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년의 기쁨을 온누리에 롬15:22-33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것은 주후 57년경이었습니다. 바울은 세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을 하였는데, 이 편지는 3차 전도 여행의 끝무렵에 쓰여진 것입니다.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로부터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보낼 구제금을 받아,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줌으로써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은 끝을 맺게 됩니다. 그런데 그 구제금을 받아 잠시 고린도에 머물면서 이 편지를 쓴 것이지요. 그리고 이 편지는 16장 1절에 나오는 뵈뵈라는 이름의 여신도에 의해 로마 교회에 전해졌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함으로 3차 전도 여행을 끝맺고, 이어서 4차 전도 여행의 계획을 이미 세워놓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로, 로마에서 스페인으로의 일정이었습니다. 스페인은 지난 번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렸던 나라이지요. 당시의 사람들은 스페인을 문명세계의 서쪽 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동쪽 지방의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는데, 더 이상 그 지역에서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제 4차 전도 여행에서는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을 온몸으로 따르는 바울의 숭고한 삶을 \'스페인\'이라는 말 한마디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4차 전도 여행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까지는 무사히 도착하여 구제금을 전해줌으로써 3차 전도 여행은 무난히 마쳤지만, 거기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왔습니다. 바울의 이때의 구금 기간을 약 5년 가까운 정도로 생각하고 있고, 바울이 순교를 당한 것은 확실하지만, 그 장소나 구체적 시기 그리고 직접적 원인 등에 대해서는 확실치가 않습니다. 곧 로마 감옥에서 옥사를 했는지, 옥살이를 마치고 나와서 병으로 죽었는지, 혹은 얼마나 더 전도 활동을 하였는지 등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어쨌거나 바울이 로마 교회에 그토록 오고 싶어 했는데, 전도자로서 오지는 못했지만, 대신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왔습니다. 스페인 땅끝까지 주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바울의 꿈이 직접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뜨거운 복음 전도의 열정은 바울의 순교 이후에도 계속 활활 타올라 스페인을 넘고 넘어 이곳 한국에 까지 이르렀고, 마침내 오늘 이 자리에 않아 있는 우리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하여져서 우리들에게 구원의 감격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실제적으로는 바울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고, 그 꿈을 이뤄주신 하나님의 경륜이 신비롭고 놀라웁기만 합니다. 이상이 오늘 본문 22절에서 29절까지 이야기의 배경이고 또 이후의 역사 전개 과정을 설명드린 것입니다. 이렇듯 바울은 자신의 3차 전도 여행의 마무리 과정과 4차 전도 여행의 계획을 설명한 후에,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유대의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해를 받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고, 둘째는 예루살렘으로 가져 가는 구제금이 무사히 전달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고, 세째는 4차 전도 여행에서 로마 교인들과 만나 쉬면서 기쁨의 시간을 갖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세번째 기도 제목은 조금 낭만적이지요? 그토록 치열한 전도자였지만 한편 때로는 즐거운 쉼의 시간을 갖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었고, 또한 그것을 기도 제목으로 뽑아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 부탁을 할 정도입니다. 바울의 솔직하고 훈훈한 인간적인 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구제금은 무사히 전달되었지만, 첫번째와 세번째의 기도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닥칠 해를 미리 예상하고 기도의 소원으로 꼽았지만,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고 예상대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로마 교인들에게 가서 그들과 함께 즐겁게 쉬고 싶었지만, 결과는 감옥에 갖힌 신분으로 로마 교인들을 만날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바울의 기도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일까요?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32절의 \'하나님의 뜻을 따라\'라는 말을 주목해 봅니다. 바울이 세가지 기도 제목을 잡되, \'하나님의 뜻 안에서\'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울의 기도 소원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지요. 바울이 해받지 않음을 원하는 궁극적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기 위해서였습니다. 해를 입어서 복음을 못전할까봐 그런 기도 제목을 정한 것이었는데, 비록 체포는 되었지만 그 상태에서도 계속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더나아가 그의 죽음 이후에도 바울의 복음을 전하는 행위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이 바울의 말씀으로 설교를 듣는 것이, 바로 그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울의 첫번째 기도 제목은 이루어졌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하여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세번째 기도 제목인 로마 교인들과 자유의 신분으로 만나 즐겁게 쉬고 싶다는 것이, 육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지만, 영적으로는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 이후 오늘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저 하늘 나라에서 로마 교인들과 더불어 참 기쁨의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와 관련하여 꼭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합심기도의 문제입니다. 혼자서 기도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여럿이서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기도 소원을 로마 교인들에게 말하면서, 합심하여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의례적인 부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바울이 여러번 합심 기도의 중요성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18:1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혼자보다는 두 사람이면 좋고, 그 숫자가 많으면 더 좋은 것입니다. 