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있나니 성서주일 계1:2-3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근본 지침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이 없이, 성경을 모르고, 성경을 안 지키고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서주일을 맞아 성경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증거와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하면서 성도들에게 여기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만 국한되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요한이 본 계시와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읽고, 듣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복을 받기 위해 성경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게 아니라 읽고 듣고 지키는 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당연히 성경을 읽고, 듣고, 지킨다고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성경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 성경만큼 무시당하는 것도 없습니다. 오늘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경에 대한 바른 태도를 회복하고 복된 길로 나가시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읽기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수인데 반해 “읽는 자”는 단수형을 씁니다. 물론 회당이나, 초대교회의 성경을 낭독하는 예배의식에 기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읽는 것은 혼자 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꼭 교회에 모여야 했습니다. 성경은 두루마리로 성전에만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행복한 줄 아십시오. 핍박이 심한 로마의 학정시대이므로 성경을 읽기 위해 성전에 모인다는 것은 곧 목숨을 내놓는 일입니다. 요한의 시대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읽는 자가 진정한 신앙인이죠. 이런 사람이 복 받지 않겠습니까?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낭독 이상의 뜻을 가집니다. 빌립이 이디오피아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을 때 한 말은 이것을 뒷받침해 줍니다. (행8: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깨닫지 못한다면 읽는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주님은 (막13:14, 마24:15)에서 말씀하십니다.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뜻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시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읽는 자가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낭독하는 것도 물론 아무나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깨닫고 읽는 자가 지키는 데까지 이르러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묵상이란 그런 뜻입니다. 학문을 위하여 읽는 자는 복 받을 수 없습니다. 비판하기 위해 읽는 자가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지키기 위해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받을 사람입니다.
듣기
모든 사람이 다 듣기에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 받는 사람은 성경 말씀을 듣는 것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 듣기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암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경제적 어려움도 어려움이려니와, 정치의 혼란도 혼란이려니와, 지도력의 부재도 문제려니와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옛날에는 설교자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중국은 설교자가 없어 설교를 듣고 싶어도 못 듣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에게는 설교자가 없어 못 듣는 것이 아닙니다. 들을만한 설교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명설교가 얼마나 봇물처럼 일렁이는지 모릅니다. 들을 귀가 없어 문제랍니다. (겔12:2) “인자야 네가 패역한 족속 중에 거하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수도 없이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제대로 들은 자는 움직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주님의 말씀대로 따릅니다. 같이 가던 자들은 소리만 들었습니다. 소리만 들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소리와 말씀은 다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행9: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그는 당연히 그 말씀을 따라 아나니아에게 갔습니다. 여러분! 혹 소리만 듣는 자들은 아닙니까?
소리만 듣는 사람은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말이 아니라도 소리 속에 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복 받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 주님을 부인하고 새벽녘에 닭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단순한 닭울음소리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소리 속에 숨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닭울음소리를 통해 그는 회개했습니다. 여러분! 우주만물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설교 듣기에 성공하십시오. 소리만 듣지 말고 소리 속에 담긴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하여 복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키기
뭣 때문에 읽습니까? 눈이 즐거우라고요. 뭣 때문에 듣습니까? 귀가 즐거우라고요. 아닙니다. ‘읽는 자’와 ‘듣는 자’는 ‘지키는 자’에 걸립니다. 읽고 듣는 것의 목적은 지키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 교훈은 우리 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눈이나 귀 등 감각기관은 읽는 것에 비유됩니다. 감각기관들에서 읽은 정보가 뇌에서 수집됩니다. 즉, 뇌는 듣는 것과 비유됩니다. 그러고 나면 즉시 행동하는 기관으로 전달됩니다.
앉은뱅이나 중풍병자는 이것이 잘 안되는 사람입니다. 듣기까지는 했는데 뇌가 전달하여도 손발이 말을 안 듣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이들이 장애자입니다. 여러분, 그럼 신앙인이 이렇다면 무어라 말하겠습니까? 읽기나 듣기 중 하나를 못합니다. 혹은 읽기도 하고 듣기고 합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합니다. 지키지 않습니다. 다름 아닌 영적 장애인입니다. 신체적 장애인만 장애인입니까? 더 무서운 것은 마음이나 영혼에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마25장)에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25:34)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이후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하십니다. 말씀을 지킨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반대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하면서 모든 것을 안 했다고 하십니다. 복은 행동과 관계됩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복과 관계가 있습니다. 복 있는 성도가 되길 원하십니까? 말씀을 읽고 듣고 더 나아가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때가 가까움이라” 예, 그렇습니다. 이 말세에는 그런 자들이 드물 것이란 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만이라도 이 말세에 성경에 대한 바른 태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듣고 나서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철저히 적용시키는 삶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적용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데 복 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축복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요일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할렐루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