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왜?
막2:1-12





장애인 주일 기도문(심재석 형제)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거룩하신 말씀과 은혜를 받고자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에게 성령이 충만케 하시고 ,
주 안에 하나되어 예배케 하심을 감사드리며 ,
언제나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항상 지켜봐주시고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붙잡아주시는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무지를 깨닫게 하시고
나아가 진리를 깨닫게 하시어 보다 성숙한 아버지의
자녀 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몸이신 조은교회가 아버지의 자녀가 아닌 이들을
인도하여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의 무거운 죄와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게하시고 , 그들의 무너짐을 다시 세우시고 ,
그들의 넘어짐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구원의 능력을
경험케 하시는 주님의 뜨거운 몸되게 해주시옵소서

장애주간을 맞아 아버지께 간구하오니
일반인들이 저희의 말을 듣게 하지마시고
저희의 몸짓을 보게 하지 마시고
오직, 저희의 마음을 듣게 하시고
저희의 마음을 보게하시여
서로 교감하며 이해하여 어우러져 하나되게 해주시옵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일반적으로 장애인이라고 하면 사회적인 약자로 인식이 된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어려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마치 장애인은 하나님의 실패작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통념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장애인으로 태어나거나 장애인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장애인들이 장애를 입게 되면 적지 않은 절망과 고통가운데 빠지게 된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또한 장애인의 90%이상이 중도장애인이다.
장애를 입은 당사자는 장애를 입은 후에 자신이 신체의 일부 또는 전부를 사용할 수 없다는 충격 때문에 수없이 자살을 결심하고, 수없이 악몽에 시달리는 고통을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있는 생활을 해 나가는 장애인들은 이러한 절망감을 극복하고 일어선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 역시 극히 일부분이다.
그 외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술에 찌들어서 술기운으로 살고 있거나 아니면 삶을 포기하고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자신의 장애를 이용해서 부당이득을 취하거나 다른장애인들을 괴롭히는 재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장애인의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다.

오늘 본문에는 전신마비 장애를 입은 한 사람이 나온다.
사람들은 흥미있게 바라보는데 예수님이 충격적인 한마디를 하신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혼란스러워진다.
그리고 많은 질문들을 퍼붓게 된다.
오늘 이 질문들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장애인을 향한 뜻을 알아보자.

1. 왜 인간은 장애를 입어야 하는가? - (3-4)
이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몇가지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왜 귀찮게 장애인을 데리고 왔느냐는 반응.
그리고 어쩌다가 저런 신세가 되었냐는 측은함을 보일 것이다.
오늘날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도 천차만별이다.
예전에는 장애인을 보면 피하거나 뒤로 돌아가는것이 보통의 모습이다. 심지어 아이들은 돌을 던지고 도망갔다.

내가 어릴적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온갖 좋지 않은 소문들이 무성했다. 장애인 체험을 하느라고 휠체어를 타고 시내를 나가게 하면 사람들은 여전히 이상하게 보거나 심지어 \\\\\\\\\\\\\\\"아침부터 재수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럴때면 왜 인간은 장애를 입게 되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구약성경에는 인간을 나타내는 말로 \\\\\\\\\\\\\\\'아담\\\\\\\\\\\\\\\'이라는 명사 외에 \\\\\\\\\\\\\\\'에노스\\\\\\\\\\\\\\\'라는 명사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에노스\\\\\\\\\\\\\\\'는 히브리어로 인간의 나약함을 말할 때 많이 사용된다.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은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이미 연약한 존재로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끔 하셨다.
그리고, 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을 희생하실 만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연약하기를 원하신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연약한 존재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의가 그곳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고후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후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연약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사도바울은 고후4:7을 통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인간을 질그릇으로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어쩌다가 연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연약해 져야만 하는 의무감조차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은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아주 유리한 조건을 갖춘 셈이 되는 것이다.

유대교 사회에서 장애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있었다.
그래서 장애인을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존재로 낙인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장애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치유하셨던 사실을 볼 수 있다.