합심 기도를 하려면 다른 사람들이 그 기도 제목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기도 제목을 안고 혼자서 끙끙 앓고 있지 말고 공개하여, 다른 사람에게 합심 기도를 부탁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다른 욕심을 내어서는 안되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기도를 받는 욕심은 내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 입구에 기도 요청서가 있으니 목회자 개인에게 기도를 부탁해도 좋고, 더나아가 합심 기도를 요청하면 더 좋습니다. 수요 예배 때, 자신의 기도 제목이나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 제목을 합심해서 기도하자고 요청해야 합니다. 신앙생활나눔 시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시간은 얼마나 좋은 기도 환경을 갖추고 있습니까? 생활나눔만 하고 끝나면 절대 안됩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기만 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살아가는 내용을 알아 내고, 거기 무슨 문제가 있으면 함께 합심하여 기도해 줄 때 공동체는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 아닙니까?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쉽고도 또한 가장 힘있는 사랑이 바로 합심 기도인 것입니다. 앞으로는 신앙생활나눔시간의 2/3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데 할애하고, 나머지 1/3은 합심 기도 시간으로 꼭 할애하시기 바랍니다. \'생활나눔\'이라고 불렀던 것을 \'신앙생활나눔\'으로 바꾸어 부르게 된 데에는, 합심 기도의 시간을 꼭 넣자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올해는 우리 민족의 희년의 해입니다. 남과 북이 통일되는 의미에서의 희년이기도 하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여러가지 문제들이 말끔이 씻기워지는 의미에서의 희년이기도 합니다. 희년이 시작되는 이 아침에 우리는 두가지를 꼭 결심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는 바울과 같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열정을 갖는 일입니다. 단순히 물리적인 남북 통일은 의미가 없습니다. 작년 이맘때 옛 동독 교회의 부르카르트 형제가 보내온 편지를 보아도 그것은 자명합니다. 독일이 통일된 지 4년이 지났지만, 초기의 그 감격은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아름다운 환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상대방을 서로 생각해 주는 마음은 확실히 사라져 버렸고, 공격적인 태도와 폭력의 가능성만이 커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식구조차도 서로에게 할애하는 시간이 없고, 이야기 할 것도 별로 없다고 합니다. 모두가 각자의 길을 갈 뿐이고, 옛날의 우정은 이제는 흩어져 버렸다고 전해왔습니다. 예멘이라는 나라가 통일되었지만 곧 다시 갈라지고 말았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서로에 대한 용서와 양보가 없는 통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남과 북은 서로 우위를 확보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굴종을 바라고 있습니다. 서로 통일을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통일은 통일이 아닙니다. 용서와 양보는 기독교 복음의 가장 소중한 가치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통일이라는 민족적 대과제 앞에서 기독교 복음의 문제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용서와 양보의 자세를 확립하게 되면 저절로 통일이 되는 겁니다. 내가 더 많은 잘못을 했어, 그리고 네가 지은 잘못은 용서할께, 서로 이런 식으로 만날 때 통일이 안된다면 그건 기적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을 가장 으뜸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이제 이웃을 무조건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가치관을 먼저 확립하고 남북의 문제를 대하게 되면, 통일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래서 이 희년의 아침에 복음을 전하는 열정을 결단하자는 겁니다. 희년의 과제와 복음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이치를 명확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희년이라는 말 자체가 성서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제도 자체를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 아닙니까? 희년이 시작되는 이 아침에 우리가 결심해야할 두번째 문제는 합심 기도를 생활화하는 일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함에도 합심 기도로 시작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상대방을 용서하는 일에도 합심 기도로 시작하여야 합니다.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일에도 합심 기도로 시작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재작년에 2청년회에서 \'따로 또 같이\'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였습니다. 둘씩 짝을 지어 만나서 데이트를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취지는 좋았습니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나눔을 하고 기도하지 않는 것과 같은 방법이었습니다. 올해 전 교회적으로 \'따로 또 같이\' 프로그램을 다시 마련했으면 합니다. 다만 방법에 있어서 다방이나 술집에서 만나는 식이 아니라, 기도할 수 있는 공간에서 만나는 겁니다. 모두가 기도 파트너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나눔 시간이나 수요 예배 시간, 그리고 제자대학과 성경공부 시간을 통해 늘 합심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심지어는 회의 시간에도 합심 기도하는 시간을 꼭 갖는 겁니다. 각자 개인의 문제를 위해 서로 합심하여 기도해 주고, 공동체의 문제를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고, 민족의 통일과 민중의 복된 삶을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의 암행어사로서의 전도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기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부부간에도 가정의 문제를 놓고 합심하여 기도하고, 자취방에서도 서로 합심하여 기도하는 틀을 마련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거룩한 희년의 해를 자신의 문제에 갖혀 비실비실 1년 365일을 보내서는 절대로 안되겠습니다. 이웃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민족이 신음하고 있는데도 외면하는 1년 365일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되겠습니다. 자신의 결혼이나 진로 준비를 위한 시간에 모든 것을 투자하여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귀중한 희년을 그런 식으로 마감한다면, 훗날 하나님과 역사가 심판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들 인생 여정에 있어서 가장 높은 신앙 성장을 이루어 내고, 우리들 인생 여정에 있어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우리들 인생 여정에 있어서 가장 이웃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그래서 우리의 인생 여정에 있어서 가장 보람된 1995년 희년의 해를 보내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총이 그러한 희년의 삶을 결단하는 여러분들에게 올 한해 가득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