면서 점점 강하게 느끼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여러분 죄가 크게 보이면 은혜가 크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바울을 사역을 하면할수록 자기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발견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죄인의 괴수지만 이 죄를 담당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지 안어셨다면 죄인의 괴수였고 심판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인데 이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신 은혜야 말로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은혜라는 사실을 바울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회개의 삶을 살았고 그 회개의 삶을 통해 선교의 현장에서 질병이 치유되고 상한 심령이 치유되고 귀신이 물러가고 구원 받은 자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지 철저히 회개하는 시대와 나라는 부강했습니다. 사사기를 보십시오. 그들이 이방나라에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사사를 먼저 세우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철저히 회개하니까 사사를 보내지 않습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철저히 회개하니까 복을 주었습니다. 나라가 회복되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죄를 짓고는 절대로 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는 것을 성경 역사를 통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든 문제와 어려움과 난관과 질병은 회개로부터 이겨나가야 됩니다. 회개하면 철저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면 자연히 에덴을 회복됩니다. 물질도 회복되고 자녀관계도, 사업도, 가정도, 질병도, 인간관계도 특히 내면의 상처도 모두 회복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길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능력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도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능력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화평이 되고 감사가 되고 복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하면 마틴 루터나 켈빈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물론 이들이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된 것을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 오직 성서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이라는 사고가 확산된 것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널리 분포되었고 마틴 루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교리적 배경은 회개 없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교리 때문 이였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구원에 이르는 길은 성사에 있다고 하고 특히 회개의 성사가 인간을 속죄로 인도하는 출발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속죄가 선행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을 쉽게 하기위하여 면죄부를 고안하게 이르렀던 것입니다. 1515년 교황 레오 10세는 로마 성 베드로성당 건축을 위하여 면죄부를 고시하고 독일에서 면죄부의 판매를 허락한 것입니다. 면죄부는 (상자 속으로 던져 넣은 돈이 짤랑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구원을 받는다)고 선전되어 마구 팔리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사람들이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모든 벌과 죄책으로부터 해방되며 확실히 구원된다고 믿는 사실에 종교적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금전에 의한 면죄부의 구입이라는 이 행위는 ‘회개’라는 성도의 기본적 행위가 완전히 무시되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95개조 논제) 1517년 발표된 것에 의하면 로마에 의한 독일의 재정적 착취를 문제 삼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신앙원리를 제시하였습니다. 루터는 이 논제의 제 1조에서 그리스도가 (믿는 자는 일평생 회개하기를 원하였다)고 말하고 제 36조에서 (진실한 회개가 벌과 죄책으로부터의 완전한 사면)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종교개혁은 기본 교리를 지키는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 없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제 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 개혁이 우리교회로부터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우리교회가 회개 운동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회개운동이 일어날 때 우리교회가 지역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침례요한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침으로서 예수그리스도가 사역하기 전에 이스라엘백성들의 행위와 죄에서부터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회개는 나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회개가 있을 때 복음이 역사를 합니다. 회개가 있을 때 말씀이 살아서 역사한단 말입니다. 회개가 있을 때 영적감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회개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회개가 있을 때 평화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모든 것의 회복입니다. 모든 문제의 회복입니다. 모든 어려움과 고통의 회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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