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ubilee(희년)와 전도 레25:8-13 지난 6월 4일은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에 오른 지 5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영국은 이 50주년이 되는 날을 Jubilee라고 해서 전국이 축제 속에서 보냈습니다. 덕분에 이 날은 휴일이 되어서 사람들은 월요일, 화요일 이틀을 계속해서 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영국에 살고 있지만 여왕이 즉위한 지 50주년이 되었다는 것이 별로 큰 의미를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마 영국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Jubilee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Jubilee를 우리나라 말로 하면 희년입니다. 희년이라는 것을 굳이 풀이하면 “기쁜 해”, 또는 “좋은 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Jubilee가 기쁜 해, 좋은 해가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10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니다.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 갈지며’(레25:10). 하나님은 안식년이 일곱 번이 지나고 그 다음 해인 50년, 속죄일에 나팔을 불어 희년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속박 받고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희년에는 모든 빚이 탕감되었습니다. 돈 때문에 팔았던 내 땅을 도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빚 때문에 노예가 되었던 사람이 풀려나 다시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 땅에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50년이 희년이 될 수 있고 희년이 기쁘고 좋은 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Jubilee의 성경적 의미를 보면 영국 여왕이 즉위한지 50 주년이 되는 것을 가지고 Jubilee라고 하는 것은 그리 적당치 않습니다. 물론 왕으로서 통치한 기간이 50년이 되기 때문에 그럴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성경적인 의미를 고찰해 볼 때 Jubilee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도 적합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Jubilee는 오직 만왕의 왕이시고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만이 선포할 수 있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하는 것은 Jubilee에 대한 잘, 잘못을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저는 “왜 하나님께서 이 Jubilee를 제정하셨을까?”, “Jubilee가 주는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Jubilee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하는 것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특별히 전도 주일을 맞이하여 “Jubilee와 전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이해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교회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이 지상 위에 교회를 건설하고 그 교회를 통해 인간을 구속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 준비 기간이 구약 시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그것을 책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보면 교회에 대한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율법과 계명과 규례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약 성경을 통해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의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따라서 Jubilee는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Jubilee는 단지 노예가 그 속박에서 벗어나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 빚 때문에 잃었던 토지를 다시 소유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Jubilee의 진정한 의미는 지금까지 우리를 속박하고 있었던 모든 영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 자유는 세상에서와 같이 내가 투쟁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Jubilee를 통해 인류가 죄와 사망의 노예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Jubilee는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와 안식이 있음을 보여 주는 하나님의 실물 교육 재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Jubilee, 즉 희년이 되면 다음 세 가지를 시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빚 때문에 사들였던 땅을 다시 본래 소유주에게 돌려 주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때는 한 푼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원래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각 지파와 족속과 백성에게 분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개인의 기업으로 주어 그것을 발판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돈 때문에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았던 땅을 파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팔았던지 희년이 되면 그 땅을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해서 기업이 되는 땅을 영원히 잃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또 땅이 어떤 사람에게 편중되는 것을 금지시키셨습니다. 만일 소수의 사람이 대부분의 땅을 소유하게 되면 결국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땅이 없는 사람은 그 밑에서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옛날 우리나라에 있었던 지주와 소작인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Jubilee를 통해 나의 기업이 되는 땅을 영원히 남의 소유가 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이것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상실되었던 상속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의 자녀들에게 다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범죄함으로 이 상속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이것을 회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좇는 사람들을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을 상속 받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7절에서 이 사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장차 받게 되는 상속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여러분은 이 사실에 대해 실감이 가십니까? 내가 앞으로 받을 그 상속이 얼마나 크고 좋은 것인지 상상이 가십니까? 바울이 오죽하면 그 영광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 바울은 이것만 생각하면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1”3). 그는 이 복만 생각하면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찬송이 저절로 나왔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장차 받게 될 복을 실감 있게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믿는 것이 좀 어려워도 참을 수 있습니다. 좀 손해가 나더라고 견딜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복은 추상적인 것도 아니고 형이상학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머리 속에서만 맴도는 것도 아닙니다.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못 누리고 있는 것은 나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을 확실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복은 믿는 자만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복을 하늘 나라에 가서만 받으려고 생각하지 마시고 현재에도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내세 지향적인 종교이지만 현세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둘째, 희년이 되면 모든 종들을 해방시키라고 하셨습니다. 얼마의 빚을 지었던 간에, 몇 년을 종살이 하였던 간에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단 희년이 되면 종이 되었던 사람은 그를 얽매이고 있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몸이 되어서 가족에게 돌아갑니다. 