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세의 축복(1) 신33:1-5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못했으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는 바라볼 수 있었지만 결코 들어갈 수는 없었다(신 32:51-52).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가서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복을 빌었다. 사람이 죽기 전에 유언을 남긴다. 사람이 남기는 유언은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모세는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해 왔다. 죽음을 앞둔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말을 남기게 되었다. 그동안 함께 해 왔던 이스라엘을 남겨두고 떠나게 되는 시점에서 모세는 아주 중요한 내용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했다. 그 내용이 바로 신명기 33장의 축복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씀은 비단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 역시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중요한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1) 모세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빌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함께 광야를 지나는 동안 늘 함께 하셨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축복하면서 이스라엘로 다가오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축복의 개념을 대하게 된다. 흔히 사람들이 ‘축복’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소개되어 있는 것이다. 세상의 상식으로 생각할 때 ‘축복’이란 말은 나를 잘 살게 해 주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는 세상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개념과는 전혀 다른 축복의 개념이 소개되어 있다.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 같은 율법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2-3) 이 말씀을 보면, 모세가 축복하는 가운데 증거하는 하나님은 오른손에 무엇을 들고 이스라엘로 다가오셨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강림하시면서 오른손에 돈뭉치를 가지고 오셨는가? 아니면 명예인가? 하나님은 소위 우리가 축복이라고 하는 것들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와는 달리 하나님의 오른손에는 ‘율법’이 있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성도는 그분의 수중에 있으며, 모든 성도는 주의 발아래 앉아서 주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복이란 율법(말씀)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돈이 많거나 좋은 집에 사는 것은 복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할지라도 율법과 관계를 갖고 있으면 복이며, 또한 물질적으로 궁핍할지라도 율법과 관계가 있으면 복이다. 물론 그 반대로 율법과 관계가 없으면 부유하게 살거나 가난하게 사는 것이 다 저주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잘살고 못사는 것, 그리고 유명하고 무명한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과의 관계이다. 그러면 율법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심판하는 기능이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심판을 당한다 할지라도 더 이상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 율법인 것이다.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기능이 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죄악들을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들추어내신다. 하나님은 그런 율법을 오른손에 들고 오셨다. 이것이 축복하는 모세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죽을 죄인으로 만드시는 것인가? 얼마 전 나는 어느 한 오래 된 건물을 리모델링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옛 건물은 안전상 문제가 있었고, 소방법에 의하여 시정명령을 받은 바 있었다. 비가 새고 낡아서, 그대로 사용하다간 빗물이 들어와 결국 무너지게 될 것이었다. 또한 화재로부터 자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건물의 안전성 여부를 진단한 결과는 한 마디로 ‘위험’이었다. 이스라엘로 말하자면 이런 건물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오늘날의 모든 인간들 역시 이런 건물과 마찬가지다. 잠시는 사용할 수 있겠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낡아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건물과 같은 것이 인간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런 낡은 건물 안에 아무리 비싼 가구라 할지라고 들여놓는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속에서 비를 맞을 게 뻔하고, 건물이 무너지면 다 박살이 나서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런 낡은 건물과 같은 인간들에게 율법을 가지고 오셨다. 그리고 정밀 진단을 하신 것이다. 율법이라는 잣대로 정밀진단을 한 결과 건물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사용불가 판정을 받은 것이다. 우리 인간이 바로 그렇다. 하나님은 율법을 가지고 오셔서 모든 인간들에게 죄로 죽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인간을 판정하신 결과는 ‘지옥!’이라는 것이었다. 낡은 건물에 새롭고 비싼 가구가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죽어 지옥에 갈 인간에게 돈과 명예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축복이라고 할 때 자신이 무너지게 된 건물이라는 사실은 잊은 채 자꾸 좋은 가구들로만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썩어질 육체를 위해 더욱 더 많은 돈이나 명예가 채워지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너질 건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고쳐야 할 필요성을 아는 것이다. 우리의 썩어질 육체 역시 고쳐져야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필요성을 깨닫도록 하는 역할을 바로 율법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율법을 오른손에 들고 오신 것이었다. 비유로 말하자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이란 낡은 건물에 채울 비싼 가구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얼마 후에는 그런 가구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낡은 건물에 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망치가 되는 것이다. 먼저 망치로 부수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무너질 것은 무너져야 튼튼한 구조물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망치로 무너지는 아픔이 없이 누리는 것들은 그것이 제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신이 무너져 내릴 건물임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 즉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망치는 결코 복이 아니다. 그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좋은 가구들이 복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율법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 고이 간직했던 것들, 열심히 노력하여 쌓아왔던 것들이 어느 한 순간에 고스란히 무너져 내려 박살나고 말 것이다. ‘불같은 율법’이란 결국 마지막에는 말씀에 의해서 심판 받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지금 자기를 무너뜨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저주일 뿐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복이라는 것을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로 한정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망치를 가지고 오신다. 실은 그것이 복인데, 미련한 인간들은 율법을 통해서 망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것들로 채워지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복은 세상 일이 잘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복이라면 기독교인이 아닌 불신자들이 성공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정녕 복의 현장은 주의 발아래 엎드려 말씀을 받는 것이다. 망치를 통하여 허물어진 그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지는 것이다. 내 맘대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그 자리가 망치로 깨어지는 아픔이 있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보고, 설교를 듣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비단 교인들만이 아니다. 지식인들은 성경을 읽는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단지 무언가를 받기 위하여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박살내게 해 달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제야 그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새로운 것들로 채워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긴다. 말씀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많이 읽느냐 적게 읽느냐 하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말씀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말씀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전혀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씀을 가진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들은 얼마나 성경을 읽었겠는가? 십자가상에서 구원받은 한 강도는 얼마나 성경을 읽었겠는가? 바리새인들에 비하면 천분의 일도, 만분의 일고 안 읽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의 역할을 깨닫게 되었다. 말씀이 소중한 이유는 무엇인가? 말씀은 우리의 소중한 것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이해하고 우리 자신이 죽을 죄인임을 고백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른다. 세상 사람들은 그 누구도 이런 아픔을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기에 망치를 들고 오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무릎을 꿇는 것이 사는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린다면 그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임에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