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축복이 시작이 됩니다

기도, 축복의 시작입니다
요일5:14-21





기도다움의 복음

요한은 앞서 3:21-22에서 기도를 말했다.
그는 3장에서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라고 기도 응답의 확신을 선언했다. 그 이유를 22절 후반절에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증거함으로써 말씀과 일치된 믿음과 사랑을 통한 일상생활의 영성이 응답 받는 기도의 비밀임을 역시 확신하며 증거하였다.

요한은 기도를 말할 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엎드려 있는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는 정성이 있는가, 얼마나 크게 부르짖는가와 같은, 말하자면 내(사람) 쪽에서 만들어가는 기도의 방법론을 말하지 않았다. 사실 기도생활의 영성은 방법론에 익숙해 있는 것만큼 놓치고 있는 것들이 많을 수 있다. 따라서 나에게 익숙한 기도가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로 돌아가야만 한다. 오늘은 요한의 기도신학(祈禱神學)을 통해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가 무엇인가를 주목하면서 기도 앞으로 나아간다.



기도의 법칙(14-15)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나아감이다. 얼마나 명쾌한가. 누가 기도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바로 앞 절 13절의 은혜를 맛본 사람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 주님의 \'친백성\'됨을 얻은 사람, 오직 그만이 기도자(Prayer)의 특권을 소유한 자녀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그것만큼 당당할 수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담대함\'이다(14). 그러나 기도가 당당하고 또한 담대할 수 있는 조건은 내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있다. 종종 \"나는 기도 많이 해! 내 기도 응답은 빨라! 나 기도 잘 해!\"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만큼 기도에 대한 오해와 무지인 것을 자인하는 교만이 또 있을까. 내가 얼마나 당당하고 담대한가가 기도를 낳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13)가 나로 하여금 기도의 법칙 앞으로 나아오도록 한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안다\'.

이렇듯 자기 욕심과 욕망을 따라 세상을 좇아 온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2:16)- 것들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뜻만을 구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며 사는 삶과 무관하게 [내가복음] 식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심이라는 기도의 들으심을 맛 볼 수 없다. 불행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내가 기도하는 것으로 끝나도록 하지 않으신다. 놀랍게도 내 기도를 들으신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응답하신다(15). 더 감동스러운 것은 이 모든 기도의 전 과정과 결과가 나에게까지 알려진다는 사실이다 : \"… 들으시는 줄을 안즉 …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이것이 기도가 주는 무한한 축복이다.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시고(4-5), 동시에 예수 안에서 기도의 법칙을 따라 승리케 하신다(14-15). 감사할 따름이다.



중보기도(16-1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16)

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중보기도\'로까지 편지를 확대한다. 영지주의 이단에 현혹되어 불의(不義) 가운데 있는 죄인(罪人)들을 포함하여 그가 만일 사망에 이르는 범죄자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배도 행위와 성령 훼방죄(마12:31-32)를 범한 것이 아니라면 그럼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형제\'에 대한 사랑임을 말한다. 요한은 하나님보다 앞서 정죄하는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함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 \'형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저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점까지 기도의 지평을 확장하고 있다.

요한의 기도는 그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 참으로 탁월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기도는 이렇듯 영적으로 형편없는 처지로 추락한 자들까지 품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사랑이 없이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당신과 엉켜있는 자들을 자유케 하시기를 원하신다. 죄인을 향해서도 기도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넉넉한 영성의 사람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구령의 열정을 소유한 사람이다. 더 나아가 잘못된 신앙에 빠져 사망에 이를지도 모르는 이웃을 향해 바른 신앙, 바른 믿음, 바른 영성의 사람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중보기도는 사랑이 그 뿌리다.

나는 이처럼 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기도 속에서 주님의 마음을 공유하며 사는가. 나는 영혼이 병든 심령들을 위해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함으로써 저들을 사랑해야 할 사람들로 새롭게 잉태하고 있는가. 나의 기도는 연약한 사람들을 회복시키며, 그들로 하여금 나와 동일한 하나님의 은총을 받도록 하는데 까지 쓰이고 있는가. 기도가 약해지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것만큼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일까. 조금은 답답하다.



