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년을 향하여 레25:8-12,행10:1-16 두세 번 중국이나 북한 방문을 위해 잠시 머문 적은 있지만, 22년 만에 찾아온 고국은 상당한 변화가 있습니다. 물론 신문이나 고국방문자들의 입을 통해 수없이 들어온 이야기지만, 실제 눈으로 목격을 하고 귀로 들어본 변화는 엄청납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화는 당연한 것이니까, 저 또한 당연히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한가지 제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변화가 있습니다. 이건 사회의 변화라기보다는 제 자신의 변화입니다만, 지하철을 타면 앞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다음 역에 내리려고 일어서는 줄 알고 생각 없이 앉았는데, 가만히 보니 이분들이 나보다 더 나중에 내리는 것입니다. 수염 때문이라 생각하지만 노인 취급을 받으니 너무나 당혹스럽고 젊은 시절의 낭만으로 가득 찬 내 추억이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혹시 내일이라도 여러분이 저를 보시더라도 일어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대의 변화를 읽자 이번 한 달을 한국에 있으면서 고국의 변화를 읽어보기 위해 제 나름대로 열심히 좇아 다녔습니다. 모든 변화를 읽기에는 짧은 시간이지만 한두 가지 분명한 변화는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가방을 손에 드는 대신에 모두가 등에다 백을 짊어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책가방은 언제나 손에 들고 다녔고, 그래서 우리 때의 많은 분들이 그러하지만, 양복을 입어보면 오른 손이 왼손보다 더 아래에 내려옵니다. 또 다른 변화는 전에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책 대신 모두 전화기를 들고 있습니다. 지난달 모스크바에 한달 간 있었습니다만, 모스크바의 지하철을 타보면, 거의 반 이상이 책을 읽습니다. 사람이 많아 움직이기 불편한 곳에서도 서서 책을 꺼내 읽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활자문화에서 화면문화로 변화해 가는 추세는 당연하지만, 독서가 가져다주는 지성과 감성의 혜택을 과연 컴퓨터가 대신할는지는 의문입니다. 제가 수수께끼를 한번 내 보겠으니 알아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사과 백 개를 갖고 갔는데 가면서 반을 먹고, 오면서 반을 먹었습니다. 그러면 모두 몇 개가 남았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은 3가지로 나올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가면서 50개를 먹고 오면서 50개를 먹었으니 남은 게 없다. 둘째는 99개입니다. 한 개를 잘라서 가면서 반을 먹고 오면서 반을 먹었다. 세 번째 답은 25개입니다. 가면서 100개의 반인 50개를 먹고 오면서 나머지 50개의 반인 25개를 먹었으니 25개가 남았다. 정답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3가지가 다 옳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정상을 향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길이 한가지 길만이 있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한가지 답밖에 없다고 믿는 수학과 과학에서도 아주 깊이 있게 들어가면 정답은 두 개가 나올 수도 있고 3개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도 절대적인 진리가 아님이 오래 전에 증명이 되었습니다. 현대를 post- modernism 시대(탈현대시대)라고 합니다. 학술적으로는 복잡한 용어입니다만, 쉽게 설명하면 권위와 전통에 근거한 전체성, 그리고 이성과 합리의 이름아래 주어졌던 획일성의 시대는 가고 이제는 개인이 존중되는 다양성의 시대라는 말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다양성의 아름다움이 잘못하면 이기와 방종으로 쉽게 넘어간다는 점에서 우리는 상당한 주의를 기우려야 하겠습니다. 저도 여기 와서 들었습니다만, 이화여대에서는 매년 신입생들에게 앙케트를 조사한다고 합니다. 그 중의 질문 하나가 \'인생관?\'을 묻는 질문인데 여러 가지의 답을 놓고 우선순위를 매깁니다.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첫 번째 항목은 \'진실한 사랑\'이었는데, 최근에는 \'존경받는 삶\' 혹은 \'인정받는 삶\'으로 바꿔지고 있다고 합니다. 진실한 사랑이 존경받는 삶이나 인정받는 삶으로 바꿔지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 변화는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라는 말속에는 헌신과 희생이 전제된 타인 중심의 삶을 얘기하고 있지만, 존경받는 삶이나 인정받는 삶이라는 말속에는 \'나\'라고 하는 자기 중심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ENCOUNTER의 만남 우리는 하루에도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영어 표현으로 만남을 몇 가지 다른 단어로 표현합니다. 공식적인 만남은 MEET, 안부를 묻는 만남은 SEE, 시간 약속을 정한 만남은 APPOINT 그런데 흔하게 쓰이지는 않지만, ENCOUNTER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흔히, 복싱에서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쳐서 다운시키는 한방을 COUNTER PUNCH라고 말합니다. 우연한 만남이지만, 내 삶에 어떤 결정적인 영향을 가져다 주는 만남을 ENCOUNTER라고 합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 말씀은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라는 사람과 유대인 베드로가 서로 만나는 얘기입니다. 이 만남은 보통의 만남이 아니라 교회 역사의 흐름을 바꾼 ENCOUNTER의 만남이었습니다. 