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녀에게 주신 축복 요일5:11-15, 사49:14-15 대학의 문화는 화장실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학교의 화장실에 있는 많은 낙서를 두고 한 말입니다. 화장실은 나 홀로 있는 은밀한 장소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짧게 그러나 마음껏 써놓을 수 있습니다. 옛날 연세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도서관 화장실에서 읽은 낙서 가운데 기독교를 비판하는 내용이 제법 많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연세대학교가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학교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기독교 개론을 가르치고, 또 예배에 참석하게 하기 때문에 생겨난 기독교에 대한 반감 때문일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글들 가운데 대부분의 것은 “기독교는 너무 독선적이다”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고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많이 있는데, 불교의 석가모니나 이슬람교의 알라신은 왜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이라고 하고,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편협된 생각 속에 빠져 있느냐는 비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기독교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참신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 편협되고 독선적인 것입니까? 만일 그게 편협되고 독선적이어서 이렇게 바꾼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신이 아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아도 괜찮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길은 얼마든지 있다.’ 만일 우리 기독교가 그렇게 가르친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가 굳이 존재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목숨을 내걸고 이 진리를 지키려고 하고, 왜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도 많은 선조들이 피를 흘려야 했겠습니까? 기독교를 기독교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 아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는 신앙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구원자이심을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앙이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는 다양성의 시대입니다. 무언가 하나를 절대적인 진리로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 현대의 특징입니다. 무엇이든지 내 입맛에 맞는 것을 골를 수 있는 것이 현대의 장점이자 매력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 군인교회에서 예배인도를 마치고 다과를 나누던 중에 한 간부의 휴대폰 벨소리가 화제로 떠올랐습니다. 그분의 휴대폰 벨소리가 참 재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벨소리를 들려주는데 이렇습니다. “사장님, 전화 받으세요.” (처음에는 비서가 사장님께 ‘전화 왔다’고 알려주는 것처럼 아주 점잖게, 그러나 전화를 받지 않으면 소리가 점점 커지고, 나중에는 버럭 화내는 소리가 된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전화벨소리를 마음대로 다운받아 사용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벨소리를 바꿔버립니다. 전화기기도 자주 바꾸는데, 벨소리 쯤이야 얼마나 자주 바꾸겠습니까? 그만큼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것입니다. 뭐든지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다양성의 시대에 한 가지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 기독교는 원시인의 종교처럼 보이고, 여전히 그런 진리를 고집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젊은이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시대가 다양해지고,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골라 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더라도, 진리만은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오늘의 시대는 절대적인 진리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는 존재합니다. 그 영원한 진리를 우리가 믿기에 우리를 신앙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영원한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성경에서 가르쳐준 진리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중요한 진리 가운데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주심으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영원한 형벌이 없어지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음을 믿습니까?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것을 믿을 수 없다면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요 1: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여러분, 다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으십니까? 분명하게 대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약속하신 대로 이제 하나님의 자녀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주어진 특권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과 1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자녀된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의 자녀들에게만 주신 특권입니다. 원래 우리는 죄로 인하여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가 가진 그 무엇으로도 다 갚을 수 없을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지옥 형벌을 당할 수밖에 없을만큼 많은 죄를 가졌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해 주신 우리의 죄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꾸며진 이야기입니다. 어느 덕망 높은 스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 스님의 영혼이 저승에 도착했는데 저승 길 앞에서 한 남자가 그를 맞아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머나먼 황천길 오느라고 수고했네. 내 자네를 천국에 들여보내 주고 싶은데, 거긴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네. 자 저 뒤를 보게나.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가 보이지. 저 사닥다리에는 발판이 하나도 없네. 내가 먹물 한 통과 붓을 줄테니 죄가 생각나는 대로 사다리에 금을 긋게나. 금을 그을 때마다 사닥다리에 발판이 하나씩 늘어나게 되고, 자네의 죄가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 때, 천국에 도착할 수 있을 걸세. 아무도 자네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모르네. 자네의 죄는 자네가 가장 잘 알테니까, 자네가 알아서 하게나. 건투를 비네.” 그리고는 먹물이 한 되나 들어 있는 커다란 통과 붓을 하나 주고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스님은 사닥다리를 향해 가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는 평생 부처님을 공양하고 죄 많은 중생들을 계도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지은 죄가 하나도 없고, 사닥다리 한 칸만 올라가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괜히 무겁게 이렇게 많은 먹물을 줄 필요가 없는데’ 라고 생각하며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사닥다리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사닥다리를 본 순간 죄가 하나 떠올랐습니다. ‘출가하기 전에 부모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닥다리에 금을 하나 그었습니다. 그리고 사닥다리 계단에 올라서는 순간 또 죄가 생각났습니다. ‘비록 부처님을 모시기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해서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죄’가 생각나 금을 또 하나 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죄가 생각났습니다. ‘동자 놈이 잘 되라고 나무랄 때 너무 심하게 한 것’이 생각 나서 금을 하나 긋고, 신자들을 나무랄 일도 아닌 것에 나무랬던 것도 생각나 또 금을 긋고,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모두 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금을 긋고 또 긋고 하면서 올라가는데, 사닥다리는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죄의 고백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사닥다리는 계속 높아만 갔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죄가 생각나는 대로 금을 그으면 올라가다 보니, 옆에 있는 사닥다리에서 누군가가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유심히 살펴보니, 자기보다 한 달 먼저 세상을 떠난 큰 스님이었습니다. 