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에 합당한 열매


회개에 합당한 열매
눅3:7-14





서론

한 50년 전 아프리카 콩고의 웸바라는 마을에 주목할 만한 부흥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 마을 전체가 다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선교사들의 눈물겨운 사역의 결과가 아니고 성경공부 때문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 놀라운 부흥은 두 여인과 한 남자 성도의 진실한 회개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저들이 모여 기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뜨겁게 기도하는 가운데 두 여인의 마음에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했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자기들의 삶을 조명함에 따라 회심을 했습니다. 그 중 한 여인은 이 교회에서 제일 많이 봉사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성미 한 자루를 갖다 쓴 것이 마음에 걸려 그것을 교회에 가지고 와서 \"사실 이 쌀은 교회에서 쓰여져야 할 것인데 제가 갖다 썼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한 여인이 성도들 앞에 나서며 \"저는 남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인 집 계란 한 줄을 주인에게 말하지 않고 가져온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회개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어떤 남자 한 분이 \"저는 서점을 하고 있는 사장입니다. 오래 전에 선교사와 교제하면서 선교사의 집에 갔습니다. 돌아오면서 선교사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성경 한 권을 그냥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것을 다시 돌려드리며 회개하기 원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진실한 고백 때문에 웸바 마을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문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회개의 침례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요한의 설교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는 심판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니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하는 교만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들을 침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비난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어둠과 사망의 세력, 곧 사탄의 수하에 있는 사탄의 자녀들이란 것으로서 유대인들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말입니다. 메시야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본론

그러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임박한 심판에 직면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말씀을 바로 듣는 태도에서 시작합니다.(10, 12, 14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말씀을 바로 듣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회개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말씀을 올바로 듣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르게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회개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회개했다면 말씀을 바르게 듣습니다. 요한이 전하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공통된 반응이 무엇입니까? 10절, 12절, 14절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문구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What shall we do?) 말씀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 것을 결단하는 태도입니다.

먼저 바르게 듣기 위해서는 잘못된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8절)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는 것은 요한의 설교를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다 안다는 뜻입니다. 예배와 설교를 형식과 습관으로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나쁜 경우는 그 말은 나와 같은 경건한 사람에게는 맞지 않고, 다른 사람이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된 태도로 듣게 되었을까요? 7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들이 침례를 받는 이유는 장차 올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침례를 받는 이유는 진노와 심판을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3절에서 요한이 전하는 침례는 바로 죄 사하는 회개의 침례라고 했습니다. 침례를 받는 이유는 자신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모습으로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없기 때문에 회개하고, 회개의 징표로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회개하게 될까요? 우리 같이 악한 죄인들이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깨닫게 되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니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길손의 외투를 벗기자는 바람과 태양의 내기에서 누가 이겼습니까? 따뜻한 햇빛이 그의 무거운 죄의 짐을 벗게 합니다. 차가운 바람과 눈보라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더 옷을 여미게 됩니다.

하나님이 오신 이유는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서이겠습니까? 사랑과 용서를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집 밖에서 떠나간 아들을 하루 종일 기다리는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책망하기 위해 서 있는 겁니까? 아니지요. 아들을 용서했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더러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책망하고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이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피와 같이 붉은 죄라 할지라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이들이 침례를 받는 것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임박한 진노와 심판을 잠시 피해보자는 심보인 것입니다. 한편으로 \'나는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하는 교만과, 다른 한편으로 \'그래도 혹 모르니 받아두자\'는 얄팍한 생각인 것입니다. 요한은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 말합니다. 그런 생각을 버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입니다.(8절)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바르게 듣는 것은 어떤 태도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 무리와 세리, 군인들이 요한의 말씀을 듣고 나타낸 공통된 반응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이 말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말의 뜻은 구원을 갈망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어떤 관원이라고 나오는 부자 청년은 구원과 영생을 갈망하고 예수님께 다가와서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마음이 찔려 \"우리가 어찌 할꼬?\" 합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은 반드시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다\'라는 마음은 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자세는 구원과 은혜를 갈망하는 태도입니다. 마치 목마른 사슴처럼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자세입니다.