백부장이라고 하는 말은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군대의 직책을 말하지만, 그 당시로 말하면 한 도시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지역 사령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고넬료 백부장과 베드로가 서로 만나는 게 뭐 그리 중요해서 오늘 사도행전 10장 전체에 걸쳐서 그리고 11장 중간부분까지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여러분 무엇 때문에 이 얘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당시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할례 받은 유대 백성들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모세 율법의 중심 가르침이었고 예수님을 따랐던 12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믿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에 대한 전도라든가 이방 여인들을 고쳐준 사실을 통해서 이방인 구원에 대한 문을 열어 논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께서도 나는 유대인의 구원만을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있어서 이방인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막혀 있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는 관념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흔히 생각할 때 하얀 색깔은 선한 것을 나타내고 검은 것은 악한 것을 나타낸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면 천사는 언제나 하얀색으로 악마는 언제나 검은색으로 그립니다. 이 색깔에 대한 흑백관념이 자연스럽게 백인은 선하고 흑인은 악하다는 관념을 만들어 냅니다. 미국에 살면 우리 한인들이 흑인을 검둥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상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자라온 그 환경과 관습에 사로잡혀 있고 자기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자기 경험과 다른 일들이 행해질 때, 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비판하고 배척하게 됩니다. 더구나 신앙에 있어서는 이 배척하는 정도는 훨씬 심합니다. 세상적인 일로 다투고 화해하는 일은 많아도 신앙문제로 갈라진 사람들이 화해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모두 하느님의 이름으로 싸우기에 의견이 다른 상대방을 단지 의견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를 않고 나는 하느님 편에 서있는데 저 사람은 하느님을 반대하는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언제나 남을 판단하는 일에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예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남이 말할 때, 자꾸 말을 막고 앞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중간에서 가로채는 버릇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를 저지르기 쉬운 사람이라고 하는 판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왜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이 중요했느냐? 하면 이 만남은 그 당시의 관념과 판단으로는 이 두 사람은 만날 수도 없고 또 만나서도 안 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넬료는 유대나라를 지배하는 로마의 그 지역 최고 사령관입니다. 베드로는 그 당시로 본다면 저 촌구석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출신입니다. 게다가 그는 예수를 쫓아다니던 사람들 가운데 우두머리였는데, 예수라는 사람은 그 당시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회를 어지럽히고 군중을 선동한다고 해서 로마의 가장 극형인 십자가 형벌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 당시의 사회 정치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 두 사람은 양극단 끝에 서 있던 사람입니다. 또 제가 아까 인간은 모두 관념의 포로라는 말을 했습니다만, 관념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두 사람은 결코 만나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습니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간다고 하는 것은 율법이 금하는 일이었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오늘 이루어졌습니다. 어떻게 이루어 졌습니까? 성령의 중재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성령의 중재로 이루어진 신앙의 만남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위험한 혁명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여기에 오늘 말씀의 중심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고넬료의 경건 먼저 우리는 고벨료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2절에 고넬료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경건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경건하다고 말합니까? 흔히 경건하다고 하면 말이나 행동에 전혀 책 받을 일을 하지 않고 얼굴은 언제나 무표정하여 근엄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는 전혀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고넬료를 경건하다고 말합니까? 첫째 온 집으로 더불어 하느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온 집으로 더불어 라는 말은 가정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경건은 모양이 아닙니다. 내적인 모습입니다. 고넬료가 경건하다는 이유의 가장 첫 번째는 그가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정예배는 매우 중요합니다. 