본문의 장애인 역시 친구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감히 유대인들이 밀집한 곳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취급해 주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저지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우리 인간들이 이미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장애의 보편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장애인을 여러가지로 정의하지만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신체적, 정신적으로 그 기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일상생활에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장애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 장애인이다 아니다를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한 것이다.
심한 비약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도 장애신이셨다.
온전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면서 제한된 인간의 몸으로 이세상에 오시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핍박과, 조롱과, 멸시와 천대, 배반과 능욕을 당하신 예수님 역시 장애인이시다.

좀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과 특히 모든 장애인의 심정을 너무나 정확하게 이해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주님이 우리의 위로가 되어주시고 구원자가 되신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롬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인간은 왜 장애를 입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는 \\\\\\\\\\\\\\\"인간은 연약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대답이다.

2. 왜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가? - (5)
중풍병자가 지붕을 뜯고 내려 온 것만이 충격이 아니다.
정말로 충격이 된 것은 예수님의 \\\\\\\\\\\\\\\"죄사함을 받았다.\\\\\\\\\\\\\\\"는 선포였다.
우선 예수님을 하나님 자신으로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죄사하는 권세는 하나님에게만 있는데 어떻게 예수라는 사람이 죄사함을 선포하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장애인 본인에게는 예수님의 이러한 선포가 치유를 이루어냈다.

여기서 자칫 예수님이 병든 것과 죄를 연결시켜서 마치 죄가 병듦의 원인인 것으로 인정하시는것처럼 보여지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기본적으로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당시 유대교 사회는 자신들의 정결 의식 때문에 장애를 입으면 무조건 하나님의 저주가 내린 것이나 심각한 죄의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라는 생각 뿐이었다.
그래서 장애를 입었다는 사실 자체가 \\\\\\\\\\\\\\\'죄인\\\\\\\\\\\\\\\'이라는 낙인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사함의 선포를 통해 이 사람의 이러한 내면적 장애를 먼저 치유하신 것이다.
사회적으로 받는 고통을 제거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많은 사건들이 장애인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신구약 전체를 볼 때 장애인에 관한 기록이 구약에 89회, 신약에 74회로 총 163회가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를 꼽으라면
창32:31 야곱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진 야곱
삿3장의 왼손잡이로 표현된 사사 에훗-원어로 오른손이 제구실을 못하는 사람
삿16:21의 여인에게 유혹당하여 실명하게된 삼손,
삼하4:4 피난길에 유모에 의하여 떨어져 지체장애를 입은 므비보셋,
신약에 육체의 가시로 표현된 장애를 가진 바울과 예수님을 만난 많은 장애인들이 있다.

장애의 원인은 다양하다.
죄의 결과이기도 하고, 실수이기도 하고, 원인을 알 수 없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장애인들의 큰 특징은 모두가 하나님의 일에 사용된 도구였다는 사실이다.

요 9:1-12
9: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장애인의 눈을 밝게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은 바리새인들이 그사람을 불러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세우려고 한다.
많은 논쟁이 오가다가 통쾌하게 증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9:32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장애인을 사용하시는 장면이다.
다른 말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마9: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31)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

막7:36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하였도다 청각장애인도 듣게 하고 언어장애인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했지만 성령께서 사도들을 사용하셔서 교회의 확장을 가져오게 되었기 때문에 성령행전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도들이 성령의 힘을 입어 가는 곳마다 행한 이적은 바로 장애인을 고치는 사건을 통한 것이었다.
5장에서는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장애인을 고치고, 8장7절에는 빌립이 중풍병자를 고치고, 9장에는 베드로가 중풍병자를 고쳤으며, 14장에는 바울이 나면서 지체장애인 된 사람을 고쳤다.

이러한 사건들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복음을 전도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어 주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장애인을 통하여 사역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로서는 장애인은 사회적으로 약자였고, 죄인이나 다름없이 취급당했고,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성령께서 고쳐주심으로 인해 복음이 들어가기 어려운 이방나라의 사람들의 마음을 열수 있게 되는 훌륭한 매개체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은 장애인들이 어떻게 쓰임받아야 하는가?
장애인들은 장애인을 전도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은 유대교 사회처럼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나쁘지 않다.
누구든 장애인을 도와주려 한다.
그러나 장애인을 선교의 대상으로 여기고, 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는 교회는 없다.
오히려 이단에서 장애인을 전도하기 위해 수화를 배우고 점자를 배우는 열정을 보인다.
그래서 장애인들이 이단에 빠져든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절박한 현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장애인들에게 복음전할 생각을 못하고 있다.
장애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사람은 바로 장애인이다.
선교에 있어서 현지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들은 현지인으로 구성된 교회를 세운다.
그래서 그 현지인들이 복음을 전하도록 만든다.

