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지.이만희정체[인터넷신문]

700명 중 550명 신천지에 탈취 당한 교회가 주는 교훈 / 이랜드의 노동착취 박성수 회장에게 성경가르친 옥한흠 목사가 나서야 한다
2008-04-17 07:53:27   read : 3385






















▲신천지 행사 내부 모습. 이만희 씨가 손을 들어 성도들에게 인사하고 있다.©뉴스미션

한 교회는 한 때 700명의 성도를 자랑하는 중형 교회였습니다. 건강하게 자라며 지역을 섬기고 있던 교회는 최근에 엄청난 시련을 당하였습니다. 550명의 성도들이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신처지의 소행이었습니다. 신천지인들이 교회에 들어와 잠행하였다가 끊임없이 목사를 모함하였고 급기야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 교회를 비롯해서 많은 교회가 이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신천지의 치밀한 두 가지 전략이 주요하였던 것입니다.

우선 교회가 정직하지 못하고 투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목사와 당회의 정직하지 못함과 투명하지 못함이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당회와 목사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행사 진행과 재정 집행에 있어서 가장 민주적이어야 할 교회가 비민주적인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이것이 신천지의 일차적인 대상이 된 것입니다. 가장 정직하고 투명하여야 할 곳이 오히려 그렇지 못함으로 미혹의 영들에게 사로잡히고 만 것입니다.

또한 참된 교회의 표징인 바른 말씀이 선포되지 않고 신앙고백과 교리 교육이 전무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모더니즘의 이성주의는 무너졌지만 이제 더 무서운 것은 보편적 진리는 없다고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가 무섭게 번지고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과 교리는 목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해 왔습니다. 오직 기도와 성경만 있으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신학은 신학이고 목회는 목회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은 교파의 의미를 부정하게 만들었고 성도들로 하여금 아무 생각 없이 교파를 떠나 교회를 옮겨 다니게 했습니다.

교회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오직 교회 성장에만 목을 매달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를 가도 똑 같은 모습을 봅니다. 장로교나 감리교나 오순절교나 다른 것이 없습니다. 대부분 교회가 성장과 축복 그리고 영성을 추구합니다. 모든 교파의 교회 성장을 위한 핵심 프로그램이 같습니다. 두 날개와 알파 등 도저히 구분이 없습니다. 이러한 구분이 없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이단들의 서식을 도와 준 것입니다. 똑 같은 교회인데 이왕이면 바르게 가르치는 교회에 가야지 하는 속임수에 여지없이 무너지게 한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뢰아 교인들과 같은 모습을 좀처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만족과 평안을 가져다주고 축복을 빌어주면 입이 찢어지고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양심을 찌르는 소리를 하면 옆 교회로 도망갑니다. 그래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옆 동네 성도는 받지 않겠다고 주보 광고까지 하는 등 웃지 못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코미디 같은 일이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른 진리를 알지 못하고 교리에 대한 분별력이 없으므로 결국 미혹의 영들에게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어느 순간 우리도 밥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적 세계관과 진리에 대한 바른 분별력이 없으면 미혹의 영들에 의하여 씻지 못할 상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사실 미혹의 영들이 활성화 될 수 있는 토대를 교회가 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러한 모습을 최대한 이용하여 교회를 허무는 전략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전략은 다양하지만 가장 저주스러운 전략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 생활에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회와 찬양 집회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은혜롭게 행동합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헌금을 냄으로 인하여 교회 중심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합니다. 이것은 이미 교회가 중직을 세우기 위한 하나의 틀로서 사용하였던 방법입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회심의 모습과 성화의 과정과 성경의 기준과 무관하게 물질과 열심이 교회 중직자가 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결국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 온 것입니다. 미혹의 영은 이 사실을 역으로 이용하여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중직에 오른 뒤에 목사를 내쫓고 교회를 통째로 먹거나 교회는 무너뜨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더 무서운 전략이 있습니다. 그것은 설교를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행사와 물질의 봉사를 열심히 하되 결코 설교는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 되었습니다. 설교를 듣지 않기 위하여 설교 시간에 주보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딴 생각을 하거나 아니면 때때로 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 시간에 성경을 봄으로써 설교 듣는 것을 회피하라는 지침입니다. 설교를 듣게 되면 회심할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설교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들을 벌이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전략을 보면 미혹의 영들이 기성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관계없이 살고 있는 모습, 교리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여긴 교회와 목회자, 신학교조차도 신앙고백서는 가르치지 않고 오직 실천신학에만 몰두하고 있는 모습, 오직 성경과 기도만 있으면 된다는 체험주의 신앙과 찬양 일변도로 나가는 감성주의 신앙 등이 교회의 토대를 약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교회의 역사는 신앙고백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가르쳤던 역사입니다. 체험이 횡횡하고 무분별한 은사주의자들이 날 뛰고 있을 때, 성경을 넘어 교권이 권력으로 자리 잡히고 있을 때 하나님은 믿는 바의 도리가 무엇인가를 다시 세웠습니다. 마치 바울을 통하여 에베소 장로들에게 3년 동안 가르친 것을 기억하여 교회를 허무는 이리들을 경계하라고 하였던 것처럼 다시금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다나시우스 신경이었습니다. 또한 종교 개혁 이후에 나타난 아우구스 부르그신앙 고백서, 하이델 베르그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경, 벨직 신앙고백서, 웨스터 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ㆍ소요리문답 등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미혹의 영들이 활보하도록 허용하시는 것은 교회가 말씀의 자리에서 떠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만 참다운 회심이 있는 성도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배의 본질이 훼손당하고 있고, 설교의 권위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회복을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른 진리에로 교회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혼란을 잠재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길입니다.

특별히 세속화된 신앙 -긍정의 힘-에서 벗어나서 성경적 신앙에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돈 벌기에 앞장서서 옳지 않은 것과 그른 것을 함부로 양산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기독 서점에서 있을 만한 책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도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이 여전히 성공을 하는 한 우리는 미혹의 영들의 만찬이 될 것입니다.