가정에서부터 찬송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가정이 내 믿음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사람 앞에서 내 믿음이 훌륭하다고 인정받는다 할지라도 내 배우자에게서 인정받지 못하고 내 자녀에게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내 믿음은 반쪽 짜리 믿음이요 어쩌면 이중적이고 형식적이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미워하셨던 외식적인 믿음입니다. 여러분 하느님 앞에 인정받기 위해서 먼저 가정 예배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가정의 믿음을 세웠던 고넬료는 두 번째로 구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우리가 돈을 버는 것은 쌓아놓기 위함이 아니라 나누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쓰이기 위함입니다. 고넬료의 삶은 타인을 전제로 한 공동체적인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고넬료는 하느님께 항상 기도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느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기도는 언제나 가정과 이웃이 초점이 되어 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고넬료라면 어떤 기도를 하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하느님의 말씀, 곧 설교 듣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으로서 그는 유대인 회당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유대인 선생을 초대해도 거절을 합니다. 기도하고 구제하는 일에 열심이었지만. 그는 말씀을 듣는 기회가 없었고 이방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는 구원의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하늘로부터 한 소리를 듣게 됩니다. \'고넬료야 고넬료야 너의 기도와 구제가 하늘에 상달되었다. 근처 욥바에 하느님의 사람 베드로가 와 있으니 그를 청하거라.\' 그래서 사람을 보냅니다. 그 다음날 베드로가 욥바의 교인 집에 심방 차 왔다가 혼자 기도하는 가운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더러운 짐승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음성이 들리기를 그것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주님 이것들은 율법이 정한바 먹어서는 안 되는 더러운 짐승입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때 또 음성이 들립니다. \'하느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런 환상이 세 번 반복됩니다. 성경에서 세 번은 번복할 수 없는 확실성을 말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환상이 무슨 의미일까 하고 궁금해하던 차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오게 됩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그 환상이 바로 더럽다고 칭하는 이방인들을 하느님께서 깨끗케 하셨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은 말씀이 34절과 35절에 \"내가 참으로 하느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느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우리가 살면서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입니다. 제가 지난 4월 한달 간 모스크바에 체류하였습니다. 여행차 인근 도시에 들려 안내자와 함께 약간 고급스러운 식당을 들어가려고 하는데 제가 잠바를 입었다고 해서 입장을 거절당했습니다. 그쪽 사람들 생각으로는 정장 코트를 입지 않고 잠바를 입은 사람들은 별로 품행이 좋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미국서 온 목사라고 항의를 해 보았자 들은 채도 하지 않습니다. 화가 치밀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미국 같았으면 인종차별이라고 고소라도 하겠지만, 별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외모의 모습으로 인한 잘못된 선입관과 편견 때문에 차별을 당할 때도 많이 있고 또 차별을 할 때도 있습니다. 1960년대 미국 흑인들의 민권운동에 앞장섰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의 저 유명한 \'I have a dream\'이라고 하는 워싱턴 광장에서의 유명한 연설 가운데, \'나는 꿈이 있습니다. 내 자녀들이 피부 색깔로 판단 받지 아니하고 그가 가진 내적인 능력으로 판단 받는 그 날이 올 것을....\' 미국에 살면 우리가 동양인으로 차별을 받을 때도 있지만, 또 가끔 흑인이나 멕시칸들을 인종 차별하는 얘기들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단지 외모의 차이 때문에 차별 받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영국의 메리 여왕은 가끔 왕궁을 빠져 나와 백성들의 사는 모습을 시찰하였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다녀 누가 보더라도 시골서 갓 올라온 아낙네로 보였습니다. 어느 날 시찰을 나왔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졌습니다. 가까운 가게에 들려 우산을 빌렸는데, 이 주인이 이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고 좋은 우산이 있음에도 거의 못쓰게된 우산을 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왕실의 으리으리한 마차가 이 가게 앞에 섰습니다. 예복을 입은 한 신하가 그 우산을 돌려주며 \'여왕 폐하께서 우산을 잘 써서 고맙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사람을 볼 때, 외모보다는 내면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화려한 옷 내면에 감추어진 굶주린 영혼을 볼 줄 알아야 하고 수수한 옷차림 안에 감추어진 넉넉한 인간상을 가려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자신부터 먼저 내면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 내면의 힘을 다른 말로 영성이라고 합니다. 