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를 위한 축복(2) 신33:9-11
지난 주일에는 레위를 위한 축복을 생각하면서 레위의 질투를 초점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이 레위에 대한 말씀이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에 레위의 질투는 곧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이요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것을 보면 자기도 질투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했습니다
. 좋은 것이 좋다고 하면서 적당하게 살려고 하지 말고 여러분도 질투하는 자가 되십시오. 우선 자기 자신에게 질투하십시오. 질투하여 자기에게 있는 반하나님적인 것들과 싸우고 도륙하십시오. 결단코 그런 것을 합리화하며 옹호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본성에 싸우기를 싫어하고 귀찮아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성을 따라 가면 멸망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질투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한 바람기가 여러분에게도 있습니다. 그런 모습과 행동이 있을 때 질투하고 싸우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의 질투를 가지고 질투하십시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좀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무엇과 싸웠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9절에 “그는 내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 형제들을 인정치 아니하며 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고 했습니다. 레위는 부모 형제 자녀와 싸웠습니다. 이들을 하나님의 원수로 생각하고 도륙하였습니다. 아무리 가깝고 사랑스런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편에 서 있지 않을 때는 가차없이 그들을 도륙하였습니다
. 그러므로 여러분도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 부모 자기 형제 자기 자녀라고 일방적으로 두둔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변호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들이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는 모습을 보이거든 사정없이 책망하십시오.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책망을 받거든 변호하려고 하지 말고 감사하십시오. 우리들은 흔히 맹목적으로 혈육을 두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혈육이라도 하나님의 편에 서 있지 않거든 두둔하려고 하지 말고 책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아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질투는 대속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도 질투는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 왔고 그로 인하여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레위인들이 칼을 차고 이스라엘 온 진을 돌아 다니며 범죄한 자를 도륙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심판을 대행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나머지 이스라엘에 진노가 임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모세는 ‘헌신’이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25장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여인과 행음하려는 이스라엘의 남자를 심판하여 죽인 것을 보시면서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느하스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언약하시면서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질투는 대속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질투는 사랑입니다. 질투를 통하여 대속이 있고 용서가 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질투하고 사랑하므로 책망하였을 때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회개하고 돌이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질투하고 책망하는 것은 가장 큰 사랑입니다. 이것을 사랑으로 알고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무엇을 크게 잘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자존심을 생각하고 기분이 상했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신앙의 모습은 이것을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어떤 목사님이 주일 학교 아이 중에서 말을 듣지 않고 애먹이는 아이를 잡아서 한데 때렸다고 그 부모들이 목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야단을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에 대하여 신물이 났는지 그 목사님은 교인들과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교인들이 싫어서 그렇겠지요. 대신에 그 속에 울어 나는 울분을 글로써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제법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보지 않고 있는 듯이 육신의 생각을 따라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 하나님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의 자존심과 이기성에 빠져서 교회도 자기 식으로 생각하고 남을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을 볼 때 눈물이 날 때가 있기도 하고 보기가 싫어지고 설교를 그만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설교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설교를 하지 않고도 제가 또 그런 모습을 보고 욕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또 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나로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에라 욕할 바에야 아예 외고펴고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설교하는 자로서 욕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쨌던지 이기성과 옛 사람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는 생명이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생명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믿는 자라고 생각하거던 그런 모습에서 근본적으로 돌이키십시오. 그래서 자신을 살리십시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왜 질투가 먼저 와야 합니까?’라고 물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야 인간이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인 아닌 인간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부드러운 모습이 먼저일 수가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질투가 먼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죄인에게 먼저 닥아 오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질투에 헌신하는 것이 주님의 법도요 율법이요 제사입니다. 