힘들다고 쉬운 길로 가면 안 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회복할 때 비로소 십자가 뒤의 면류관을 기대 할 수 있습니다. 이 혼탁한 시대에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 과감하게 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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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인이 되려면 ‘자기발견’부터 하라



▲성공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해야 한다.©연합

성공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결코 타인에 의해서 끌려가거나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기며 살지 않는다. 사람의 인생은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남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모든 것의 관점이 오직 다른 사람이다. 잘되는 것과 잘못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만일 누군가 자신에게 작은 말이라도 자존심을 상하게 할 경우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낀다. 그러나 반대로 누군가로부터 좋은 말을 듣게 되면 지나칠 정도로 흥분한다. 이런 사람은 리더가 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다.

둘째는 모두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일보다 사람이 좋아 사람에 끌려 산다. 일하다가도 사람이 부르면 무조건 달려간다. 처음 보는 사람이든, 조금 아는 사람이든, 사람이 좋기에 사람을 따른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사람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없는 것이다.

셋째는 자신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스타일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남의 인생을 살거나 모든 사람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일을 위하여 산다. 일이 되는 것이 사람을 만나는 목적이고 일에 의하여 사람이 정해진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무조건 좋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요소인 정이나 사랑, 감정보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고, 곁에 있는 사람도 바치게 만들고, 모두가 바치도록 한다. 좋게 사는 인생보다는 무섭게 사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들이 대체로 듣는 말이 한결같다. “인정도 눈물도 없다.” “일 밖에 모른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보다 회사가 중요하다.” 이런 말들을 듣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이 느끼기에 그들은 타인을 위한 삶을 살지 않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업에 성공하든, 직장에서 성공하든, 제대로 된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산다. 결코 타인의 인생을 살지 않으며 타인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버리지 않는다.

이런 세 종류의 유형에서 좋은 유형과 나쁜 유형은 없다. 사람은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중요한 것이 있다. 남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든, 모두를 위한 인생을 살든, 또는 자신을 위한 인생이든 자신이 누구인가에 따라 자신의 생각, 관점, 시야가 달라지고 기준과 행동이 다르게 된다.

이것이 자기발견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누구도 볼 수 없는 자신이 보는 자신, 누구도 알 수 없는 자신이 아는 자신, 누구도 갈 수 없는 자신만이 가는 길을 아는 것, 그것은 자신을 찾은 사람의 인생이다.

자기 발견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는 ‘나는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과 의미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4:7) 바울은 자신을 ‘보물(보배)’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는 생각과 관점이 보물이다. 보물처럼 살기 때문에 보물의 인생이 된 것이 아니라 그는 이미 보물이다. 이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과 행복한 사람이 다른 이치와 같다. 적어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이 보물이면 보물로 사는 것이고 자신이 쓰레기이면 쓰레기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발견해야 성공한다. 무조건 성공을 목표로 뛰고 달리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먼저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공하는 사람은 자신을 찾은 사람이며 자신을 아는 사람이며 자신을 발견한 사람이다. 그는 타인이 보는 나에게서 자신을 찾지 않는다. 자신이 보는 자신을 찾을 뿐이다.

성공을 하려면 날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연습을 자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성공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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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의 노동법과 이랜드의 반(反)희년적 노동착취

박성수 회장에게 성경을 가르친 옥한흠 목사가 나서야 한다

본 기고문의 내용 및 논조나 주장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

2007년 말,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종로 5가에 있는 기독교회관 7층 NCCK 총무실을 평화적으로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그 며칠 전에 구속 수배 중인 이랜드 노조의 두 명의 노동자가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명동성당으로 가서 천막 농성에 들어가려 했지만 성당 측은 불허했다. 노동자들이 눈물로 호소했지만 성당 측은 완력으로 노동자들의 천막을 허물어 버렸다. 천막이 허물어지는 광경을 보며 대부분이 여성인 이랜드 노동자들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래서 여성 노동자들은 명동성당에서 쫓겨나 기독교회관을 찾은 것이다.

농성 다음날 기독교회관 앞에서 기독교 단체들이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개최한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그리고 며칠 후 기독교회관 앞에서 이랜드 노동자들과 함께 드리는 저녁 기도회에 참석했다. 마치고 나서 7층 농성장으로 올라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 20ㆍ30대에서 50ㆍ60대 사이의 여성이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기독교인도 있었다. 이 여성 노동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월 80만원씩 받았었다.” “이랜드 사측은 우리에게 손해배상 가압류를 1건에 1억 원씩 부과하였다.” 노동자들에게 참으로 두려운 것이 바로 손해배상 가압류이다. “이랜드 사측은 현재 교섭에 전혀 임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한국의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신해서 투쟁하고 있다.” “구속 수배 중인 노동자 두 사람은 명동성당 야외 성모상 앞에서 천막 없이 추위와 싸워가며 열흘 가까이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실내에서 농성하고 있어서 그들에게 미안하다.”

2008년 초, 사랑의교회 앞에서 천막 농성 중인 이랜드 노동자들을 방문하여 함께 기도를 드렸다. 필자를 포함해 방문자 두 사람과 농성 중인 이랜드 여성 노동자 두 사람, 이렇게 네 사람이 작은 기도회를 진행한 것이다. 여성 노동자 중 한 아주머니는 과거에 교회에 나갔지만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서 지금은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기도회 중에 그 아주머니가 눈물을 흘렸다.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함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한 맺힌 마음과 북받치는 감정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희년의 노동법과 이랜드의 반(反)희년적 노동착취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희년]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복음 4장 16~19절).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선언하시며, 메시야 사역의 핵심 중 하나는 희년(禧年)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희년은 구약성경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50년째 되는 해로서, 희년의 4대 경제법은 토지법, 주택법, 대부법, 노동법이다. 이 중 희년(禧年)의 노동법에 담긴 원칙들은 우리 시대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노예 노동 금지’이다. 동족 히브리인은 결코 노예로 부릴 수 없다(레위기 25:39,42).