이 영성은 기도와 말씀으로 키울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과 더불어 단 둘이 기도하는 시간을 자주 갖게 될 때,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내면의 힘을 얻게 됩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조용히 읽어 나갈 때, 내가 누구인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은 외부로부터의 간섭과 유혹으로 자주 흔들립니다.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러 올릴 때, 바가지에 가득 찬 물이 흔들려 밖으로 다 흘려 보내게 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내 마음과 영혼에 평화를 유지하지 못하면 그 모든 것들은 그저 구멍 뚫린 전대 주머니와 같이 솔솔 다 빠져나가고 맙니다. 열심히 쓸어 담긴 했는데, 막상 전대 주머니를 열어보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인생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도둑은 다 지식인들입니다. 이 지식을 조절할 수 있는 또 다른 영성의 능력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있는 우리 선조들은 깊은 우물에서 물을 끌어올릴 때는 바가지 속에 미리 나무 막대기를 하나 넣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하면, 끌어올리는 동안 물의 흔들림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가 있습니다. 내 마음의 소용돌이를 잠재울 수 있는 조그마한 막대기, 이것이 영성이고 이 영성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얻어 집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을 이기는 힘을 하느님께로부터 얻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한 가운데 은밀한 것을 보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고요와 조용함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있을 만큼 그 마음이 순결하고 손이 깨끗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루에 30분이라도 그분과 함께 문을 닫고 있게 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혁명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물 위를 걸으려거든 배에서 내리라 영성의 사람 베드로와 고넬료가 성령의 중재로 서로 만납니다. 외모를 넘어 내면이 서로 만납니다. 두 사람 다 그 당시로는 불가능했던 벽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다음 장을 보면 이 만남으로 베드로는 복음의 동지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갔느냐? 왜 우리가 지켜오는 율법을 어겼느냐?.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의 법이라 하더라도 하위법이 있고 상위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구별된 사람으로 세상 사람과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옳은 말입니다. 성경에도 이에 상응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에 있어 하위법입니다. 보다 높은 상위법은 세상 사람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에게 나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향한 그 비판을 감지하면서도 성령에 순종하여 고넬료를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전했습니다. 36절 이하에 그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화평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졌다고 말합니다. 죄인 된 인간이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나아갈 길이 열렸다. 사람들은 예수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그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모습을 보았다. 나는 지금 산 자와 죽은 자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전한다. 고넬료여, 이 예수님을 그대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겠는가? 고넬료는 분명히 \'예\'라고 답을 합니다. 여러분 고넬료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우리가 오늘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는 천지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는 로마의 장교입니다. 그 당시는 우상이 범람했고,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고백한다고 하는 말은 곧 그가 가진 모든 세상 명예와 권력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출세를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그는 숨어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가족들과 친구들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 일로 많은 불이익을 당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말은 이와 같이 자기가 쌓아 올린 그 세상에서 내려오는 것을 말합니다. 단지 물질과 명예로부터의 자유함 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 관념으로부터도 자유하여야 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나를 꺾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내 자존심 때문에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이룬 업적 때문에 포기하지 못한 채 이중적인 믿음을 갖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물 위를 걷기를 소원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자기도 걷고 싶다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 저도 예수님과 같이 물 위를 걷고 싶습니다.