10절을 봅시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단 위에 드리리로다”고 합니다. 레위가 앞으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레위가 하나님의 질투로써 심판을 행하여 이스라엘에 진노가 임하지 않게 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질투에 헌신하여 대속을 이룬 것이 바로 율법과 법도와 제사의 정신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과 법도와 제사는 모두가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가지 말이 모두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에 대하여 질투하며 심판하는 것과 그로 인하여 용서를 가져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레위인들은 이것을 보여 주었던 자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제사를 드리는 자로서의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질투하고 죽이고 구속하는 이 일을 물론 예수님이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죽고 새롭게 살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합시다. 질투하고 죽이는 것이 없는 율법과 제사는 없습니다. 죄성을 질투하고 죽이는 것이 없는 한 그것은 율법도 제사도 아닙니다. 즉 죄성을 향한 질투와 싸움이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란 의식이 아니라 질투하고 죄와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대속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나 신앙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결코 의식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교회에 왔을 때만 믿는 채 하지 말고 생활 가운데서 믿으십시오. 믿는 마음으로 생활하십시오. 자기와 다른 사람의 이기심과 육적인 죄성과 싸우며 씨름하십시오. 여호와의 질투를 따라 싸우십시오. 이것이 성도가 서로 간에 사랑하는 길입니다. 성도는 서로 간에 형제이기도 하지만 서로 간에 싸우는 자이기도 합니다. 자기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싸움의 대상으로 보십시오. 얄팍한 사랑론에 빠지지 마시십시오. 이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모세는 이런 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11절을 봅시다. “여호와여 그 재산을 충족케 하시고 그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질투하여 싸우는 자가 이겨야 한다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실 자는 이런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축복하시도록 위하여 기도한 사람도 이런 사람을 위하여서입니다. 그 내용을 봅시다. “여호와여 그 재산을 충족케 하시고...”라고 했는데 여기서 ‘재산’이라고 번역된 말은 번역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많은 곳에서 ‘군대 또는 군사’로 번역되었고(출14:4,17,왕상20:1,왕하25:1,5) ‘재산’(욥15:29), ‘힘’(시33:17)등으로도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힘’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레위가 여호와의 질투로 헌신한 것을 두고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재산을 이야기 하는 것은 문맥상 맞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손의 일을 받으소서’라는 다음 구절을 생각해 보면 ‘재산’이란 번역은 더욱 문맥에 맞지 않습니다. ‘그 손의 일’이란 레위가 칼과 창을 가지고 여호와의 질투로써 도륙하고 살해한 것을 가리키고 있는데 여기에 ‘재산’을 풍족하게 해 달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이 넘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렇게 번역하고 보면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과도 맞아떨어집니다. 즉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꺽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힘이 넘치게 해주면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꺽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모세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질투로 대속을 위하여 싸우는 자의 헌신을 받으시며 더욱 잘 싸우도록 힘을 넘치도록 하시며 대적하여 일어나는 원수들을 꺾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 말씀이 가장 이상적으로 나타난 것이 예수님의 생애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은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눅12:49-51)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불같은 질투로써 세상에 심판과 분리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거짓된 죄성에 대항하여 불같이 싸우셨습니다. 거짓된 종교와 위선에 대항하여 심판을 선언하며 불같이 싸우다가 맞아 죽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그는 마귀의 세력을 파괴하셨고 교회를 대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레위를 위하여 한 말씀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질투의 정신이 없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질투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애가 타고 답답한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자기와 다른 형제의 죄성을 보고 교회의 죄를 볼 때 어떻게 답답하지 않을 수 있으며 질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욕심 때문에 답답한 것이 아니라 죄성을 볼 때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자기의 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을 위하여 싸우시며 힘을 주시며 대적을 꺾으십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의 백성 곧 믿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기도했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난만 하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만큼 기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욕하고 비난하면 자기도 욕먹고 미움을 받고 매장을 당하는 데 그래도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 쫓겨나도 좋고 목사 못해도 좋다는 각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만큼 진짜 기도가 어디 있습니까? 기도란 헌신인데 이것이 헌신한 모습이 아닙니까? 기도한답시고 몸사리고 있는 것보다는 이것이 진짜 기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질투심이 여러분 속에 있거든 그것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자기의 자아와 비굴과 욕심 속으로 움츠러 들지 마십시오. 싸우는 데 헌신함으로써 자신의 대속을 되새기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하여 싸우셨고 또 지금도 싸우고 계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단코 육신을 위해서 싸우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