둘째, ‘적극 고용’이다. 극빈자를 맞아들여 일자리를 주어야 한다(레위기 25:35). 이 성구에서 극빈자를 맞아들여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단순히 극빈자가 살 집을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품꾼으로 삼아 일감을 주어 일을 하게하고 그 정당한 품삯을 주어, 극빈자가 그 품삯을 저축하여 언젠가는 자기 기업 토지를 되찾아 독립하여 자영노동자가 될 수 있게 한다는 넓은 의미이다. 현대적 의미로는 실업자를 적극적으로 맞아들여 고용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이랜드가 비정규직보호법의 원 취지와 정신에 따라 2년간 일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정규직 전환을 피하기 위해 집단 해고한 것은, 실업자를 적극 고용하라는 성경의 노동법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셋째, ‘가혹 노동 금지’이다. 노동자를 가혹하게 부려서는 안 된다(레위25:43,53).

그런데 이랜드 홈에버 월드컵경기장 매장의 계산대에서 일하고 있는 계산원(캐쉬어)들은, \"이 매장이 입지가 좋아서 항상 손님이 많은데도 직원을 더 뽑지 않는다, 밀린 손님들 계산을 하느라고 화장실도 못 가고 물도 마실 수 없다.\"고 증언했다. 이 매장의 계산대는 1층과 2층 모두 합쳐 총 36개로서, 밀려드는 고객을 무리 없이 소화하려면 130명 정도의 직원이 필요하지만 80명 정도의 계산원을 두고 중노동을 요구한 것이다. 계산원들은 쉴 새 없이 오랫동안 서서 일하기 때문에 건강이 나빠져, 발에 감각이 없거나, 어깨를 90도 이상 못 올리거나, 하지정맥류나 방광염, 갑상선 질환을 앓았다(출처: \"엄마는 잘렸단다, 비정규직이라서\", <오마이뉴스>). 이와 같은 이랜드의 중노동 강요는 성경의 노동법이 규정한 가혹노동 금지를 어긴 것이다.

넷째, ‘정당 임금 지급’이다. 토지를 다음 희년까지 한시적으로 사고 팔 때, 억울하게 하지[KJV: oppress(압제하지)] 말아야 한다(레위기 25:14,17). 누가 누구를 억울하게 하기 쉬울까? 상식적으로 강자가 약자를 억울하게 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토지를 팔아야 하는 가난한 사람이 약자로서 제 값을 받지 못하고 토지를 헐값에 넘김으로써 억울해 지기 쉽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정당한 값을 지불하라고 강자에게 명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레위기 25장 전체 문맥에서 토지뿐만 아니라 노동(품)을 다음 희년까지 한시적으로 사고 팔 때에도 적용되는 보편적 거래 원칙이다. 곧 노동(품)의 거래 시에 강자인 고용주가 약자인 품꾼을 억울하게 하지 말고 정당한 품삯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레위기 25:50).

구약 시대 당시 품꾼 고용 계약에서 품꾼이 일시불 선불로 받는 품삯의 수준은, 고용 계약 기간 동안 품꾼이 행할 총 노동의 대가로 품꾼이 받아야 할 정당한 수준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성경은 품꾼 고용 계약이 끝날 때 고용주가 품꾼에게 후히 줄 것을 명령했다(신명기 15:13,14,18). 그래서 품삯을 주지 않는 행위는 성경에서 악으로 정죄된다(욥기 31:38~40, 야고보서 5:1,4).

그런데 이랜드 홈에버 월드컵경기장 매장의 고객만족센터에서 일하던 한 여성노동자는 그 매장에서 근무한지 4년이지만 월급은 85만원밖에 안 된다고 증언했다. \"까르푸 때는 야간근무까지 해서 110만원을 받아 그래도 40만원씩 저축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똑같이 일해도 월급을 더 받지는 못한다. 통장 잔고가 없어서 카드를 사용하면서 겨우 맞춰가며 산다.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여기에 있다.\"(출처: \"엄마는 잘렸단다, 비정규직이라서\", <오마이뉴스>). 이와 같은 이랜드의 저임금 정책은 성경의 노동법이 규정한 정당임금 지급을 어긴 것이다.

다섯째, ‘자영 노동 촉진’이다. 동족 히브리인은 노예가 아닌, 오직 품꾼으로만 고용할 수 있다(레위기 25:39,40). 그리고 품꾼 고용계약 기간은 최장 6년이다(신명기 15:12). 만약 6년 내에 희년이 있으면 희년까지만 고용계약을 맺는다(레위기 25:40,50). 그래서 희년이 오면 고용 계약이 만료되어 ‘자유’를 회복하게 된다(레위기 25:10,40,41,54).

그리고 6년이 차기 전에, 희년이 오기 전에 언제든지 근족(近族)에 의해 속량이 가능하다(레위기 25:47~52). 그런데 여기에서 근족에 의한 속량이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토지 무르기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만 회복하고 토지를 회복하지 못하면, 생계를 위해 다시 품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년이 오면, 자유의 회복은 토지의 회복과 동시에 이루어진다(레위기 25:10).

이와 같은 토지와 자유의 동시 회복은 희년의 노동법이 자영 노동을 지향한다는 것을 잘 나타낸다. 자영 노동이란 기업 토지에서 자신의 자본으로 부를 생산하는 노동을 말한다. 구약 성경이 이상으로 삼는 희년 사회는 한마디로 자영 노동 사회이다. 인간의 자유를 실제화하는 최선의 노동 형태는 자영 노동이다. 자영 노동 사회에 대한 구약성경의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이 바로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미가 4:4, 열왕기상 4:25, 스가랴 3:10) 앉아 자신을 두렵게 하는 자들 없이 평안히 살면서 서로 이웃을 초대하는 사회이다. 이 표현에서 자영 노동은 각 가족이 기업 토지에서 자기 자본(포도나무, 무화과나무)으로 부(포도열매, 무화과 열매)를 생산하는 노동이다. 생산자 가족은 사회공동체의 공공 경비로 사용된 십일조와 기타 헌물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거나 착취당하지 않고 노동의 열매를 모두 누릴 수 있다.