마찬가지로 장애인들은 장애인에게 마음을 쉽게 연다.
그럴 때 복음이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장애인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세우도록 부르심을 받은 교회가 장애인이라는 단어조차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역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왜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가? - 장애인은 복음전도의 도구이다.

3. 왜 장애인은 치유되어야 하는가? -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장애인을 존재하게 하신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회복에 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회복을 위해 이땅에 오셨다.
그리고 회복의 가장 좋은 모델로 장애인을 사용하셨다.
그래서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는 것을 보고 회복을 전파하려고 하셨다.
이것은 이사야에 이미 예언된 말씀이다.

누가복음에 침례 요한이 옥에서 사람들을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이사야 61:1-2절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대답하셨다.

눅7:2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맹인이 보며 하지마비장애인이 걸으며 한센병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농아인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회복되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장애인들을 고치심으로 하늘나라의 복음과 회복의 사역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셨던 것이다.
당시에는 영상매체가 없었다.
그러므로 몸으로, 현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시청각 자료였던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음란한 여인처럼 배반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음녀, 즉 창녀를 아내로 삼고 아내가 바람피고, 도망가면 괴로워하며 아내를 찾아다니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다.

우리 장애인들도 찌그러지고 어그러진 이 세대 속에 장애인의 모습으로 살게 하시면서 이 세대를 대변하게 하시고,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회복시켜주심으로 세상을 향해 구원과 회복을 외치시는 것이다.

장애인들은 호세아와 같은 선지자로 하나님이 여기신다.
그러므로 신체의 장애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극복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날마다 행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영광과 회복이 우리 장애인의 모습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예수님의 관심은 장애인을 치유하는것 자체에 의미를 두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전파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17장에 예수님께서 열 명의 한센씨병자들을 고쳐주신 사건이 나온다 열명을 고치셨는데 그 중 사마리아인 1명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로 돌아왔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눅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신체적 치유에만 관심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구원을 원하신것을 알 수 있다.
19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신다.

눅 14장 12절부터는 하늘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갈 대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있어서는 장애인이 결코 약자도 아니요, 가난한자도 아니다.
눅 13:10절 이하에 나오는 18년간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말씀하신것은 예수님께서 허리가 꼬부라진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오기 위해 지붕을 뜯어서 달아내린 친구들처럼 장애인과 함께 삶을 나누고 천국에 함께 들어갈 동반자로서의 형제와 자매가 되어준다면 더이상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분이 없어지고, 엡3:19절에서 말하는 동일한 천국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 즉, 가족이 될 수 있다.

성경에서 복음과 교회에 있어서 장애인은 중요한 핵심적인 요소이며, 차별이나 구별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동등한 인격체로 존재한다.

오늘날 역시 교회와 사회 안에서 우리 장애인들은 더 이상 약자의 모습으로 존재할 것이 아니라 복음전파와 봉사에 있어서 주도적인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애인의 모습이며, 교회의 올바른 모습이다.
이제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인격체로 인정받도록 해야 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요, 선지자요, 대변자로서 우리의 직무를 감당해야 한다.

요한복음 9:3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장애인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이 땅에 살아야할 책임이 있다.
이것은 장애인이 되었으니 그렇게 위로받고 살라는 수동적인 말씀이 아니라 이 시대의 복음을 위해 앞장서서 하늘나라의 회복을 외치는 선지자로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행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왜 장애인은 치유되어야 하는가? - 회복시켜주시기 위함이다.

결론

출4: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언어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이나 정안인이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장애인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이다.
그러므로 장애인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 장애인을 보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시각이다.
이제 장애는 더이상 죄의 결과도 아니요 차별의 대상도 아니다.
오히려 장애인을 본받는 사회가 되도록 교회가 앞장서야 하며, 장애인 선교를 위해 일하는 장애인 사역자를 만드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장애인을 하나님의 회복과 복음전도의 도구로 삼아서 이 세상을 회복하는 도구로 사용되게 하는 사명을 오늘날 우리가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