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기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것은 강한 유대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십자가 안에서의 자유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유대주의의 전통을 주장하는 자들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강한 율법주의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사도바울은 1,2,3차 전도여행을 통해 매번 갈라디아를 들러 전도했기 때문에 이들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갈라디아 유대인들은 왜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또는 복음을 들은 유대인조차 ‘십자가의 도’ 전하는 것을 꺼려 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경우, 핍박을 받게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차라리 구약의 전통속에서 그들이 수천년을 지켜오던 관습을 따르는 편이 안전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기때문에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모든 사람의 죄문제를 해결했다는 사실은 받아 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바울은 과감히 붓을 들었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친필로 쓰는 큰 글씨를 보라고 6장 11절에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바울은 얼마전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낼때만큼 마음이 안타깝거나 착잡하지는 않았다. 고린도 사람들은 참으로 말도 많고 기본이 돼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아예 그들로부터 어떤 재정적인 후원도 받지 않기로 했었다. 그래도 갈라디아 사람들은 율법에서 자유를 얻게된다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핵심적인 내용만 간추려서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율법주의의 잘못을 지적하고 십자가에 나타난 구원의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왜 율법주의가 잘못되었는가? 가말리엘의 제자로 율법에 통달했던 바울에게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단 한구절의 말씀만으로도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그것은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저주가 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신명기 27장 26절의 말씀이었다.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Cursed is the man who does not uphold the words of this law by carrying them out.\" Then all the people shall say, \"Amen!\"-NIV)
바울은 가말리엘로부터 구약을 배울 때 히브리어 ‘쿰’과 ‘아싸’라는 단어가 여러 의미를 나타내고 있었지만 신명기의 이 말씀은 분명 모든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의미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당대 가장 율법을 잘 지킨 사람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실천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임을 어떤 사람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증거가 바로 자신이었다.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먼저 바울은 첫머리에서 자신이 받은 복음은 자신의 머리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1:12) 그리고 자신은 이 계시를 받은 이후에 바로 아라비아로 갔으며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다시 와서 그 이후 3년이 지나서야 예수의 사도들이 있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는 베드로를 만나 15일을 함께 지내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그 이름만 들어도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들 중 바나바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알고 깊은 교제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유명한 베드로였지만 자신이 받았던 복음에 분명히 어긋난 행동을 한 베드로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꾸짖은 이야기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솔직하게 기록했다. 왜냐하면 비록 베드로라 할지라도 복음앞에서 잘못된 것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질책을 받아야 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지키고 있다는 그 율법이 어떤 것인지 그 뿌리를 찾아 들어간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자신들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멀리 떠난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씨(seed)를 줄 것을 약속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것은 창세기 12장 7절, 13:15, 24:7에 분명히 기록된 내용이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백성들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한 씨를 주겠다는 말이었는데 그 한 씨는 바로 메시야, 구원자인 그리스도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중요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갔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생각해보아라! 만약 우리가 메시야를 기다리는데 율법을 지킴으로 그를 만나게 된다면 어찌 그 일이 가능하겠는가?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그 약속을 믿음으로 메시야를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바울은 이 대목에서 율법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율법이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한 그 메시야가 오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가? 바울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분명한 입장을 밝힌다. 만약 율법이 생명을 분배한다면 의는 율법을 통해서 오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런 말을 한 다음 바울은 하지만 율법이 선포한 것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었음을 언급한다.
그런다음 바울은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음을 강조하면서 유일한 출구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모든 사람이 율법 아래 갇히게 되었는데 이 출구 외에는 전혀 빠져 나갈 구멍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믿음을 통해 이 출구를 빠져 나온 사람은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이제는 자유를 얻게 되었음을 선포한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이 자유를 얻은 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가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율법의 출구를 빠져 나온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약속의 삶, 영적인 삶이었다. 바울은 하갈과 사라의 예를 들면서 그 삶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고 사라는 이삭을 낳았지만 둘다 약속의 자녀는 아니었다. 사라의 아들 이삭만이 약속으로 낳은 아들이었다.
하갈이 상징하는 것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인데 그것은 이 땅의 예루살렘과 일맥상통한다고 바울은 설명한다(4:25) 하지만 사라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인 자유를 말하며 사라가 바로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이어서 바울은 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하려고 자유를 주었으므로 더 이상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어떤 길인가? 바울은 5장 16절부터 성령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자유로운 삶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율법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믿음으로 빠져 나온 이후 갖게 된 그 자유는 ‘니 맘대로 하세요’식의 자유가 아닌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그것은 이전에 율법에서 하나라도 못 지키면 죽는다는 저주에 사로잡혔던 곳에서 비록 잘못을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 사함을 받게되는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자유를 언급할 때 대비시키는 것은 로마서와 비슷한 인상을 받는다. 그것은 죄의 본성(Sinful Nature)과 성령(Spirit)을 대비시키는 것이다. 두가지는 분명한 대립을 일으키며 대조를 보이고 있다. 그 대조는 5장을 읽어보아도 분명하지만 외부적인 어떤 문제이기보다는 내면적인 문제이며 영적인 문제로 귀결된다.
바울은 이 큰 싸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통하여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됐음과 이 믿음에 대해 확증을 받은 사실과 이러한 믿음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자유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저주에서 그 저주를 대신 지시고 죽임 당하신 그 분을 믿는 것, 즉 사탄의 통치로부터 하나님의 통치로 이전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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