생산의 3요소가 토지, 노동, 자본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구약 시대에 무일푼의 가난한 사람도 토지(희년경제법의 토지 회복), 노동(가족 내 노동윤리와 지식과 기술에 대한 평생학습), 자본(희년경제법의 무이자 대부) 세 측면의 요소를 모두 구비할 수 있게 해 주는 정의롭고 자비로운 율법 하에서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자영 노동을 할 수 있었다. 이 점은 우리 시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영 노동을 할 수 있게 유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저임금 노동착취를 지속적으로 당하도록 옭죄고 있는 불의하고 잔인한 법제 현실과 정반대이다.

여섯째, ‘노동자 생존권 최우선’이다. 성경에는 빈자생활수단저당금지법이 있다. “맷돌은커녕 맷돌 위짝도 저당 잡힐 수 없다. 그것은 남의 목숨을 저당 잡는 일이다.”(신명기 24:6). 이 성구에는 율법의 위대한 경제 사상이 담겨 있다. 채주(債主)가 빚을 지게 된 가난한 사람에게서 맷돌을 저당 잡아서 가져가 버리면, 그 가난한 사람의 가족은 맷돌을 사용해야만 가능한 요리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자칫하면 굶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상태가 장기화되면 그 가족이 죽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에게서 맷돌을 저당 잡는 것이 곧 그 가족의 생명을 저당 잡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율법의 정신은 비단 맷돌에만 국한되지 않고, 겉옷과 같이 가난한 사람의 다른 필수적 생활 수단에도 확대 적용된다. 요컨대 율법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에게서 생활 수단을 빼앗는 것은 곧 그 생명을 빼앗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도 등장한다. “네가 내 생활 수단을 빼앗는 것은 내 생명을 빼앗는 것이다.”(4막 1장).

그리고 이 율법에 의하면, 생존권이 소유권보다 우선한다. 채주가 빚을 진 사람에게서 전당을 잡을 수 있는 권리는 바로 꾸어 준 빚에 대한 채주의 소유권으로부터 파생된다. 채주가 맷돌을 전당 잡으면 안 된다는 이 율법은, 채주의 전당권을 파생시킨 소유권보다 빚을 진 가난한 사람의 생존권이 우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유권은 생존권까지 위협해도 무방한 절대적인 권리가 결코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경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노동 관행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고용은 사주(社主)의 경영권의 발동인데, 이 경영권은 사주의 소유권으로부터 파생된다. 사주는 소유권에 근거한 경영권의 일환으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고용을 정당화하지만, 해고된 사람은 일자리가 없어서,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는 고용 불안과 열악한 임금 때문에 생존을 위협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노동은 생존권이 소유권보다 우선한다는 성경의 정신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노동 악습인 것이다. 이랜드가 고용노동 방식을 비정규직 노동으로 채택하고, 그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야 할 시점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집단 해고한 것은 성경의 빈자생활수단전집금지법에 담긴 ‘빈자 생존권 최우선 원칙’과 위배되는 것이다.

사랑의교회와 옥한흠 목사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언론 보도에 의하면, 최근에 사랑의교회 당회는 천막 농성 중인 노동자들에게 3차에 걸쳐 공문을 보내 농성 천막 철거를 통보했다. 그러나 해고된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사랑의교회 앞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한 2007년 12월 21일 이래 지금까지 노동자들이 사랑의교회에 요청했던 옥한흠 목사와 오정현 목사와의 면담은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천덕 신부에 의하면, 성경에서 구원이란 바로 “문제 해결”이다. 성경은 “전쟁 문제 해결”, “병 문제 해결”, “경제 문제 해결” 등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결을 모두 구원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구주’라는 말은 ‘문제 해결하시는 주님’이라는 뜻으로서, 예수님은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시는 분이시다.

김세윤 교수도 『구원이란 무엇인가?』(두란노)에서, 대천덕 신부와 비슷한 구원 개념을 피력한다. 김세윤 교수에 의하면, 구원이란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총체적”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오는 구원은 우리의 실존 전체에 대한 구원”이다. 그리고 그는 특히 구원과 빈곤에 대해 인상적인 주장을 편다. “빈곤도 엄연한 고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빈곤과 관계없다면 그것이 무슨 구원이겠습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으로도 나타난다.

절박한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구속 수배와 손해배상 가압류가 철회되고, 정규직 일자리를 얻는 것일 것이다. 예수님은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구원자이신가? 과연 그렇다면 교회는 예수님의 구원을 이 노동자들에게 나타내야 할 사명이 있다. 더 이상 방관하면 안 된다. 한국 교회가 나서야 한다.

무엇보다도 박성수 회장에게 성경을 가르친 옥한흠 목사가 나서야 한다. 회사 일이니까 관여 안한다는 식으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그것은 교회와 목회자의 중대한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 옥한흠 목사는 먼저 농성 천막으로 이 여성 노동자들을 만나러 찾아와야 한다. 그리고 이들의 탄식어린 사연을 듣고 그 상한 마음을 위로하고 그 아픔을 따뜻하게 품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박성수 회장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권면해야 한다. 절박한 상황 가운데 있는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교회가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할 사람들이며, 그 가운데에는 기독교인 성도들도 있다. 예수님은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구원을 베푸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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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노조의 하소연, “쫓아내든지 만나주세요”



▲20일 이랜드 노조측이 교인들에게 배포한 \'사랑의교회 농성장 소식지\' 제하의 유인물.(좌-앞면, 우-뒷면) 뒷면에 오정현 목사의 사진과 함께 대운하 관련 칼럼 전문을 게재해 유인물을 보는 교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뉴스미션

이랜드 노조가 지난해 12월 21일부터 진행해오고 있는 ‘사랑의교회’ 앞 천막농성이 한 달째를 맞으면서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노조 측은 지난 20일 사랑의교회 앞에서 교인들을 대상으로 ‘사랑의교회 농성장 소식지’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배포하고, 오정현 담임목사와의 면담을 거듭 촉구했다.