부스러기 묵상

나는 기도를 어머님에게서 알았고, 배웠다.
중풍으로 쓰러지셨던 그 날 새벽까지 새벽기도의 자리를 지키며 교회와 목사님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고아들과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던 어머니,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어머니의 기도 때문임을 감사하고 있다. 지금은 가족들과 장모님, 사랑하는 아내의 기도, 그리고 많은 성도들(소망회)의 기도의 은혜 때문임을 잊지 않고 있고, 또 잊지 않을 것이다.

기도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안 것은 -기도의 능력을 안 것과 그 능력이 내게 있느냐는 지금까지도 끝나는 않는 내 영적 싸움터다.- 대전(大田)에서 목회를 하고, 또 배우던 때부터다. 나는 기도에 관한 한 존경하는 최병남 목사님(대전중앙교회 담임, www.choongang.or.kr)께 입은 6년 동안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다. 아직도 기도는 내게 익숙하지 못한 평생 숙제이지만 기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귀한지 모른다. 나는 최목사님을 통해 기도하는 법을 배웠고, 기도가 목회에 있어서 어떤 힘인가를 목회 현장에서 채득할 수 있었다.

한편, 이철 목사님을 만나고 남서울교회(www.namseoul.org)를 섬기면서 중보기도를 배웠다. 무엇보다도 기도가 삶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생활이 곧 기도임을 이목사님을 가까이에서 섬기면서 발견하게 된 보화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의 능력이 무엇임을, 사람은 기도하는 시간의 양(量)을 보지만 하나님은 기도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기도는 기도 이후의 생활의 질(質)로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나의 신앙고백으로도 하나님께 드리기까지는 실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기도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생활을 건강하게 하는 사람, 삶이 능력으로 열매맺어지기 위해 기도생활에 생명을 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기도에는 성공했지만 삶에는 실패한 사람, 삶에는 승리했지만 기도에는 아무 능력 없고 기도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소중한 인생이고, 연습해 보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생(生)은 아니지 않은가.

목회는 기도만큼 되고, 기도는 목회만큼 살아있다고 믿고 있다. 기도가 목회를 건강하게 한다고 믿기에, 목회가 기도를 방해하지 않도록 건강한 목회와 목회자가 되고 싶다. 기도 속에 이 비밀이 숨어있음을 알기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가장 소중한 사명과 소명으로 알고 생활과 기도 모두에게서 승리하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요한일서 후기

지금도 따끈따끈한 요한의 목회적 권면이 느껴진다.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듣고 배우는 목회일기는 언제나 나에게는 도전이다.
성경과 나의 넘을 수 없는 간격 때문에 때로는 낙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치요 교만이 아닐는지.
그 차이의 넓이만큼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질 수 있기에 행복하다는 생각,
지금 막 들어진다.

하나님의 거룩 안에 있는 \'사랑\'을 이 땅의 언어와 삶의 양식으로 느껴지고,
보여지고,
알아지도록 가르쳐주는 요한의 열정을 내 안에 채우기까지
아직은 멀어 보이는 \'사랑방정식\' 앞에 서 있다.

언제쯤이면 나 역시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전하며,
사랑으로 걸어다니는 복음이 될 수 있을까?
이것마저 부질없는 욕심이 아닐까.
사랑의 주변만을 맴도는 사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
이게 나다.
그래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자.
요한 역시 요한일서를 쓰는 사람으로
어느 날 갑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니었음이 참 은혜가 된다.
그러나 그는 성장과 성숙이 정지된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 있는, 사랑 있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은총 가운데 붙들려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나 또한 희망이 아닌가.
가슴이 뛴다.
나 역시 요한처럼, 요한과 더불어 사랑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전하며,
사랑으로 목회하는 사람이 되는 날이 있으리라는 동일한 꿈을 가져본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시며,
그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나에게도 은혜를 주실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자!
오늘도 참 많은 삶의 흔적들이 나를 통과해 간다.
얼마나 신나는지,
내가 하나님을 반영하고 살아간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기적이기도 하고, 그렇게 하루를 살아간다.
요한으로 더불어 함께 살았던 지난 2주간이 참 행복했다.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