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 대신 축복을 (2)

저주 대신 축복을(2)
민23:13-26





대부분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은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그대로 물러서는 법이 없다. 그 음모가 이루어질 때까지 이 방법 저 방법, 이 수단 저 수단을 다 동원한다. 그들의 목표는 한 개인이나 단체나 더 나아가서는 국가를 어떻게 해서든지 넘어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오는 발락 왕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이스라엘을 쓰러드리기 위해 점술가 발람을 돈으로 사서 음모를 꾸몄는데, 처음 기대와는 정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발람의 입에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축복의 말이 나왔고, 그는 자신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를 분명히 설명했다. 즉, 발람은 1) 자신이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는 자를 저주할 수 없고, 2)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특별한 백성이며, 3) 자신의 눈에 보기에도 그들의 숫자가 티끌처럼 창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발락 왕은 아마도 자기가 발람에게 이스라엘 진친 것을 너무 많이 볼 수 있도록 잘못 인도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스라엘 진 한 끝만 보이는 곳으로 발람을 데리고 올라갔다.
13절을 보라.

발락이 가로되 나와 함께 그들을 달리 볼 곳으로 가자. 거기서는 그들을 다 보지 못하고 그 끝만 보리니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하고...

그는 발람을 다른 관점에서 이스라엘을 볼 수 있도록 비스가산 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갔다 (14). 비스가산은 모압 평지가 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지로, 그 중의 한 봉우리가 모세가 그의 생애의 최후를 맞은 느보산이었다 (신 34:1). 첫 번째 경우처럼 발람은 말씀을 받으러 갔고, 발락 왕과 그의 귀인들은 번제를 드린 곳을 떠나지 않고 \"자, 이번에는 진짜 저주가 나오겠지\" 하며 큰 기대 속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발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온 말씀은 이번에도 \'저주 대신 축복\'이었다. 발람은 또 다시 발락과 그의 귀인들 앞에서 \"자신이 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에 축복할 수밖에 없는가?\" 하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오늘도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 대신 축복을 빌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상고해 보면서, 우리들의 삶에 이 말씀을 적용해 보기로 하자.

식언치 않으시는 하나님

첫째로, 하나님은 인생처럼 식언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19절을 보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첫 번째 예언에서 발람은 주로 이스라엘의 관점, 곧 그들이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나님의 관점,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그 신실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1. 사람처럼 거짓말을 하고,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분이 아니시다.
타락한 인간은 누구나 그 마음이 거짓되다고 성경은 말한다.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그 마음속에 있는 거짓이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믿지 않았을 때와 은혜 받지 못했을 때에 비교해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거짓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마음에는 거짓을 말하고 행하려는 동기는 없지만, 환경 때문에 마지못해 거짓을 말하고 행하는 수도 있다. 때로는 우리가 흔히 \'하얀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처럼 좋은 동기의 거짓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질 상 빛이시기 때문에, 그에게는 거짓을 상징하는 어두움이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일 1:5)고 했다.

2.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약속하시면 절대로 실행하는 분이시다.
사람은 약속하고도 어기는 수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끼리 서로간에 약속을 어기지 못하도록 \'계약서\'를 만들고, 만일 이를 어기면 벌금을 물도록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약속하셨으면 꼭 지키신다. 그래서 성경에 3만 개가 넘는 약속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다.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위에 달려 죽게 하셨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를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리셨고, 승천하여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다. 그의 변치 않는 약속대로 그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심판 주로 재림하실 것이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의 택한 백성으로서 끝까지 돌보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어떻게 발람 자신이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위로의 메시지인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명 감당하는 것을 실패한 백성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육신적인 이스라엘을 포기하고 새로 영적인 이스라엘 된 우리들을 새로 택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더 큰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다. 실패한 이스라엘에게도 끝까지 약속하신 것을 지키신 그 신실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이스라엘 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지 않으시겠는가?

하나님의 명령

둘째로, 이스라엘에게 저주 대신 축복을 비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20절을 보라.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발람은 자신에게 말씀하신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그가 자신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하셨으니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만일 그가 그 명령대로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요, 이는 결국 그를 대적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최근에 미국 공군 소령인 조종사 한 사람이 전염병 예방 주사를 맞으라는 상부의 명령에 불복종했다.
그 이유는 그 예방 주사를 맞은 군인들 중에 부작용으로 죽은 사람들이 꽤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상부의 명령기관과 대항하다 결국 옷을 벗게 되었다.

이처럼 사람들 사이에서도 힘있는 정부나 상부 기관에 맞서 대항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인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과 맞서 대항한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리석은가? 더군다나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들의 명령처럼 부작용이나 탈도 없다. 그의 명령은 사람들의 지혜, 사고, 한계를 초월하는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발람은 어리석은 길 대신 지혜로운 길을 택했다. 그는 죽는 길 대신 사는 길을 택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따지지 말고 무조건 따르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자.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않는 하나님

셋째로,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허물과 패역을 보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21절을 보라.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이스라엘은 외모로 보면 모압 백성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모압 백성이 죄인인 것처럼, 그들도 죄인이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혜와 혜택과 특권을 받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저버리는 패역한 백성이었다. 보통 사람들 생각으로는 그런 이스라엘이 당장이라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발람에게 하나님은 정 반대로 말씀하셨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요, 그의 자녀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죄를 지어도, 패역함을 보여도, 그것을 더 이상 허물이나 패역으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허물 많고 패역한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마땅히 징계를 받고 심판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용서의 은혜를 받았으니 그 이스라엘이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21) 하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겠는가?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들은 자녀가 되는 특별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자녀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그래도 여전히 사랑한다. 불량한 자식이라도 여전히 \'내 자식\'으로 간주하는 마음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과 패역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더 이상 죄와 허물과 패역으로 여기지 않으시는데 어떻게 발람 자신이 그들을 저주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론적으로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23)고 말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 진리는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들도 이스라엘처럼 하나님 앞에 죄도 짓고, 허물도 많고, 패역하게 살았다. 그래서 마땅히 징계를 받고 심판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우리들이 그의 자녀가 된 것 한 가지를 보시고, 더 이상 죄와 허물과 패역으로 여기지 않으신다. 원수 마귀가 고소인이 되어 우리의 죄, 허물, 패역을 갖고 하나님 앞에 \"이래도 이 사람을 심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고 참소한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묻은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아버지여, 제가 바로 이 사람 허물과 죄와 패역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하고 변호하신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구원받은 죄인\'으로, 참소하는 마귀 앞에서는 \'용서받은 의인\'으로 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셨음으로 아무도 우리를 정죄하거나 참소할 수 없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3,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