“우리를 쫓아낼 게 아니라면 우리를 만나주십시오”

노조 측은 유인물을 통해 “오정현 목사님은 정치적인 문제라는 이유로 면담 요구를 냉정하게 묵살하고 있다”고 전하고 “우리는 포기할 수도 물러날 수도 없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농성을 전개할 방침임을 밝혔다.

노조 측은 유인물에서 ‘오정현 목사님이 우리를 만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조차 연락이 없다’며 ‘박성수 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전투경찰과 용역깡패를 불러 우리를 쫓아낼 게 아니라면 우리를 만나 주십시오’라고 오정현 목사와의 면담을 강력히 요청했다.

또한 노조측은 유인물 뒷면에, 지난 13일자 국민일보에 오정현 목사가 기고한 ‘대운하와 문명사적 소통’ 제하의 칼럼 전문을 오 목사의 사진과 함께 게재해 눈길을 끌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대표적 공약인 대운하건설에 대해 찬성하는 논조의 이 칼럼은 몇몇 교계 언론매체에 재게재되기도 했는데, 일부 네티즌들은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내용의 비판적인 댓글을 달기도 했다.

노조 사무국장, “오정현 목사가 면담 거부… 농성 무기한 계속될 것”

이랜드 노조의 홍윤경 사무국장은 “오정현 목사가 노조와의 면담조차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랑의교회 앞 농성은 앞으로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무기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이어 그는 “사랑의교회 앞에서의 농성이 이번 달 17일(당초 집회 신고시 정했던 집회 기한)까지만 진행될 것이라는 일부 언론 보도가 있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며 “현재 농성은 (교회 앞에서의 시위 집회가 아니라) 단지 교회 주차장에서 천막 농성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날짜와 관계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성수 회장이 자진해서 사랑의교회 장로직을 사임했으므로 농성의 명분이 약해진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홍 사무국장은 “박성수 회장의 장로직 사퇴에 대해 노조 측은 한 번도 직접적으로 요구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홍 사무국장은 ‘오정현 목사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면 교회 앞 농성을 해제할 것인가’라고 묻자 “오정현 목사와의 면담이 성사되더라도, 농성은 이랜드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농성의 목적이 박 회장의 장로직 사퇴나 오 목사와의 면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어서 그는 “오정현 목사와의 면담을 통해, 오 목사가 직접 박성수 회장에게 사태를 조속히 해결할 것을 촉구하도록 요청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이랜드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농성의 목적”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또한 홍 사무국장은 유인물에 오정현 목사의 대운하 관련 칼럼을 실은 이유에 대해 “이랜드 사태에는 ‘정치적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며 무대응, 불간섭 원칙을 고수하던 오정현 목사가 일간지 신문에 공개적으로 대운하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며 ‘대선 전부터 이어져 온 오정현 목사의, 무대응적이지 않은 정치적 행보’에 대한 비판의 의미가 있음을 밝혔다.

이랜드 노조 문제는 정치적 문제이기 때문에 불간섭ㆍ무대응 하겠다던 오정현 목사가, 이보다 더 정치적인 대운하 문제에 대해 찬성하는 내용의 칼럼을 기고했다는 것은 ‘이율배반’이 아니냐는 무언의 항의를 한 셈이다.

사랑의교회 관계자, “노조 측 신뢰할 수가 없다”

한편 사랑의교회 측은 이랜드 노조 측의 이날 유인물 배포에 대해 ‘노조 측을 신뢰할 수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인물에 이름이 언급된 사랑의교회의 한 관계자는 “특정인의 이름까지 거론해가며,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내용의 유인물을 교인들에게 배포한 데 대해 크게 마음이 상한 상태”라고 불쾌감을 나타냈다. 이 관계자는 익명을 요구하면서도 전화 인터뷰에 차분하게 답변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서로 만나 합의한 내용에 대해서까지 속속들이 들추는 상황에서, 어떻게 노조 측을 믿고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겠나”라고 반문하며 “노조 측이 보다 예의를 갖춘 상태에서, 평화적인 노력을 기울여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오정현 목사에게 노조의 면담 요구가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 (노조 측의 면담요청이) 전달은 되었지만, 현재 오정현 목사님이 잠시 해외에 나가 있는 상태”라며 “평소 오 목사님이 ‘장고(長考)’하는 스타일이라, 면담에 관한 정확한 의사는 오 목사님이 돌아온 이후에나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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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현대 종교의 약인가 독인가

어느 시대에나 그러했겠지만 최근에도 기성 종교들은 다양한 방향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필자와 같이 종교사회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처럼 스포츠가 종교의 역할을 대신할지도 모른다는 논의(<뉴스미션>, 2008.3.18)는 앞으로 대중문화가 종교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기성 종교, 그중 특히 기독교에 도전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현재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관심은 1990년대에 비해 현저히 약화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 도전이 현대 종교에 독이 될지 약이 될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검토해 볼만 하다.

