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과 회개 마26:69-75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자 가야바의 바깥뜰까지 따라 들어 왔으나 예수와 한패요 그 지역의 사람의 언어를 쓰는 것을 보니 예수와 같은 패가 분명하다고 하니까 겁을 먹고 자신의 신변안전만을 위해 예수님을 배신하며 3번이나 부인한다. 자기가 장담한 말과 일에 대해 인간이라면 잘못을 저지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른 자에 대한 상대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더 잘못 될 수도 있고, 오히려 더 나아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못한 이들에 대한 우리의 분별 없는 행동을 반성케 해준다. 어네스트 쉐클톤 경이 북극 탐험 중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밤 그와 그 동료들은 마지막 양식인 비스켓을 나누어 가지고 각기 잠자리에 들어갔다. 그런데 쉐클톤 경은 옆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동료들 중 한 사람이 주위를 살펴보고는 옆 사람의 가방을 열고 비스켓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 순간 쉐클톤은 긴장을 느꼈는데 그 비스켓 하나에 한 사람의 생사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방금 도적질 하려던 사람은 자신의 가방을 열고 자기 비스켓을 꺼내서 친구의 가방에 넣어주고, 훔쳤던 비스켓도 다시 넣어 주고 있는 즉각적인 회개의 장면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고 탐험 항해를 안심하고 계속 갈 수 있었다고 한다.
1. 비자의 지적에 무너지는 베드로를 볼 수 있다. 자신에게 고난과 고통이 닥칠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에게 닥칠 고난에 대해 확실히 알고 계셨으면서도 자진하여 감수하셨다. 우리도 고난을 경험한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은 우리의 행위의 대가로 주어지거나 행위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대다수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은 인류를 위한 자신의 희생이었다. 그는 오로지 이러한 희생을 실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육체적 고난 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과 인격적인 수모를 많이 받으셨다. 그 가운데서 하나가 바로 믿었던 제자들의 배신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된 제자들의 변함없는 충성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26:31)고 말씀하셨다. 이 예언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실현되었다. 인류를 위해 무고한 고난을 받으시는 주님은 그의 마지막 길을 홀로 외롭게 걸어 가셨다. 진리를 좇아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 있다. 세상이 그의 높은 뜻을 알아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제자요 예수님을 끝까지 보호하여 위험과 억울함을 당할 때 막아 드리겠다던 제자인 베드로에게 부인당하고 배신당할 때의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허망하고 쓰리며 아프셨겠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체포될 때 겁에 질려 달아났다가 일의 결국을 보기위해 멀찍이 따라 들어와 바깥뜰에 앉아 하속들 속에 슬그머니 끼어 앉아 어울려 있었다. 거기는 베드로가 끼어 앉아들 곳이 아니었다. 이러한 그의 처세와 자세는 신앙생활에 소극적이며 비겁한 기독인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그런 기독교인은 말로는 큰소리치고, 약속과 맹세는 잘하나, 실제로는 언제나 어중간한 곳에 머물러 앉아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전혀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온전한 용기가 없는 상태다. 전혀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온전히 믿음이 익어가지 못한 상태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고 했다. 여종 비자 앞에선 베드로의 심적 상태는 교회에는 따라오나 신앙 중심에는 멀찍이 서 있으며 여전히 세상의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자이다. 베드로의 굳센 맹세와 간신히 내어 보았던 용기는 비자의 지적 한마디에 간단히 무너져 버렸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하는 비자의 지적에 베드로는 그만 혼비백산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주를 부인하였던 것이다. 만약 그 때 예수님께서 속세의 영광과 권력의 자리에 앉아 계셨더라면 베드로의 대답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평소에 자기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강조함은 물론이고 자기의 맹세를 무슨 공적처럼 자랑했을 것이다. 인간이란 이처럼 참으로 약한 존재요, 깨어지며 간사한 존재이다. 참된 기독교인이 되고자 한다면 섣부른 맹세보다는 은혜를 구하며 의리를 구하며 충성 다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2. 베드로의 배신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예수 부인이 충격적인 것은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라는 데 기인한다. 또한 그는 이미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한 바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만 모든 사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해 버렸다. 예수님께로부터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 받고, 예수님께 “그리스도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고백하여 예수께로 축복을 받은 베드로 그 베드로가 한 여종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오”했다. 성도가 직분자가 그것도 중직을 받은 종들이 종종 그러한 상황과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수없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핍박에 굴할 수도 있고,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고, 신변의 위험과 체면유지를 위해 굴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를 저버리고 믿음을 부인해 버릴 수도 있다. 베드로는 끝내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하고자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철저하게 배신했다. “한번의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열 번의 거짓말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반대로 한번의 회개는 열 번의 거짓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수제자요, 선임제자인 베드로가 이 지경에 빠지게 된 것은 그가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원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정치적으로, 군사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잡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시려는 예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해서 베드로는 자신에게 닥쳐올지도 모르는 신변의 위험과 고난에 그렇게 연약하고 비겁하였던 것이다. 