지금은 그런 일을 볼 수 없지만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돈 때문에 자기나 가족의 몸을 파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 때문에 팔리게 되면 그는 자기를 산 주인의 소유가 됩니다. 즉 소유물이 되는 것입니다. 소유물에게 무슨 자유가 있습니까? 무슨 인격이 보장되겠습니까? 그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여야 합니다. 직장 같으면 좀 비유가 상하거나 마음에 안 들면 사표를 내면 끝납니다. 그리고 직장 생활은 종이나 노예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종은 완전히 다릅니다.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소유물로서 전혀 자유가 없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이런 처지에 있던 사람에게 자유가 주어진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 얼마나 기쁘고 좋겠습니까?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그리운 가족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18년 동안 귀신이 들려서 몸이 꼬부라진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고 고쳐주셨습니다. 옆에서 이것을 본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고 분을 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13:16). 사단에 매였다는 말은 사단의 노예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왜 여인이 사단의 노예가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왜 귀신에 들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사단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유를 하락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거에 이런 존재였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과거에 죄로 인해 죄의 종이었습니다. 또 그 죄로 인해 사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랬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죄에서, 사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이 이것을 실감하고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이것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로마서 7장 22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7:22). 또 로마서 8장 2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2). 진정 자유는 육체적인 자유가 아닙니다. 영적인 자유입니다. 사단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 된다고 요한복음 8장 3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죄의 권세를 가진 사단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분들은 이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2절 말씀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린도후서 3장 17절 말씀입니다. 주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죄에서, 사망에서, 사단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을 때 나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희년이 되면 땅을 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희년에는 농사를 짖지 말고 땅을 놀리라는 것입니다. ‘그 오십 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레25:11). 즉 땅을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땅이 뭐 사람입니까? 동물입니까? 왜 쉬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농업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농사 짖는 땅은 일정 기간 쉬게 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땅이 영양분을 흡수하고 산성이 되는 것을 방지한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동물이나 사람을 부리듯이 땅을 경작하면 결국 땅이 나쁘게 되어 농사가 잘 안 된다고 합니다. 과학자이신 하나님께서 물론 이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통해 안식이 무엇인지를 설명을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분들은 안식년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만 안식년은 원래 땅을 쉬게 하는 해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6년 동안 농사를 짖고 1년 간을 쉬게 하셨습니다. 이 규례를 사람에게 적용해서 목사나 선교사가 얼마동안 일을 하다가 쉬는 것을 안식년을 갖는다고 합니다. 희년이 되어 땅을 쉬게 하신 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의 영적 평안과 또 앞으로 누릴 영원한 안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진정 인간이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안식일 것입니다. 오늘도 피곤한 몸으로 교회에 나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시간 속에 얽매여서 참으로 쉬지를 못합니다. 어떤 분은 일주일 내내 일 속에 파묻혀 쉬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영적 쉼입니다. 영적으로 쉼을 얻지 못하면 정신도 쉬지 못합니다. 정신이 쉬지 못하면 육체도 쉬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안식입니다. 영혼이 쉴 수 있을 때 정신과 육체도 아울러 진정함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이 쉼으로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무거운 짐이란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것을 통틀어 말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쉼만 주시는 분이 아니고 정신적, 육체적인 쉼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먼저 영적으로 쉬어야 된다는 것을 아십니다. 이는 영혼이 쉬어야 정신도, 육체도 진정 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히브리서에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4:-10).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이 있다는 것은 너무도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비록 피곤하고 힘들어도 하나님 품 안에서 영원히 누릴 안식이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나 기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과 저에게 하나님은 이 안식을 허락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 여러분! 이 상속권을 회복하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벗어나며, 그리고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등 이런 일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할 수 있습니까? 내 스스로는 상속권을 회복할 수도,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도, 그리고 평안이나 안식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느 것 하나 내 힘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아담이 사단에게 빼앗겼던 것들을 내가 다시 되찾을 수 있습니까? 죄로부터 구속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까? 이것들은 내 능력의 한계를 벗어난 것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아니면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과거 구원을 받기 전, 나는 죄의 종이 되어서, 사망의 노예가 되어서 어두움 속에서 자유와 안식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때는 그것이 인생인줄 알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련해 놓으신 자유와 안식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비참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그런 처지를 하나님은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참 자유와 안식을 주시고자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 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 땅에 오신 것이 우리에게 진정 Jubilee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셨을 때 천사가 나타나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소식을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얼마나 예수님이 오신 것을 기뻐하고 계십니까? 