모더니즘과 정반대로 ‘불합리’와 ‘비이성’을 포용하려는 경향 있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1990년대 이후 사회과학 분야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 용어이지만, 1940년대에 처음으로 이 용어가 사용된 이후 60년대를 지나면서 이미 문학, 역사, 철학과 같은 인문학과 디자인, 건축 등을 포함한 예술 분야에서도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정보화 사회의 대표적인 문화적 양식 내지 문화적 흐름으로서 부각될 만큼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종교 역시 주로 ‘개혁 신학’적 시각에서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 신학의 접합을 시도하는 등 포스트모던적인 양상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에 있어서 결코 무관한 무풍지대가 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정보화’, ‘세계화’와 더불어 현대사회를 설명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하나의 중요한 이론적 틀로 사용되고 있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적 배경과 특성, 개념의 유용성과 정치적 함의들을 둘러싸고 다양하고 대립적인 의견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를 지배했던 근대의 사고방식이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었고, 따라서 지금까지 모더니즘을 추구했던 세계의 역사가 이제는 새로운 문명사적 전환점을 맞고 있으며, 21세기는 ‘포스트모던’의 탈근대로 특징지어질 것으로 보는 데에는 연구자들 사이에 대체적인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말 그대로 포스트(post)와 모더니즘(modernism)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그 다양한 분파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과 밀접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극복’ 또는 ‘모더니즘의 새로운 대안’으로 그 성격이 규정된다. 많은 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을 협의의 포스트모더니즘과 광의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전자는 모더니즘 이후에 1950년대 말경부터 건축, 미술, 음악, 문학, 연극 등과 같이 주로 광범위한 예술 분야에서 출현한 새로운 심미적 양식들을 의미하는 반면에, 후자는 20세기 후반의 ‘시대정신’이나 새로운 ‘문화적 패러다임’을 뜻한다.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는 주로 문화적 측면에 초점을 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근대주의)이 배태한 부작용과 위기에 대한 일종의 대응으로 ‘이성과 합리주의에 토대를 둔 서구 계몽사상을 계승하는 모더니즘에 대한 급진적인 지적 문화적 비판과 반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모더니즘이 빚어낸 자기모순과 위기에 대한 분석이 포스트모더니즘 연구의 시발점이 된다. 모더니즘의 기본 이념은 18세기에 발생한 계몽주의 운동에 토대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성적인 인간과 이들에 의한 역사의 발전과 진보로 특징지어진다. 합리적인 이성을 지닌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사회를 무한히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하는 진보의 부푼 꿈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과학화와 산업화, 민주화의 측면에서 표출되었는데, 실제로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달과 인류 역사상 전례를 찾아 볼 수 없었던 생산성의 증대와 부의 축적은 그 정당성을 어느 정도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와 함께 산업화와 성장제일주의가 가져온 물질주의, 물량주의, 경쟁주의, 업적주의, 개인주의 등과 같은 사회풍조,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 소외현상과 자연파괴현상, 과학만능주의에 기인한 핵전쟁의 위협 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 문제들은 인류의 생존 자체를 크게 위협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모더니즘의 한계에 대한 자각과 반성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정반대로 ‘불합리’와 ‘비이성’을 포용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이에 관한 논의가 여러 갈래로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내용으로 파악된다.

이와 함께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한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포스트구조주의’이다. 포스트구조주의의 특징은 첫째, 인간 주체나 개별적인 자아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며, 둘째, 총체성과 획일성을 부정하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데 있다. 특히 다양성의 추구는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에게 ‘해체주의’란 선/악, 현세/내세, 진리/허위, 이성/감성 등과 같이 서구사상 전반에 산재해 있는 이분법적 대립관계를 해체하는 비평작업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곧 다양한 해석으로의 개방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데리다의 해체적 비판이 바로 ‘다양성’과 ‘다원성’을 특성으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초가 되고 있다.

종교의 성격을 일정부분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변모시키고 있어

이상의 논의는 그 발단과 전개가 복합적으로 복잡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지만, 기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새로운 ‘문화적 패러다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종교 역시 변화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종교에 미친 영향으로 여러 가지 양상을 거론할 수 있겠지만, 크게는 다원성과 이분법적 사유의 해체라는 두 가지 점에서 고찰될 수 있다. 이것은 기성 종교의 존립문제와 직접적 연관을 가지기 때문에 이러한 사상 앞에서 존속하기 위한 치열한 자기 갱생이 요구되는 측면이기도 하다.

먼저 확실히 포스트모더니즘이 보여주는 다원성은 전부는 아니지만 유일신 종교들에게도 어느 정도 열려진 자세를 갖게 했다. 즉 종교다원주의의 수용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 종교다원주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배타성이 강한 기성 종교들이 다른 종교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단일적이고 절대적인 교리 해석을 지양하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수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유일신 사상과 절대적 진리를 내세운 종교일수록 배타성이 강한데, 기독교는 그러한 종교의 대표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기독교 신학자들이 개인주의적 구원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현상의 도래를 가속화시켰다는 점을 반성하고 있는 것도 이 현상이 기독교에 가져온 위기의식을 잘 대변해 준다. 어떤 점에서는 반기독교적 정신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좋던 싫던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분야에 침투되어 시대사상이 되었으므로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과의 담합을 보여주면서 긍정적이고 공격적인 수용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종교의 성격을 일정부분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변모시키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종교에 미친 또 다른 영향으로는 이분법적 사유의 해체와 개별 영성운동의 출현을 들 수 있다. 수 천년동안 서구문화를 중심으로 사회적 통합을 유지해오던 서구사회에서 최근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심이 저하되고 그 대신 동양종교를 비롯한 비그리스도교 종교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동양인의 사유형식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구인들의 의식구조에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이분법적 사유형식(dualism)으로 이러한 사고는 조화와 포용보다는 대립과 투쟁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에, 동양인의 사유형식은 대립과 투쟁보다는 조화와 융합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사회변동에 있어서 서양인들이 일정한 방향(역사적 진보와 발전)을 전제로 하는 단일 방향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동양인들은 자연을 중심으로 보는 순환론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동양인의 사유형식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내용과 상당히 유사하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서양종교보다는 상대적으로 동양종교가 부각될 가능성이 크거니와, 실제로 불교 역시 새로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동양종교의 부상과 더불어 개별 영성운동의 출현과 확산 역시 눈여겨볼만 하다. 이는 ‘신영성운동’이란 용어로 설명된다. 신영성운동이란 일본의 종교사회학자 시마조노 스스무(島薗 進)가 서구의 뉴에이지 운동, 일본의 정신세계를 포함하여 자유로운 개인적 영성의 개발이 중심을 이루는 종교 변용 현상을 지칭한 포괄적인 운동군이다. 시마조노가 이를 ‘1970년대 이후 세계 선진국에 있어서, 또한 제3세계도 포함해서 소비문화가 발달한 대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전지구적인 운동군’으로 정의한 것은 이 운동 발흥의 직접 배경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영성운동의 연결고리는 주로 다음의 두 가지 면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는 개방성과 자율성이다. 신영성운동에서는 종교집단에 구속받으면서 초월적 존재에 복종하는 종교의 시대는 끝나고 있으며, 그 대신 개개인이 자기탐구를 통해 ‘영성\'(spirituality)을 개발하는 시대가 왔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신영성운동의 기본 성격은 총체성과 획일성, 경직성을 부정하고, 자율과 개방을 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신영성운동의 과학=종교복합적 세계관이다. 신영성운동에서는 과학과 종교를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합치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즉 신영성운동가들은 현대과학이 이원론적 세계관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에 첨단과학이 제시하는 새로운 우주관과 생명관은 새로운 영성의 탐구와 합치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근래 들어 ‘영성’이라는 단어가 크게 유행하고 있고, 학계에서도 영성 관련 담론에 관한 논의가 자주 등장하고 있거니와, 특히 이 같은 논의에서 주목되는 것은 영성의 ‘사회적’ 의미이다. 여기서 영성의 개념은 기존의 기독교 신학과 같은 특정 종교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보다 광범위하면서도 일상적인, 그리고 사회문화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영성의 일상화’ 내지 ‘영성의 사회화’, 또는 ‘일상생활의 영성화’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성 담론의 확산은 바로 이분법적 사유의 해체에 기인되면서 동시에 이분법적 사유를 해체시키는 좀 더 적극적인 동인이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질적으로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대상