하늘나라를 알지 못하는 육적인 신앙의 사람들, 부활의 그날을 알지 못하는 땅의 것으로만 살려는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항상 베드로와 같은 연약함에 노출 될 수 있다. 인간은 관계로 맺어진 사회적 동물이다. 그 관계에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인간과 인간관계의 수평적 관계가 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는 종교적 관계, 신앙적 관계로서 이 관계를 통하여 인간은 무한한 안식과 꿈과 소망을 누리게 된다.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가정과 사회, 교회와 성도, 국가의 구성원으로 의무와 책임과 예의를 다하며 보람과 긍지와 가치를 느끼며 살아가게 된다. 배신은 바로 이러한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단절은 인간에게 절망을 가져다주며 멸망에 이르게 한다. 그 절망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던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고 만다.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 하나님을 무시한 인간은 모든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이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관계의 배신인 수평적 관계가 단절되면 고독을 가져온다. 고독은 패배주의의 산물이며, 허무의 동반자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심각한 반역행위인 자살은 바로 고독과 허무와 패배주의가 그 원인인 것이다. 배신은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비신앙적, 비인간적인 사탄의 행위요 그가 사용하는 살인적인 저주의 무기인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의 배신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를 분명히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베드로의 통곡의 회개는 무엇입니까? 本文 74-75절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하셨다. 스승을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자신의 안위 만를 먼저 챙겼던 베드로는 자신의 비굴한 행위를 생각하며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하였다. 회개는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인 요소요,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회개의 문을 통과하지 아니하고는 용서받지 못하며, 회개의 문을 통과하지 아니하고는 축복을 받을 수 없으며, 회개의 문을 통과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의 단절이 회복될 수 없으며, 회개의 문을 통과하지 아니하고는 천국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요, 크나큰 축복이다. 닭 울음소리는 새벽을 알려준다. 그것은 새로운 날이 밝아 옴을 알려준다. 그것은 새로운 영적 시대가 열리는 것을 알려준다. 베드로는 여전히 과거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전히 자기중심의 신앙에서 맴돌고 있으며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의 강한 믿음과 행동이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겸손함과 온전한 의탁이다. 그것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다. 닭 울음소리는 배신한 베드로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있다.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와 함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한 주님의 말씀이었다. 회개의 길, 생명의 길, 용서와 구원의 길, 능력과 사랑의 길은 말씀이 생각나야 한다. 베드로는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그렇게 되어진 환경을 보거나 그것을 핑계로 삼지 않았다. 베드로는 자기에게 예수와 함께 있었느냐고 묻고 있는 비자 소녀에게 원망을 뒤집어씌우지 않았다. 참된 회개는 오직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 그 말씀 앞에 꼬꾸라지는 것이다. 말씀 앞에 복종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여종의 지적에 자기 자신의 장담이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가운데서도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다. 아직도 주님의 말씀이 기억나지 않고 환경이 기억나고, 사람이 기억나는 것은 회개에 가까이 오지 못하고 있는 증거이다. 베드로처럼 우리 모두에게 자신에게 주신 적당한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며 회개하는 역사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열려지기를 축원합니다. 자기의 믿음을 과신할 때 누구라도 쉽게 교만에 빠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경험을 의지할 때 무너지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기의 믿음보다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의 말씀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베드로의 슬픔은 예수님의 사랑을 배신한 스스로에 대한 슬픔이다. 베드로는 배신의 길을 갔었으나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그 주님을 다시 한번 바라보면서 회개하였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먹은 행위에 대해 인간적인 의지로 후회는 하였으나(마27:3) 베드로처럼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따른 근본적인 회개가 없어 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철저하게 배신의 길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회개한 베드로는 영광된 사도로서 모든 本分을 다할 수 있었다. 주님은 자신 앞에 분명히 “사랑 한다”는 회개의 고백을 들어시고 전보다 더 위대하게 베드로를 사용하셨다. 이것이 회개한 자가 받는 축복이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자살이라는 것으로 책임회피 하는 비참한 생을 마쳤다. 후회는 머리로 하는 것이지만 회개는 가슴으로 하며 영혼으로 하며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 같은 작고 큰 배반과 배신에 나갔던 자들이다.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자들이었다. 주님주시는 말씀이 생각나서 회개하고 주님의 사랑 받으며 주님을 더욱 잘 섬기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사람과의 관계 회복이 이루어져 이제는 더 이상 마귀의 장난에 비겁하게 굴복치 않고 사명의 길을 끝까지 다하며 걸어가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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