야고보의 말씀처럼 말씀을 듣는 바른 태도는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때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서는 곧바로 순종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말씀을 들어야 열매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세상 속에서 나타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말씀을 바로 듣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면, 회개의 열매는 어디서 맺어야 할까요? 요한에게 나아온 사람들의 특징은 불의한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상황에서 세리와 군인이라는 직업은 같은 민족에게 나쁜 짓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직업입니다. 여기서 군인은 로마군인이 아니라 지역 수비대로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로마가 자신들에게 부여한 권한 이상으로 동족을 괴롭히던 사람들입니다. 세리들은 부당한 세금을 과다하게 거두었고, 군인들은 불의한 폭력과 권력으로 군림하고 돈을 갈취했습니다. 그래서 민족에게서 왕따를 당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소외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동포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한은 이들에게 그런 직업을 그만 두라고 권면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만, 주일을 지킬 수 없다고 직장을 옮기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또 신학교에 가겠다고 합니다. E-Land의 박성수 사장 얘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사장에게 부사장이 어느 날 찾아와서 신학교를 가야겠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때 부사장에게 물었답니다. \"부사장님, 회의 시간까지 30분 정도 남아서 기도실에 가서 기도했는데, 기도하다보니 회의 시간을 훌쩍 넘긴 적이 있습니까? 성경 읽어야지 하다가 중요한 업무를 놓친 적 있습니까?\" 부사장의 대답은 한결같이 \'아니요\'였습니다. 그때 박성수 사장은 부사장에게 \"부사장님, 저와 함께 일합시다.\"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전에 부목사로 사역하던 교회에 이시훈이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 청년이 현대백화점에 취업을 했습니다. 백화점의 성격상 주일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리 그 청년에게 말해 두었습니다. \'주일 성수를 할 수 없어서 직장을 바꾼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마라. 여기서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기도원으로, 교회나 신학교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예수님의 기도는 그들이 세상에서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5-19)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이 필요한 곳은 부패한 세상입니다. 빛이 요구되는 곳은 어두운 세상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면, 바로 부패하고 어두운 세상의 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부패가 방지되고, 어둠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소금으로 계속 남아 있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소금과 빛은 자신이 사라지고 없어질 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등불을 켜서 책상 밑에 두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길 수 없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마5:14-16, 표준새번역)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일, 곧 직장인은 직장에서, 전업주부는 가정에서, 학생들은 캠퍼스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므로 도피하는 성도가 되지 맙시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됩시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편지가 됩시다. 부패하고 어두운 세상 한 가운데 소금과 빛이 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물질과 경제 생활에 가장 잘 나타난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은 말씀을 듣는데서 시작하고, 삶의 현장에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가는 마태(3:8)와 달리 열매\'들\'이라고 복수를 사용합니다. 아주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회개의 열매들은 어떤 것일까요?

저는 요한에게 나왔던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전한 요한의 각각의 메시지를 살펴보는 것 대신에 그들에게 요한이 공통적으로 외쳤던 것이 무엇인지를 여러분께 전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세 부류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원칙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내적으로는 자족하는 것이고, 외적으로는 나누는 것입니다. 만족해야 나눌 수 있습니다. 나누는 마음을 가지려면 먼저 있는 것으로 족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만족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족하는 사람들은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푸는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진 자들보다 서민들이 더 사랑하며 도탑게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더 쉽게 나누게 됩니다. 더 만족합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흔히들 사람들은 13절 말씀을 많이 오해합니다. 그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Can Do 정신을 외치는데, 그것은 세속적인 마인드이지 올바른 성경적 자세가 아니며, 바른 성경 해석이 아닙니다. 빌립보서의 문맥 속에서 이 말씀은 가난이나 부유함이나 어떠한 상태에서도 하나님 은혜로 인해 자족하고 만족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가난해도 내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부유할 수 있고, 부자가 되어도 내 삶을 주관하시는 그리스도로 인해 가난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그 어디나 천국이듯이, 예수님 계신 내 마음과 삶은 풍요롭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나누어야 합니다.
11절에 나오는 옷 두벌은 많은 옷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라는 단어는 풍족한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먹는 보통 음식을 말합니다. 한 벌을 주고 나면 단 한 벌로 살아야 합니다. 남에게 먹을 음식을 나누어주기 위해서는 내가 먹을 것을 줄여서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내가 사용하고 남은 것을 나누는 것은 \'동정\'이고, \'연민\'입니다. 그러나 내게도 꼭 필요하지만, 더 필요한 자에게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일부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온 존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남김없이 다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앞으로 구제와 선교를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우리 것이라고 하지말고 가난한 자들과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어 가는 영혼들에게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왜 이런 사랑의 실천과 구제의 삶을 사게 됩니까? 회개에 합당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했으니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의무감이 아닙니다. 나 같은 죄인이라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격해서 내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자신의 것을 나누고 베푼 사람이 바로 여리고의 세리장인 삭개오입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고 이해해 준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베풀고 나누어주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깊은 내면 속에서 물질 중심적 삶에서 예수님 중심의 삶으로 돌아서고 보니 물질에 연연해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내가 죄사함을 받은 자라는 인식이 우리로 하여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내 죄를 사해 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고 날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자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나를 용서해 주시고 사랑하시며 나의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