이와 같이 종교의 측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반드시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어쩔 수 없이 무시할 수는 없는 시대정신이라는 시각이 드러난다.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모임’과 ‘예배’를 전제로 하는 기독교가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과 유사하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도 의식이나 절차, 선교 방식 면에서 받아들이면서 종교의 속성이나 본질 자체의 훼손은 타협될 수 없다는 관점이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용할 수도 있어야 하지만 본질적으로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가 절대적 진리에 호소하고, 복음의 배타적 성질을 유지해야 하는 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종교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종교다원주의가 확산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리스도교의 ‘근본주의’와 이슬람교의 ‘원리주의’가 전세계적으로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동양종교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로 인해 그리스도교의 신자수가 감소하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도 찾을 수 없다는 점도 포스트모더니즘이 보여준 위세의 이면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로 보면 현대 종교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역할은 각 종교의 교리에 따라, 또는 신학자들의 시각에 따라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간주되고 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적어도 한 국가 내에 또는 국가간에 일어나고 있는 종교 분쟁으로 인한 갈등과 폭력 내지는 전쟁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이것은 많은 갈등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상생’(相生) 윤리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어느 특정 시기의 사상이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를 극복하거나 비판 또는 보완하는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영존하리라는 사고 자체가 반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사상으로 대체된 후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이 함축한 진정한 의미를 혼동하지만 않는다면, 종교의 다원성, 이분법적 사유의 해체 같이 너와 나의 다름보다 같음을 지향하는 이 사상은 종교 모두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게 될 것이다. 도전이란 이를 피하거나 맞서기보다 그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의 계기로 삼을 때 오히려 한 단계 더 발전하는 발판이 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종교적 역할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접근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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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를 줄이는 간단한 방안들
[CBMC칼럼] SIMPLE IDEAS FOR REDUCING STRESS

이 칼럼은 CBMC 국제본부에서 제공하는 미국의 저명한 목회자 및 크리스찬 칼럼니스트들의 글입니다. 우리말 번역문은 한국CBMC에서 제공합니다. [편집자 주]


(Editor’s Note: The following has been adapted from an unknown source. In the business and professional world, stress is a reality that we all must live with. Deadlines, unmet goals, unexpected setbacks, computer problems, financial challenges, interpersonal conflicts and intense competition are just some of the factors that contribute to our daily stress. We all cope with stress differently, but here are some worthwhile suggestions you might want to consider.)

(편집자 주: 다음은 알려지지 않은 출처로부터 받아온 것이다. 사업과 전문직 세계에서 스트레스는 우리 모두가 감당하여야 하는 현실이다. 마감 시간, 달성하지 못한 목표, 예기치 않은 장애물, 컴퓨터 문제, 재정적 문제, 사람 사이의 갈등과 극심한 경쟁은 우리가 매일 당하는 스트레스의 원인들 중에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스트레스를 상이하게 대처해 나가고 있지만, 여기에 고려해 봄직한 몇 가지 가치 있는 제안을 해본다.)

Someone has wisely said, \"Never borrow from the future. If you worry about what may happen tomorrow and it doesn\'t happen, you have worried in vain. Even if it does happen, you have to worry twice. Why waste your worrying until you need it?\" To reduce worry and reduce stress, try the following:

“미래로부터 빌려 오지 말라. 내일 일어날 일을 걱정하다가 그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헛된 걱정을 한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나더라도 두 번 걱정을 하게 되는 셈이다. 걱정을 해야 할 때가 되기 전에 쓸데 없이 걱정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누군가 현명한 말을 하였다. 걱정을 줄이고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해 보라:

1. Pray. Acknowledge your need for wisdom and guidance in your daily responsibilities.
기도하라. 일상적인 과업을 위하여 지혜와 인도하심이 필요함을 인정하라.

2. Go to bed on time. When we are well-rested, our capacity for handling stress is greater.
제 시간에 잠자리에 들라. 충분히 휴식을 하면 스트레스를 다루는 능력이 더 커진다.

3. Get up on time so you can start the day unrushed. There is such a thing as too much rest!
제 시간에 일어나서 하루를 서두르지 않고 시작할 수 있도록 하라. 지나친 휴식도 있을 수 있다!