\' \'그래 걸으라.\' 그때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물론, 그가 물 위를 걸으면서 예수님에 대한 시선을 놓치고 그만 파도치는 물결을 바라봄으로 물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지만, 그는 잠시동안 물 위를 걸었습니다. 많은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 파도 속에서 물 위를 걷는 믿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배 안에 앉아 있으면서 걷기를 원합니다. 물 위를 걸으려면 배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자기가 쌓아놓은 관념과 생각과 판단과 습관과 전통에서 나와야 합니다. 자기가 안전하다고 만들어 놓은 안전지대, comfort zone, 기득권과 자기 보금자리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떻게 나오지 않고 걸을 수가 있습니까? 고넬료가 어떻게 자기 세상 것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영생과 부활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베드로가 자기가 믿고 주장해왔던 그 관념을 깨뜨리고 성령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첫 번째 업적이 없이 어찌 복음이 유대땅 밖으로 나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 이방인 복음은 사도 바울이 가장 중요한 일을 하였지만, 그러나 그 첫 번째 관문은 베드로가 깨뜨렸습니다. 향린의 희년을 향하여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인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까?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이 좀 더 모험적인 인생을 살고 싶다. 너무 안전한 삶을 추구한 것이 후회스럽다는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단 한번 삽니다. 저는 그 인생을 남이 해보지 않은 일들을 개척의 정신을 갖고 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처음 예수님을 따랐던 첫 성도들의 살아있는 정신입니다. 승리를 목표로 하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실패는 안전을 추구하다가 시도하지 않는 것이 실패입니다. 오래 전에 어떤 선교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 교인들은 열은 있지만 빛은 없다고. 마치 압구정동이나 명동을 걸어본 외국인들이 한국은 유행은 있지만 패션은 없다. 생각 있는 많은 분들이 한국 교회의 장래를 염려합니다. 지금까지는 교회가 한국 민족 역사에 있어 위대한 공헌을 했지만, 현재에 있어 한국교회는 골칫거리가 되어가고 있다고. 저는 오늘 향린교회 48주년을 맞이하는 예배에 참여하면서, 향린의 희년 50년을 바라봅니다. 시작이 그러하였듯이 향린교회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앞서가는 교회입니다. 아무도 밟아 보지 않는 미지의 땅에 발자국을 남기는 교회입니다. 가시밭길을 헤치고 새로운 길을 만드는 교회입니다. 새로운 길을 만드는 개척자는 언제나 아픔이 있고 고난이 있습니다. 향린의 희년을 향하여 다시 한번 비상하십시다. 혜화동에 있는 동숭아트 영화관에 들어갔더니 한 홀에 좌석이 147개가 있는데, 이 147개에는 네티즌들이 뽑은 유명인사들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영화배우 가수에서부터 대통령 종교인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전 목사라 혹시 목사 가운데 누가 있는가 했더니 개신교를 대표해서 문익환 목사님 이름이 있었습니다. 낮 시간이라 좌석이 많이 비어 있어서, 영화를 보면서 그 문 목사님 자리에 앉았습니다. 앞자리인데다 약간은 구석이라 영화보기에는 썩 좋은 자리는 아니었지만, 앉았습니다. 그러면서 다시금 우리 한국교회가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록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한다 할지라도 독수리의 날개 짓을 멈추지 맙시다. 하느님의 일에는 사실 실패라는 말이 없습니다. 저는 바라기는 오늘 48주년을 맞이하는 향린교회가 희년이 되는 2003년에는 분명히 우리 모든 민족이 바라는 참 희년,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이 최소한 20%는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말한 대로 교회에 가면 교인이 많이 있지만, 길거리에서는 보기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20%의 20% 그리고 또 20% 아니 여기의 20%인 곧 천 7백25명 가운데 한 명이라도 진정 오늘의 베드로와 고넬료와 같이 자기를 이기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민족은 세계 역사에 분명한 획을 긋는 자랑스러운 민족이 될 것입니다. 남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저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 향린인만이라도 정말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서울의 거리가 달라질 것을 믿습니다. 폴 투르니에가 말한대로 \'인생은 하느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발을 배 밖으로 내 딛으시기 바랍니다. 2주전에 5.18 광주 민주항쟁 묘지를 방문하였습니다. 그중 한 분의 비문에 이런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여기 한 알의 씨알로 따사로운 봄볕을 향하던 열정. 언제나 기다림과 체념을 버리고 열정과 함께 정의의 기치아래 빛났다 80년대 한밭 볕에서 민주화 운동의 꽃이 되어 불꽃처럼 산화한 그대 이제 그대는 갔어도 그 씨알 푸른 보석처럼 빛남은 역사는 길이 길이 기억하리라.\' 기도하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