얼마나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신 것을 좋은 소식이라고 믿고 계십니까? 정말로 예수님으로 인해 자유와 안식을 얻고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고 믿고 계십니까? 그래서 내 안에는 진정 기쁨이 있습니까? 감사와 찬양이 있습니까? 여왕의 Jubilee가 되어서 하루 더 쉬게 되어 여러분은 다 좋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정 나에게 자유와 안식을 허락하신 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진심으로 좋아 하시고 계십니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이 사실을 실감 있게 느껴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가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서 감사가 나옵니다. 찬양이 나옵니다. 그래야 이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 가치를 잘 모르는데, 내가 감격하고 있지를 못하는데, 내가 실감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에게 그 복음을 실감 있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습니까? 전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이 은혜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효과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깊이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은혜가 깨달아지도록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깨달음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이 좋은 소식을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전하게 할 것입니다. 전도를 잘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너무도 이 복음이 귀하고 좋다는 것을 자신이 몸소 체험하고 깨달았기 때문에 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이 은혜를 더 많이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평생 복음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 그렇습니다. 전도는 은혜를 깨달은 것 만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하는 전도는 마치 미국을 가보지도 못하고 미국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갔다 와 보십시오. 입에 침을 튀기며 말할 것입니다. 자기가 보고 온 것을 마음 속에만 두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주 전 우리는 김기동 안수 집사님을 초청하여 전도 간증 집회를 가진 바 있습니다. 저는 왜 그 분이 그렇게 전도에 열심히 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저의 결론은 그 분이 그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고로 인해 삶의 기로에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 체험은 너무도 생생하여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후부터 지금까지 자기가 체험한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나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전도를 잘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기동 집사님이 사고 후 회복의 과정에서 겪었던 고생과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체험은 안 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역경이나 재난을 당하지 않고도 내가 믿음 생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것을 더 귀한 체험으로 여기고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김기동 집사나 사도 바울처럼 극적인 체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체험을 하지 못했다고 섭섭해 하거나 안타까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안 겪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만일 내가 그런 쓰라린 일을 당했다면 믿음에서 떠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모든 사람이 다 김기동 집사일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사도 바울일 수는 없습니다. 김기동 집사와 사도 바울은 각각 한 사람이면 족합니다. 나는 나이고 여러분은 여러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합당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어떤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단지 내 마음이 강팍해서, 내가 받아드리지 않으려고 해서, 내가 믿지 않으려고 해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재 내게 주신 은혜만 진심으로 깨달을 수 있다면 나도 김기동 집사나 사도 바울 못하지 않게 전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십시다. 전도에 열심을 내지 못하는 이유를 다른 데 돌리려고 하지 마십시다. 내 자신에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십시다. 그래야 해결점이 보입니다. 항상 이런 이유, 저런 핑계를 대다가는 평생 가야 전도 한 번 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갈 것입니다. 그 때 어떤 얼굴로 서겠습니까?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이며 심혈을 기울이고 계시는 영혼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죄송스러워서 어떻게 서시겠습니까? 저가 이렇게 말씀 드리면 어떤 분은 “아이고, 저 목사님, 오늘도 또 저 소리야, 이제 전도하라는 소리가 부담스러워서 듣지 못하겠어”라고 말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저가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단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감당하는 분이 되실 수 있도록 일깨워 드리는 것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설교 초반에서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에 관심을 두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교회는 축복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라고 하면 전도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복음의 열정과 영혼에 대한 깊은 애정을 시종일관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에서 전도가 체질화 되는 것은 한 두 편의 설교로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강단에서는 지속적으로 전도에 대한 설교를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님들로 하여금 전도에 대한 사명을 일깨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님들은 전도는 뒷전으로 하고 영적 잠을 자게 됩니다. 우리는 영적 Jubilee를 통해 주님이 주시는 자유와 안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영혼들이 흑암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자유와 안식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니 이미 알고 있는 내가 가서 말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만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안됩니다. 마치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보는 심정으로 구원 받지 못한 영혼들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구원의 방법이 있음을 알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그들에게 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제일 기뻐하십니다. 이 일을 행 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킹스크로스 교회는 지난 주일부터 이곳 시내로 장소를 옮겨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런던 시내 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을 정복해야 합니다. 이 땅을 정복하려면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면 말은 전도한다는 말이나 그 의미가 같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만큼 이 땅에서 어두움의 세력은 물러가고 우리의 소유가 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성도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 특별히 금년 저희 교회가 전도의 일환으로 태신자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6월까지는 대상자를 놓고 기도하는 기간입니다. 이 일에 성의 있게 최선을 다 해 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한 분 이상 전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큰 자로 인정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