4. Be willing to say no. Decline projects that you cannot give adequate time and attention.
거리낌 없이 아니오 라고 말하라. 적절한 시간과 관심을 쏟을 수 없는 프로젝트는 거절하라.

5. Delegate tasks to capable others. Just because a job needs to be done, it does not mean you are the one who must do it. Find the best person for the job.
일을 능력이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라. 일을 하여야 한다고, 꼭 그 일을 당신이 하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찾아라.

6. Simplify your life. Too many things demanding attention inevitably cause stress.
삶을 단순화하라. 관심을 집중할 일이 지나치게 많으면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다.

7. Less is more. Although one is often not enough, two are often too many.
덜한 것은 더한 것과 같다. 하나는 대개 충분하지 못할지라도 둘은 대개 너무 많다.

8. Allow sufficient time for doing things and getting to places. Overscheduling is another major stress producer. You can’t be in two places at one time.
일을 할 때와 목적지로 가는데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라. 과다하게 스케줄을 잡는 것은 또 다른 스트레스의 주범이다. 한 번에 두 곳으로 갈 수 없다.

9. Pace yourself. Spread out big changes and challenging projects over time; do not take on too many difficult things at one time.
걸음걸이를 조절하라. 큰 변화와 도전적인 프로젝트는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해 나가라. 너무 많은 어려운 일을 한 번에 떠맡지 말라.

10. Take one day at a time. Do today’s work today; let tomorrow’s work wait until tomorrow.
하루 일을 그 때에 하라. 오늘 일은 오늘 하라. 내일 일은 내일까지 기다려라.

11. Distinguish worries from concerns. If a situation is a concern, find out what God would have you do and release the anxiety. If you can\'t do anything about the situation, forget it.
마음에 걸리는 것과 걱정을 구분하라. 어떠한 상황이 마음에 걸리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무슨 일을 하기 원하시는지 알아내고 불안함 마음에서 벗어나라. 상황에 대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면 잊어버려라.

12. Live within your budget. Do not spend money that you do not have or buy things you cannot afford.
예산 범위 안에서 살아라. 있지도 않은 돈을 쓰지 말고 감당할 수 없는 물건을 갖거나 사지 말라.

13. Have replacements. Keep a duplicate car key in your wallet, a spare house key buried in the garden, and extras of other items you frequently need.
대체품을 가지고 있어라. 지갑에 자동차 키를 복사하여 보관하고, 여분의 집 열쇠를 정원에 묻어두고, 자주 사용하는 다른 물건들의 여분을 갖고 있어라.

14. Choose your words carefully. This single piece of advice can prevent an enormous amount of trouble.
말을 조심스럽게 골라서 하라. 충고 한마디가 엄청난 곤란을 방지할 수 있다.

15. Have fun. Do something every day for the child in you.
재미있게 살아라. 당신 속에 있는 어린 아이 본성을 위하여 매일 무언가를 하여라.

16. Nourish yourself spiritually. Have a Bible readily available to read while waiting in line, or for a meeting.
자신에게 영적 영양분을 공급하라.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혹은 회의를 기다리는 동안 성경을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라.

17. Eat properly. Following a healthy diet will help keep you physically fit and provide needed energy.
알맞게 먹어라. 건강한 식이요법을 따르면 신체적으로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 받는다.

18. Get organized. Find a proper place for everything so you will not have to hunt when you need them.
잘 정돈하라. 모든 것들을 제자리에 놓아 필요할 때 찾아 헤매지 않도록 하라.

19. Listen to audio tapes or CD’s while driving. Use time in your car productively to improve your quality of life.
운전 중에 테이프나 CD를 들어라. 차 안에서 시간을 생산적으로 사용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켜라.

20. Write down thoughts and inspirations. If you have a good idea, write it down. If you hear some helpful thoughts, record them so you will not forget them.
생각과 영감을 적어두어라.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적어두어라. 도움이 되는 생각을 들으면 잊지 않도록 기록하라.

21. Find time to be alone. It is good having people around, but time alone enables us to recharge.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라.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것은 좋지만 홀로 있는 시간은 재충전을 가능하게 한다.

22. Talk to God frequently. Try to deal with small problems by praying about them. You do not have to wait for a specified time and place to pray.
하나님께 자주 말하라. 사소한 문제들은 기도함으로써 처리하도록 하라. 기도하기 위하여 특정한 시간과 장소가 마련되기까지 기다리지 말라.

23. Make friends with people that share your values. We all need encouragement in living up to the truths we hold dear in our lives.
가치관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친구로 사귀어라. 우리 모두는 인생 가운데 소중하게 여기는 진리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격려를 필요로 한다.

24. Keep favorite Bible verses readily available. Having cherished Scripture passages written down on a piece of paper or a card can serve as a helpful reminder in stressful times.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라. 소중한 성경 구절을 종이 쪽지나 카드에 적어 두면 스트레스를 받는 시간에 도움이 되는 말씀으로 다가올 것이다.

25. Laugh. Everyday life can be disheartening. Take time to laugh. Maximize light-hearted moments.
웃어라. 매일의 삶은 낙담적일 수 있다. 시간을 내어 웃어라. 가벼운 마음을 갖는 순간들을 최대화하라.

26. Have a personal exercise routine. Physical exertion is an excellent stress reducer.
개별적으로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라. 육체적인 운동은 훌륭한 스트레스 감소 수단이다.

27. Develop a forgiving attitude. Bitterness is poisonous. Remember, most people are doing the best they can.
용서하는 태도를 키워라. 마음속의 분은 독성이 있다. 기억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28. Be kind to unkind people. They probably need kindness the most.
불친절한 사람들에게 친절하라. 그들은 어쩌면 친절이 가장 필요할지도 모른다.

29. Talk less; listen more. Be receptive to what others have to say; you might learn something useful.
말은 덜 하고, 더 들어라.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받아드려라. 무언가 유용한 것을 배울지도 모른다.

30. Remind yourself that you are not the general manager of the universe. Don’t try to do God’s job!
당신이 우주의 경영주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라.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