반가웠습니다. “그래 큰 스님이 날 불쌍히 여기시고 데리러 오시는 걸꺼야”라고 생각하고 큰소리로 “큰 스님, 저 아무개예요. 저 좀 데리고 올라가 주세요.”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큰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야, 이놈아! 난 먹물이 떨어져서 먹물 가지러 가는 길이란다.” 여러분, 만들어낸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분명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리석고 아둔해서 깨닫지 못한 것뿐이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가 드러난다면 먹물이 몇 통 있어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까?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죄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 죄로 인해서 죽음의 형벌,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고, 자녀인 우리가 영원한 죽음의 형벌, 지옥 형벌을 받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자들로 불러주셨습니다. 그것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지옥 형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은 지옥의 형벌과 죽음의 형벌을 이긴 생명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에게 이 생명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이 생명의 은총을 증거하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가 되었다는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자녀된 우리가 기도한 모든 것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게 자녀인 우리에게 주신 두 번째 특권입니다. 오늘 본문 14-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뿐만 아니라, 구하는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주시는 것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책을 사야 한다고 돈을 달라고 할 때에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가서 달라고 합니다. 책이 필요하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가서 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달라고 해도 주지 않습니다. 자기 자식도 아닌 얘에게 누가 선 듯 ‘책 사라’고 돈을 주겠습니까?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자기 자식이 아닌 이상 선뜻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아버지는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약 1: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기 않겠느뇨?”(롬 8:32)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주시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능히 모든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버지께 달라고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놓은 모든 좋은 것들을 받아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주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필요하다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에게 주실 모든 좋은 것들, 모든 축복들이 아직도 하늘 창고에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예전에 수요 성경공부 때에 해드린 이야기를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때 우리 기독교계에서 베스트 셀러였던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존스라는 사람이 천국에 갔을 때 베드로가 천국을 구경시켜 줍니다. 천국을 구경하던 도중에 큰 창고를 보고 그곳을 구경시켜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곳만은 구경하지 않는 것이 좋을거라’고 하면서 구경시켜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사람의 심리가 보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 싶고, 가지 말라고 하면 더 가고 싶잖아요? 존스도 베드로가 보지 않는 게 더 좋을거라고 말하는데, 그러니까 더 보고 싶어졌습니다. 천국 구경을 다 마친 후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부탁을 했습니다. 꼭 보고 싶으니 그 큰 창고 안을 한번만 구경시켜 달라고 베드로에게 졸라댔습니다. 하는 수 없이 베드로가 큰 창고 문을 열고 그를 그 안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창고 안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져 있는 수많은 상자들이 가득히 쌓여 있었습니다. 존스가 “이게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예비해 놓은 것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시지 못한 축복들”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내 것도 있느냐?”고 묻자, “당연히 있다”고 대답해 줍니다. 존스는 자기 상자를 보고 싶었습니다. 보지 않는 게 좋다고 말리는 베드로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자기 이름이 적힌 상자를 찾아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들이 가득히 채워져 있었습니다. 땅에 있을 때에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준비해 놓으신 이 많은 축복들을 바라보면서 존스는 후회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축복을 예비해 놓으셨는지 모릅니다. 그걸 다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도 하기만 하면,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만 하면, 언제든지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기도한다고 다 응답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의 말씀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말이 “그의 뜻대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요구한 그대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구한 것이 하나님의 뜻과 맞을 때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3) 왜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주시기 위해서 예비해 놓은 것을 받지 못합니까?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하여도 왜 받지 못합니까?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러지 않습니까? 자식들이 전혀 엉뚱한 것을 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주고 싶어도, 주어서 자식을 망치게 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떼를 써도 주지 않습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건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시고 싶어도 잘못 구하면 우리를 위해서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미뤄놓으십니다. 그 외에는 다 주십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다 주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로 인한 형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이 약속되어 있을 뿐입니다. 죄로 인한 두려움과 죄의 형벌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신앙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인 우리에게 모든 축복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보다 우리의 형편을 더 잘 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읽은 이사야 49장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는 간혹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신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른체하고 우리를 어려움 가운데 몰아넣으신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잊거나 버리는 일은 혹 있을지 모르지만, 나 여호와는 택하신 자녀들인 너희를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있단다.” 여러분, 이 약속을 믿고,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신앙의 삶에서 승리하시는 복된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